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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눈물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누가복음 7:36~5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8.22 20:29

한 여인이 예수께 향유를 붓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모든 복음서가 다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마가 14:3~9, 마태 26:6~13, 요한 12:1~8). 대체로 이 이야기는 이른바 ‘거룩한 낭비’라는 개념 안에서 기억됩니다. 그 점에서 마태, 마가, 요한 세 복음서가 모두 유사합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의 본문은 한 여인이 옥합을 깨트린 행위를 포함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통상 성서본문에는 그 병행구절이 명기되는데, 누가복음 본문에는 병행구절이 명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른 이야기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서는 이 사건을 예수님의 생애 후반에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지만, 누가복음은 생애 초반에 일어난 것으로 전하고 있는 것부터 다릅니다. 세례 요한이 전면에서 사라지고 예수님의 공적 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초반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것도 세례 요한이 엄격한 금욕주의를 따른 데 반해 예수께서는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대비하는 이야기(누가 7:33~35)에 곧바로 이어 이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쟁점은 죄의 용서에 관한 것입니다.

바리새파로서 시몬이라는 사람의 집에 예수께서 초대를 받아 식사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만 기억하기 쉽지만, 예수님께 호의적인 관심과 존경심을 가진 바리새파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누가 11:37, 14:1). 심지어 예수께서 위험에 처한 것을 알고 염려하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누가 13:31).

예수께서 사회 하층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인 것이 꼭 사회 상층 사람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입니다. 예수님을 자기집 식사 자리에 초대한 이 바리새파 사람은 매우 진지한 사람일 뿐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존경심과 더불어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예수를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초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죄인인 한 여인이 등장함으로써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더불어 그 진지하고 예의 바른 바리새파 사람이 어떤 생각을 지니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딱히 청했다는 이야기는 없는데, 그 식사 자리에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여겨진 한 여인이 찾아왔습니다. 통상 창녀로 지칭되어 왔지만, 어떤 죄인인지는 적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죄인이라는 딱지가 붙은 만큼 그 사회 공동체 안에서 마땅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향유 옥합을 들고 찾아온 그 여인은 식사 자리에 들어와 예수님 등 뒤에 서서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도 절절한 사연을 갖고 있었을 것이며, 그 절절한 사연을 예수님께 호소하려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찾았을 것입니다. 다른 복음서들이 전하는 바를 따르면, 그가 들고 온 향유 옥합은 매우 비싼 것이었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며, 그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드리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보통 향유는 귀한 분의 머리에 발라 드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보자마자 말도 꺼내기도 전에, 마음먹었던 바를 행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쏟아져버렸습니다.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이 여인이 어떤 말을 했다는 내용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그 어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의 처지와 생각을 모두 꿰뚫고 계십니다. 이 여인 또한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얼굴과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 그저 눈물이 쏟아질 만큼 마음의 교감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눈물이 예수님의 발등에 떨어졌습니다.

여인은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등을 닦고 그 발에 입을 맞춘 후 향유를 발라 드렸습니다. 값비싼 향유를 발라 드린 것만이 그의 정성과 헌신을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 몸의 일부인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겨드린 것이 오히려 더 지극한 정성과 절절한 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난 사태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바리새파 사람은 이를 보고 깜짝 놀랍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죄인들과 식탁을 같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식사 자리에 죄인이 나타난 것 자체가 놀랄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만지고 향유를 붓기까지 했으니 더욱 경악했습니다. 이를 전혀 제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예수님이 의심스러웠습니다.

존경할 만한 선생이요, 예언자라 생각하여 초대했는데, 그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라면 마땅히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이고, 따라서 상종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 텐데 그 여인의 행동을 아무런 조건 없이 용납해주는 태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기준으로 볼 때, 그 행위는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경악하는 바리새인 시몬을 두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비유를 듭니다. 채권자에게 각각 오백 데나리온과 오십 데나리온의 빚을 탕감받은 두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겠느냐는 물음을 던집니다. 당연히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것이라고 바리새인 시몬은 답합니다.

▲ Rubens, 「Feast in the House of Simon the Pharisee」 (1618–1620) ⓒWikipedia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여인을 보며 시몬에게 말합니다.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에,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았다. 너는 내게 입을 맞추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들어와서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 주지 않았으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랐다. 그러므로 내가 네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것은 그가 많이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용서받는 것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7:44~46)

사실 예수님께서 든 비유와 그 비유에 덧붙이는 이야기는 미묘한 차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비유는 많은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보인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그 해설은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인이 보인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자 결과라고 간단하게 정리해도 무방하지만, 이야기의 맥락으로 보면 사랑의 행위가 먼저 등장하고 용서의 선언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예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높이 삽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7:50)

예수께서 이 여인의 중심을 보셨다는 뜻입니다. 사회적 낙인이 아니라 먼저 사람을 보셨고, 그 중심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예수님을 보자마자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형편을 다 헤아리고 용납해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이 장면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이 수군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도 용서하여 준다는 말인가?”(7:49) 식사 자리를 마련한 바리새인 시몬이 놀란 것보다 더욱 놀란 반응입니다. 시몬이 당대의 규범에 충실한 사람이듯, 그 자리에 동석하여 놀란 다른 사람들 역시 당대의 규범에 충실한 사람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모범적인 시민이요 적절한 교양을 갖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해서는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굳이 죄의 용서를 구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또한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최소한 하나님을 대리하는 직분으로서 대제사장의 몫이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믿음에 비추어 볼 때 설령 예수께서 훌륭한 선생이요 예언자라 하더라도 용서의 선언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곧 하나님과 동격인 분으로 받아들이고 있기에 예수께서 죄의 용서를 선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통념에 비추어 볼 때, 바리새인 시몬, 그리고 그 식사 자리에 함께 한 사람들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 점을 헤아려야 오늘 말씀의 진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서 예수님의 진면목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 그리고 그와 동조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정결예법에 따라 의로운 사람과 죄인을 구분하고 나아가 죄인을 배척합니다.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기에 용서를 구해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든 죄인들과 엮이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과 동석함으로써 부정해진다고 여긴 것은 그들과 함께 함으로써 자신들의 안온한 삶이 파괴된다는 두려움을 나타냅니다.

그들과 동석한 예수께서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여주십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죄인을 받아들이고 그 죄를 용서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말하지 않아도 눈물로 자신의 처지를 헤아려 주실 것이라 믿고 정성을 다하는 사랑의 행위 가운데서 진심을 보여주는, 이른바 죄인을 죄인으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대 통념으로 감히 할 수 없었던 용서의 선언을 하신 뜻은 무엇이 죄를 만들어 내는지 되돌아보도록 촉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나아가 그 죄를 극복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서로 믿고 사랑하는 데서 죄의 굴레는 무력해진다는 진실을 예수께서는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께서는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법적 처리를 강화하면 범죄율이 줄어들까요? 오히려 범죄율이 늘고 수감자가 늘 뿐 아니라 사회적 비용 또한 높아진다는 것은 모든 사회가 보여주는 경험적 철칙입니다. 수사·감사·조사를 강화하면 과연 공직사회가 공정해질까요? 사람들을 움츠려들게 만들고 순치하는 데 효과가 있을 뿐입니다. 교리의 순수성을 강조하면 교회가 순결해지고 사회가 정화될까요? 오히려 독단과 폭력이 증가하고 차별과 혐오의 논리가 판을 친다는 것 역시 역사가 증명하는 경험적 철칙입니다.

믿는 구석이 있어야 사람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어떤 형편에 있든 어떤 이야기를 하든 받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삶의 용기를 지니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암만 발버둥쳐도 낙인을 안은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형편에 처해 있다고 느낄 때 사람은 절망에 빠집니다. 개인들의 직접적 대면관계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뢰를 제도화하느냐, 불신을 제도화하느냐 하는 것은 사회적 기풍을 형성하는 데 큰 차이를 초래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께서 어째서 구원자가 되시는지 그 진실을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교리가 아니라 그 삶을 보고 진실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죄인의 친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을 본받아 세상에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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