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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짝사랑!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신 하나님?(출 13:17-22 롬 4:1-8 막 2:23-28)창조절 둘째 주일/교회연합주일(9월10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09.08 02:12

1. 하나님의 놀랍지만, 어쩌면 어리석은 짝사랑!

창조절 둘째주일입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하여 우리 인간은 원소의 차원에서는 우주와 지구, 혹은 식물과 동물 등 모든 피조물과 존재론적으로 동일하지만, 가치론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물론 이 가치의 다름은 위계적인 것이 아니라, 모든 창조 세계를 돌보라는 청지기 사명이라는 것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을 잘 관리하라고 위임하셨습니다. 따라서 현재 피조물이 신음하는 기후재앙의 시대에 이러한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경을 깊이 읽다 보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성경은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끈질긴 사랑의 편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놀랍게도 짝사랑입니다. 왜냐하면 늘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절하고 청지기의 사명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성부이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오신 성자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요,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이시건만,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오히려 배척합니다.

이러한 배척의 역사, 곧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역사는 오래됩니다. 그것은 저 에덴동산에서부터 지금 오늘 우리에게까지 이어집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시고자 합니다. 구약 출애굽기 말씀이 그렇습니다.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짝사랑에 응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믿으면 됩니다. 우리를 위해 유월절 어린양이 되시어 십자가 보혈로 구원해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인자(人子)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도 주인인 것을 믿으면 됩니다.

바울이 이것을 잘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려고 우리 인간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고후 5:19), 십자가 보혈로 용서하셨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 용서가 우리의 불법과 죄조차 사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불법을 용서받고 그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놀랍지만, 어쩌면 어리석은 짝사랑입니다. 먼저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2.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 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막 2:23-26)

지난주 오후 예배에 우리는 느헤미야서를 공부하며 진설병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바벨론에서 귀환한 유대 공동체가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나님께 언약을 맹세할 때 이방인과 결혼하지 않을 것이며 모세의 율법에서 언급한 성전세를 바치며 하나님의 제단에 떡을 진설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진설병은 고운 가루로 만든 누룩을 넣지 않은 빵으로 성소 안의 떡상에 올려놓는, 곧 진설하는 떡을 말합니다. 원래 뜻은 레헴 파님(לֶ֥חֶם פָּנִ֖ים), 곧 ‘얼굴 앞의 떡’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 놓는 빵(출 25:30)이라는 뜻입니다.

▲ 진설병

제사장은 매 안식일마다 떡상에 이러한 진설병을 두 줄로 6개씩 12개를 늘어놓아야 했는데(레 24:8), 이것은 이스라엘 12지파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거두게 될 노동의 결과를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이 떡이 당신 앞에 항상 있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일주일간 진설된 떡은 제사장이 먹고 다시 새롭게 떡을 올립니다.

▲ 다윗이 놉의 사제 아히멜렉의 도움을 받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밭 사이를 가다 길을 만들기 위해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추수했다고 비난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다윗 때의 일을 들어 반론하시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1장을 보면 다윗은 요나단의 도움으로 사울 왕의 살해 의지를 확인한 후, 도망자의 삶을 시작합니다. 굶주린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엘리 제사장의 증손으로 엘리의 아들인 비느하스의 손자)을 찾아가 음식과 무기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로 나중에 에돔 사람 도엑이 사울에게 밀고합니다. 사울은 아히멜렉이 다윗을 도왔다는 사실을 알고(삼상 22:9-10), 아히멜렉은 물론 제사장 84명을 죽여버립니다(삼상 22:16-19).(1)

아무튼 예수님은 다윗의 진설병 사건을 통해 자비가 제사보다 낫고, 의식과 율법의 준수보다는 도적적 의무, 곧 선한 열매 맺는 것을 권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관한 계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 자신에 관한 순종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씀을 볼까요?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8).” 그러나 창조주이시자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짝사랑은 계속됩니다.

3. 짝사랑 1: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하게 되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대열을 지어 나올 때에,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출 13:17-19)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이후,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이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가면 가깝지만, 애굽 군대가 쫓아 올 경우, 두려워하여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까 봐 출애굽의 길을 홍해의 광야 길로 돌리십니다. 세심한 짝사랑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막을 칠 때 나 이동할 때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들이 숙곳을 떠나서 광야 끝 에담에 장막을 치니,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0-22)

▲ 불기둥과 구름 기둥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일을 아니 하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도 의롭다고 하십니다. 물론 이것은 먼저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오늘 로마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이신칭의의 말씀인데, 이것은 바울 신학에서 많이 오해되는 부분입니다.

4.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율법은 유대 율법과 로마법 둘 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바울서신에 근거하여 『그리스도인의 자유』(1520)를 집필합니다. 이 글에서 루터는 바울의 자유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섬김으로서의 자유’로 정리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까지 바울의 자유에 관한 거의 유일한 해설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루터의 바울 해석은 오랫동안 바울을 반유대주의자로 오해하게 했으며 ‘섬김으로서의 자유’는 로마서 13장과 결합 되면서 바울을 국가 또는 제국에 무조건 복종할 것을 강요하는 친제국주의자라는 오해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인종 혐오를 부추기고 국가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한 인물로 오해되었습니다.

게다가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하느님께 의롭다고 인정받는다는 이신칭의 교리는 기독교 신앙을 철저히 정치적 실천을 통한 사회정의 구현과는 관계가 없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바울의 자유 개념을 사회·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데 큰 장애가 되었고, 루돌프 불트만의 성서의 실존주의적 해석에까지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 등장하고, 1970년대에 남미에서 해방신학이, 1990년대에 북미에서 사회·정치적 성서해석이 등장하면서 바울 해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됩니다. 특히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은 유대교 역시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은혜의 종교이며,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유대교가 아니라, 이방인이 교회에 들어오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할례, 음식법, 절기 준수’와 같은 몇 가지 규정이었음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반유대주의자에서 신실한 유대교인이라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으며, 한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존을 위해 노력했던 문화적 포용주의자라는 정체성을 획득했습니다.

이후, 남미의 해방신학은 미 제국주의에 의해 정치·경제적 파탄상태에 빠진 남미의 정치적 현실을 바울서신을 재해석하면서 분석합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을 북미의 사회·정치적 해석이 아니라, 로마제국의 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바울서신을 재해석하면서, 바울은 친제국주의자가 아니라, 제국의 통치에 그리스도의 통치로 맞선 인물인 것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사회·정치적 관점으로 재구성된 바울은, 로마제국에 의해 정치적 반란범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제국 한가운데서 그에 맞선 대안 공동체를 건설하려 했던 운동가였습니다. 최근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 슬로보예 지젝 등 철학자들이 바울을 재구성하는 맥락이 바로 이러한 부분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연구 성과로, 바울의 자유 개념 역시 로마제국과의 관계에서 사회·정치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 가운데 주목할 글이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인 장양미 박사의 「바울의 자유 개념에 대한 정치신학적 고찰: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전서를 중심으로」(2020)입니다. 이 논문에서 장양미 박사는 바울의 자유 개념을 크게 네 개의 차원으로 재구성합니다. ① ‘법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연대를 향한 자유’로의 변화, ② ‘힘을 지향하는 자유’에서 ‘힘을 지양하는 자유’로의 변화, ③ 공동체의 자유와 개인의 자유의 관계, ④ 자유와 사랑의 관계입니다. 첫 번째 자유에 관한 장양미 박사의 말입니다. 

“첫째, 바울의 자유 개념은 ‘법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연대를 향한 자유’로 나아간다. 바울은 묵시주의적 지평에서 로마제국과 하느님 나라의 관계를 불의한 옛 세계와 정의로운 새 세계의 대립으로 이해했고, 옛 세계 안에서 로마법을 비롯하여 그 어떤 법도 결국 불의로 귀결되는 현실을 직시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신칭의는 제국의 불의한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통해 세계에 정의가 실현된다는 정치적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바울이 주장한 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제국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법 일체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여기서 할례로 대표되는 유대법은 로마법의 하위법으로 기능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로마법이 분할통치를 통해 피지배 민족들의 연대와 저항을 차단했다면, 그리스도의 공동체 안에서 유대인과 비유대인을 분리하는 할례 규정은 그러한 로마의 분할통치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다. 이처럼 바울은 제국의 억압과 착취의 질서에 봉사하는 로마법과 유대법 양자로부터 해방을 선언함으로써, 억눌리고 착취당하던 민족들이 자유롭게 연대할 수 있는 길을 열고, 교회를 카이사르의 제국에 맞서 하느님 나라를 선취하는 공동체로 건설하려 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소아시아(튀르키에) 북쪽의 갈리아인과 동쪽 변방인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이 제국에 줄기차게 저항한 역사적 사실로 보아, 바울의 1차 선교 여행은 두 민족(갈리아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드는 위험한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바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은 그리스인(4차 로마 압송으로 치면 로마인)까지 포섭하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 로마 제국의 형성부터 분할까지의 지도

사실 로마가 제국을 통치하는 방식은 ‘분할하여 통치(divide et impera)’하는 것입니다. 피지배민을 분할하고 차등적으로 대우함으로 분열과 경쟁을 조장하여 충성심을 확보하는 통치 방식으로 ‘분열 통치’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정치 지도자들이 젠더 갈등을 부추기고, 세대 차이를 차별로 유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차별을 없애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주장하며 이방인과 그리스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는 피지배 민족들을 지배할 때, 즉각적인 저항을 불러오는 노골적인 방식이 아니라, 피지배 민족의 법과 관습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지배합니다. 다만 그것이 로마법이라는 합법적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죠? 결국 유대교는 거기에 굴복하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이를 거부합니다. 황제 숭배라는 로마법을 거부한 것입니다.

로마의 입장에서 보면, 바울은 로마법과 황제를 거슬러 제국에 가장 골칫거리인 두 민족을 예수 십자가 아래서 하나의 공동체로 모은 것입니다. 이것이 ‘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여기서 법은 로마법과 그 하위법으로 기능하는 유대법입니다. 루터와 지금까지의 신학은 이 법을 단지 유대교의 율법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에서 율법이 본래 선하다고 하더라도 메시아 예수를 죽인 로마법을 떠받친다면 율법, 곧 유대법도 불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장양미 박사는 “예수의 죽음도 유대법과 로마법이 공모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그리스인, 농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하나를 이루는 ‘연대를 향한 자유’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로마서 말씀을 볼까요?

4. 짝사랑 2: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도 않는 자를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1-3)

이 말씀은 기독교 구원론 교리의 핵심인 ‘이신칭의’(以信稱義), 혹은 ‘이신득의’(以信得義)를 보여줍니다. 두 말이 혼용되어 쓰이지만, 의미는 약간 다릅니다. 먼저 이신칭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이고, 이신득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함을 얻는다’입니다. 둘 다 믿음이 강조되지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과 의롭다고 함을 얻는 것으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믿음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면, 바울서신의 중심주제가 구약의 율법 사상과 로마의 로마법과 대비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의롭게 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배웠습니다. 영어로 나타내면 둘 다 “Justification by faith(믿음에 의하여 의롭게 됨)”인데, 우리 말은 번역을 두 가지로 했습니다. 먼저 ‘이신칭의’ 즉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고 칭하여진다”라는 말은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을 하나님 편에서 하는 말이고, ‘이신득의’ 즉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고 함을 얻는다”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의롭게 하시는 것을 인간 편에서 하는 말입니다. 옛날에는 ‘이신득의’라는 말을 많이 썼으나, 최근에는 ‘이신칭의’를 많이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그다음 말씀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4-8)

일하는 자에게 그 삯은 당연합니다. 보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에게 삯을 주거나 보수를 주는 것은 상식에 어긋납니다. 더 나아가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고 하신다는 하나님의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여기서 바울은 다윗의 고백을 들려줍니다. 본문에 나오는 말씀은 시편 32편으로 다윗의 참회시(懺悔詩)입니다.

▲ 나단의 책망과 다윗의 회개

시편에는 참회시가 7편 있는데(6, 32, 38, 51, 102, 130, 143편), 이 가운데, 오늘 본문인 32편과 더불어 51편이 밧세바 사건과 관련된 다윗의 대표적인 참회 시편입니다. 먼저 시편 51편은 다윗이 밧세바 사건을 일으키고 난 후에, 처음에는 자신이 그렇게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와서 양과 소가 심히 많은 부자와 애완용으로 어린 암양 한 마리를 키우는 가난한 사람 등,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도, 다윗은 그것이 자기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나쁜 사람이 바로 다윗이라는 나단의 호통에 깊이 참회하며 지은 시가 51편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나서 오래 지나지 않아서 지은 시입니다.

반면 오늘 본문 32편은 고통의 과정을 모두 다 겪고서 용서함을 받은 후에 지은 시입니다. 용서를 받은 후에 지난 삶을 돌아보니, 용서를 받지 못했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편은 훨씬 더 뒤에 지어진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의 허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그러지면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얼마나 깊게 병드는지를 잘 알았습니다. 반대로 죄를 용서받으면 얼마나 기쁜지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죄를 용서받으려면 허물을 다 털어놓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로마서 말씀은 일하지 않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가, 자신의 허물과 죄를 다 털어놓고 용서를 구했을 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핵심입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바로 이 회개와 참회가 빠진 믿음의 의를 설교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가 불의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하며 구약의 율법만 설명했지, 당대 로마법의 불의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습니다. 거기서 멈춘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을 다시 읽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교회연합주일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도 사랑하십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그의 모든 죄와 허물을 고백하면 그가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하신다고 합니다. 얼마나 위대한, 아니 어쩌면 어리석은 짝사랑인가요!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에서 율법은 유대교 율법뿐만 아니라, 로마법, 곧 로마 황제, 제국 로마의 힘과 억압적인 평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참 평화와 법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과 충성을 통해 세계에 정의가 실현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교회들이 깨어나 세상의 불의한 법에 저항하고 함께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연대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할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더 새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속히 이 땅에 임할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이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아비아달은 사독과 함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됩니다. 이후 아비아달은 솔로몬이 왕이 되었을 때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쫓겨납니다. 왜냐하면 아비아달은 다윗의 다른 아들인 아도니아를 왕으로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이후 사독의 후손들이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됩니다. 이들은 바빌론 포로 귀환 이후 제2 예루살렘 성전의 일을 맡게 되는데, 사독 제사장의 후손들로 사두개파로 불리게 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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