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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나아만처럼 만이라도(열왕기하 5:9-22)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8.27 00:34
▲ 「Naaman in Jordan River」 (Bible Pictures with brief descriptions by Charles Foster, published in 1897, Philadelphia) ⓒWikimediaCommons

1.

구약시대의 가장 유명한 선지자는 누구일까요? 아마 엘리야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하다고 하는 아합 왕 시절, 바알과 아세라의 추종자들 850명과 홀로 싸워 무찌른 전설의 영웅입니다. 심지어는 보통 사람들처럼 죽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들어올리셨습니다.

그런 스승님에 비해 엘리사는 조금 유명세가 떨어집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이야기들을 찬찬히 읽어보면, 예수님의 사역이 겹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사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들이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과 많이 비슷합니다. 복음서의 예수님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열왕기하 앞부분을 꼭 한 번 찬찬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2.

오늘은 엘리사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엘리사에게 조금 미안합니다만, 오늘 주인공은 엘리사가 아니라 나아만입니다.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시리아의 군대사령관입니다. 시리아는 수리아라고도 부르는데 우리에게 더 익숙한 명칭은 아람입니다. 이스라엘의 지도를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시면, 이스라엘의 아래쪽 남쪽이 에돔, 사해 건너편 동쪽이 모압, 요단강 건너편 동쪽이 암몬, 갈릴리 바다 건너편 동쪽이 아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울이었던 시절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죠. 그 다메석, 다마스커스가 바로 아람의 수도입니다. 다윗 왕에게 점령 당해서 한때 조공을 바치기도 했고, 동맹국이 되기도 하고 적이 되기도 하면서, 이스라엘과 줄곧 티격태격했던 이웃나라입니다. 나아만은 이런 아람의 군대 사령관입니다.

그 나라의 크기와 권세가 어떻든간에, 한 나라의 군사령관이었으니, 나아만이라는 사람은 뭐 하나 부러울 것 없는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큰 병에 걸린 겁니다. 나병이라고 번역된 이 병이 진짜 문둥병이냐? 불치병이냐? 아니면 흔한 피부병이었냐? 하는 것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그게 오늘 함께 고민할 이야기입니다.

3.

모든 이야기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합니다. 오늘 이야기에도 등장인물이 많습니다. 주인공인 나아만과 엘리사, 시리아의 왕과 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 출신 노예 소녀,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와 나아만 장군의 부하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세상 앞에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 신앙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시리아의 왕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하나님의 예언자가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도, 이 왕은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차원에 대한 이야기에 대해서, 놀라움이나 두려움이나 호기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어? 그럼 다녀와~.” 요즘 말로 쿨하게 보내줍니다.

은 열 달란트 금 육천 개, 옷 열 벌을 들려줍니다. 물론 과장된 금액이겠습니다만, 오늘날로 환산해보면 9000억이 넘는 액수의 예물입니다.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도 써줍니다. ‘내가 이만큼이나 엄청난 돈을 보내니까 내 부하 잘 고쳐줘~.’ 하는 겁니다.

시리아의 왕은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 세상은 철저히 인간의 세상이어서 하나님이니 섭리니 구원이니 하는 말이 귓등으로도 안 들립니다. 게다가 이 사람은 왕으로 일생을 살아서 아쉬운 것 없이 살았습니다. 자기 힘으로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부하가 앓고 있는 병이 얼마나 위중한 병인지, 그 병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그 병을 고치기 얼마나 어려운지 관심도 없고 알지도 못합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교회? 어이그, 다 웃기는 소리야.” 내심 종교를, 신비를 무시합니다. 무관심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아쉬울 것 없습니다. 아쉬울 것도 없으니 아뢸 것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상관없는 인생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이스라엘 왕입니다. 정확히 누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아합의 아들인 요람 왕이라고 추정되는데요. 이 사람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자기 앞에 펼쳐진 문제를 놓고 절대로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자기 힘으로, 인간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생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부하의 나병을 치료해달라’는 시리아 왕의 편지를 받자, 낙담하고 옷을 찢고 울부짖습니다. ‘이거 내가 할 수 없는 일인데, 인간이 할 수 없는 건데, 이거 트집 잡아서 우리 땅 공격하려는 거 아니야?’ 하나님을 떠올리지 않아요.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요.

유다 왕 히스기야를 생각해 보세요. 앗시리아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마침내 유다까지 침공합니다. 예루살렘을 포위하고는 편지를 보냅니다. “항복해라. 내가 다 멸망시키는 거 봤지?” 히스기야는 어떻게 합니까? 조용히 이 편지를 들고 하나님 앞으로 갑니다.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 앞에 편지를 펼쳐놓고 기도합니다. ‘주님,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 맡깁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도와주십시오. 알려주십시오.’ 이게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문제들 앞에서 어떻게 합니까? 우선 기도합니까? 훌륭하십니다. 일단 내 힘으로 해보고 안 되면 기도하십니까? 그 정도만 되어도 훌륭하십니다. 하다하다 안 되면 그제서야 ‘기도라도 해보자’ 그러십니까? 아니면 모든 일을 다 그르치고 나서야 땅을 치면서 ‘아이고, 기도를 안 했네’ 그러십니까? 그러면 안 됩니다. 마지막에 떠오르는 게 기도여서는 안 됩니다.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내려놓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 자체가 어떻게 되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들고 그 편지를 들고 내가 어디로 제일 먼저 가는가 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가느냐? 아니면 딴 데 찾아 가느냐...

세 번째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포로 소녀입니다. 전쟁 중에 포로로 사로잡혀 와서 노예 생활을 하는 소녀입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소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제일 먼저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까? 어떤 생각이실까? 어떤 계획이실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아만 장군이 병으로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가면 되요. 그걸 몰라요?’ 자기 처지나 환경이나 형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포로 노예 주제에 내가 무슨... 아닙니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포로고 하인이지 하나님이 그런 거 아니잖아요. 내가 믿는 하나님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데에 떳떳합니다. 당당합니다.

나아만의 부하들도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내 체면이 어떻고, 내 사회적인 지위가 어떻고... 그게 뭔 상관입니까? 그냥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더한 일이라도 시키시면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저 도박하는 셈 치고 해보자 하는 마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네 번째 사람은 엘리사의 시종 게하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시종일을 보고 있습니다. 나름 신앙인이고 종교인입니다. 교회에 발 담그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방편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내 살 궁리를 하는 겁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사례를 거절하자, 몰래 쫓아가서 자기가 챙깁니다.

하나님은 내 삶의 방편이 아닙니다. 나를 위한 수단과 방법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수단이 되고 방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일에 나를 써주시기를 바래야 합니다. 하나님을 통해서 내 이익을 얻고,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잘 되고... 그런 것을 종교라고 신앙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나도 덩달아 행복해질 수 있을 뿐입니다.

4.

마지막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나아만입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인물입니다. 위에서 말한 모든 인물을 합쳐 놓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와 많이 닮아있습니다. 내 삶의 당면한 어려운 문제 앞에서 힘들어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마저도 짜증스러울 뿐입니다. 구원의 길을 알려주셨는데도 불평불만입니다. 하나님의 구원마저도 내 생각대로 내 기대대로 되지 않는다고 화를 냅니다. ‘내가 누군데 나를 이렇게 홀대하는 거야? 내가 씻을 물이 없는 줄 알아?’

우리 삶도 똑같아요. 우리가 방법을 모를까요? 하나님이 응답하지 않으셨을까요? 아니요. 우리는 다 잘 알고 있어요. 너무나 잘 알아요. 말씀을 통해, 선포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러주셨어요. 사랑하라고, 내가 먼저 희생하라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까지도 돌려대라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보복은 하나님의 것이니 복수하려고 하지 말라고... 심지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친히 눈앞에 보여주기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아요. 몰라서가 아니라, 싫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죠.

그런데 나아만은 결국 하나님을 붙듭니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선택합니다. 진짜 신앙일까 싶기도 하고 그저 살기 위한 발버둥인가 싶어 의심도 들지만, 어쨌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붙듭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이것만으로도 칭찬받을 만합니다. 한낱 노예에 불과한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부하들이 하는 말도 경청할 줄 압니다. 이스라엘 왕처럼 자기 힘으로만 하려고도 하지 않고, 시리아 왕처럼 하나님을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귓등으로 넘겨버리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주위의 충고를 듣는 마음입니다. 권면을 듣고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 왜곡되고 어긋나는 때는 자기 생각대로 신앙생활을 할 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안 믿어서가 아니고, 잘못 믿어서가 아니라, 내 마음대로만 믿을 때입니다. 오히려 잘 믿기 때문에 문제가 됩니다. 훌륭한 신앙은 겸손과 함께해야 합니다. 훌륭함이 교만이 되어버리면 더 이상 그 믿음은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단독자로 살게 하지 않으시고, 함께 살게 하십니다. 아담 옆에 하와를 두시고 가인 옆에 아벨을 두십니다. 심지어 범죄한 가인마저도 그 이마에 표를 주어 사람들과 함께 살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홀로 믿게 하지 않으시고, 교회를 만들고 공동체를 만드십니다. 내가 만난 하나님, 네가 만난 하나님, 서로 그 경험과 은혜를 나누게 하십니다.

우리가 오늘 생명교회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인 것은, 우연히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길을 함께 가는 신앙의 동료이고, 신앙의 동지입니다. 그래서 함께 도와주고 서로를 격려해야 돼요. 힘들고 어려운 모습을 보면 위로해 주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해요. 그런가하면 한편으로는 따끔한 신앙의 질책도 해야 돼요.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더욱 말과 행동이 조심스러워야 해요. 세상 사람들이 나누는 그런 대화와 친교와는 질적으로 달라야 해요. 간단한 친교의 말과 안부의 말 속에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말씀인가? 아니면 나의 인간적인 말인가? 내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돼요. 충고와 권고의 말에는 말할 것도 없죠.

말할 때뿐만 아니라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사람이 뭐라고 나한테 이런 말을 하나’ 그런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아만이 그랬잖아요. ‘지가 하나님의 사람이면 하나님의 사람이지 나한테 이렇게 말해?’ 그런 마음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러나 그냥 사람이 아니라 신앙인이기에 다음 단계의 마음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한 사람이 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저 입을 빌어 하시는 말씀으로 알아들어야지요.

바로 그 다음 단계의 마음이 나아만을 낫게 합니다. 12절을 보면 나아만이 분을 참지 못했다고 하는데, 그 첫 마음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두 번째 마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분을 내면 안 됩니다. 화를 내면 안 됩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인간이기에 인간적인 첫 마음이 없을 수 없습니다. 다만 나아만처럼 두 번째 마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 마침내 되돌아와(15절)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만 있으면 됩니다.

5.

말씀 처음에, ‘인간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그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 고민을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선 나아만처럼만 해 봅시다.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 봅시다. 함께하는 신앙의 이웃의 충고를 들어봅시다. 내 마음에 솟아나는 첫 마음에 사로잡히지 말고, 깊은 곳에서 묵묵히 흘러가는 두 번째 마음을 따라 봅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나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의 삶이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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