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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물으시는 하나님어찌하여(여호수아 7:1-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9.10 02:26
▲ Gustave Dore, 「Joshua Burns the Town of Ai」 (1866, La Grande Bible de Tours) ⓒWikipedia

1.

어떤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그만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얼어나 보니 커다란 돌부리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길에 왜 이런 돌부리가 있어 나를 넘어지게 했는가? 화가 머리까지 치솟았습니다. 더 가다 보니 더 커다란 담이 나타나 길이 막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넘어가기에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왜 내가 가는 길에는 돌부리가 있고 담이 막혀 있고 온통 내가 가는 길에는 걸림돌뿐인가?’ 자신의 길에서 원망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돌아서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길을 가다가 이 사람도 커다란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불쾌했습니다. 그러나 길을 계속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앞에 커다란 담이 나타나 길이 막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합니다. 조금 전에 자신을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생각해내고 돌아와서 그 돌을 캐내어 디딤돌을 삼고 막힌 담을 넘어갔다는 이야기입니다.

누군가가 지어낸 이야기이겠지만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똑같은 상황을 놓고도 어떤 사람은 걸림돌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디딤돌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긍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정적으로 접근하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선택한 마음이 우리 삶의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인생의 길은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고난이 닥쳐오면 마음의 심령이 상하게 되고 때로는 이성과 판단을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 때는 내 문제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시야가 좁아집니다. 삶을 선택하는 선택의 폭도 좁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유가 사라지고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닥쳐올 때 어떤 태도를 가지는가가 우리의 삶을 매우 다르게 만듭니다.

2.

성경을 읽어 보면 고난 한가운데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습니다. ‘어찌하여?’, ‘어느 때까지입니까?’라고 하는 탄식의 소리입니다. 히브리어 ‘라마’와 ‘마두아’라는 의문사입니다. ‘라마’, ‘마두아’라는 의문사는 성경 전체에 산재해 있습니다. 구약성서에만 ‘라마’라는 의문사가 178번 나오고, ‘마두아’라는 의문사가 72번 나온다고 합니다. 특히 시편에 ‘어찌하여’라는 말이 많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시편 22편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어찌하여! 내가 왜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내가 어찌하여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합니까?’ 시인은 고난의 한가운데서 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 위에서 바로 이 시편 22편의 말씀을 되뇌고 있었다고 전합니다.

베스터만이라는 성서학자가 있는데, 그는 ‘라마’라는 의문사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고통 가운데서 기도하는 사람은 현실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신 것 같은 좌절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닥쳐온 그 고난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라마’라는 물음은 바로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길을 찾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물음 속에는 올바른 길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등을 돌렸다는 처절한 경험이 전제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신앙인은 처절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을 묻는다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탄식하며 묻는 이 물음 속에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 속에서 미래의 일, 미래의 목적을 묻는 데로 향해 있는 것입니다.

3.

여호수아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믿음을 굳게 하고 모든 백성들의 결단을 받아 낸 다음, 요단강을 건너갑니다. 여호수아의 길에 있어서 눈앞에 보이는 요단강이나 여리고성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자신 안에 있는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믿음은 앞에 있는 걸림돌들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놀라운 기적을 불러들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항상 걸림돌들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고 한숨으로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것을 간파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온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넘지 못했던 것은 백성들 안에 있는 믿음의 상실 그것으로 인해 오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두려움이 작은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게 발목을 붙잡았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앞에는 어떤 문제들이 도사리고 있습니까? 우리를 두렵게 하고 우리를 지치게 하고 우리를 낙심하게 하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그 대상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바라보기 전에 나 자신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 믿음이 있나 살피시기 바랍니다. 내 자신 안에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하려는 확고한 믿음이 있나 살피시기 바랍니다.

여호수아는 이런 믿음으로 요단강을 건넜고 철벽같이 버티고 있는 여리고성을 무너뜨렸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보았습니다. 내심 자신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했듯이 여호수아는 그런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앞으로 나아갈 때, 그들 앞에 아이성이 나타납니다. 아이성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아이 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보잘것 없다’고 합니다. 수고롭게 모두 공격하지 말고 2-3 천명만 보내어 공략해도 아이 성을 공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 튼튼한 여리고성도 간단히 무너뜨렸는데, 아이성 쯤이야~’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힘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녹아 물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찢고 이스라엘 장로들과 함께 머리에 티끌을 뒤집어쓰고 저물도록 하나님의 궤 앞에 엎드려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 슬픕니다. 어찌하여 이 백성을 인도하여 요단을 건너게 하시고 우리를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차라리 강을 건너지 않았다면 좋았을 뻔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를 이런 지경이 두고 계십니까?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신 말씀도 여호수아가 하나님께 탄식하며 말한 것과 같은 말입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엎드려 있느냐?’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낙심하고 슬퍼하고 절망하고 엎드려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어찌하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똑같이 ‘어찌하여!’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어찌하여 나는 원수에게 짓눌려 슬픔에 잠겨 있어야만 합니까?(시43:2)” 그래서 하나님은 그 말을 그대로 사용하여 ‘어찌하여!’라고 대답하시는 것입니다. ‘어찌하여 엎드려 있느냐? 어찌하여 낙심하고 있느냐?’ “내 영혼아, 어찌하여 그렇게도 낙심하며, 어찌하여 그렇게도 괴로워하느냐? 하나님을 기다려라(시43:5).” 우리는 문제를 하나님께로 돌리지만, 하나님은 거꾸로 문제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말을 그대로 우리에게 돌려주십니다. 밖을 향하고 외부를 향하고, 하나님을 향하고 이웃을 향하고, ‘너’에게 책임을 돌리고, 적을 만드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네 자신을 먼저 돌아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이성은 여리고성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며 겸손하고 순종했던 여호수아가 보잘것없는 아이성을 바라보고 자신만만해졌습니다. 여호수아만 그랬을까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그랬습니다. 점점 자기 힘을 의지하고 교만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 정도는 괜찮을 것이라고 자기 멋대로 가감합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승승장구하며 가나안에 가까이 가는 것 같았지만, 실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길을 잘 가던 사람이 돌부리에 왜 걸렸을까요? 돌부리가 마침 거기에 있어서 걸려 넘어진 것일 뿐일까요? 아닙니다. 길을 잘 가고 있어서 그는 조심히 살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만큼 잘 걸어왔으니 앞으로도 잘 걸어갈 것이라고 마음이 해이해졌던 것입니다. ‘나는 참 잘 것는다’고 스스로 교만했던 것입니다. 앞길을 살펴 조심하고 주의하던 마음이 흐트러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에는 잘 살펴 피하곤 했던 그런 돌부리임에도 이번에는 덜컥 걸려버렸던 것입니다. 돌부리가 있어 재수없이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만한 사람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성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 ‘어찌하여!’ 하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는 ‘어찌하여!’하고 대답하십니다. ‘왜 거기 돌부리를 놓으셨냐?’고 하나님께 항변하는 이스라엘에게, ‘왜 그 돌부리에 걸렸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왜 걸렸는지 스스로를 살피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아간의 범죄가 드러납니다.

아간의 범죄는 구체적인 한 인간이 저지른 우발적인 범죄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다 잘 했는데, 아간 한 사람이 실수해서, 아간 하나 때문에 하나님이 꼬장부리신게 아닙니다. 성서의 역사는 단순히 옛날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랬다더라~’ 하는 에피소드가 아닙니다. 역사의 구체성 속에서 우리 인간의 보편성을 증거하고 폭로하는 이야기들입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 이야기가 아니라, 이스라엘 모두가 하나님 앞에 범죄한 상태라는 것을 폭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외부의 적만 바라보았습니다. 여리고성을 바라보고 요단강을 바라보고 가나안사람들을 바라봤습니다. 어떻게 저들을 이길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내부에 있었던 것을 몰랐습니다. 지금껏 광야를 지나오면서 하나님께서 가르치셨던 것이, 내 앞에 닥친 외부의 적을 이기기 위해 어떻게 외적 힘을 기를까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어떻게 내 안을 강하게 하고 거룩하게 할까 였다는 것을 잊었습니다.

5.

그러면 정말로 우리는 어찌하여야 할까요? 하나님 앞에 아무런 원망도 불평도 없이 그저 감사하고 즐거워할 수만 있을까요?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하고 모자란데 말이죠. 주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만 같습니다. 

하나님의 ‘어찌하여’는 우리의 ‘어찌하여’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가 ‘어찌하여’ 하고 아뢸 때 응답하시는 ‘어찌하여’입니다. 우리가 ‘어찌하여’에 머물러 있지 않도록,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입니다. 그 음성을 듣기 위해 우리는 먼저 주님께 아뢰어야 합니다. 그것이 출발이 되어야 합니다. 투정일 수도 있고, 원망일 수도 있고, 낙담일 수도 있고, 반항일 수도 있겠으나, ‘어찌하여!’ 하고 주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고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아간의 범죄를 통해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라, 아간의 범죄를 통해 이스라엘을 고치시고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 구원을 소망하면서 내 삶의 걸림돌들을 모두 주님 앞에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어찌하여’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나의 ‘주님, 어찌하여!’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너는 어찌하여!’를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어찌하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 앞에 있는 걸림돌을 빼내어 디딤돌을 만들어야 합니다.

“어찌하여 그러고 있느냐? 어찌하여 슬퍼하고 있느냐? 어찌하여 낙망하고 있느냐? 어찌하여 내 속에서 낙망하고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하나님을 바라보라(시42).” 시편의 시인이 들었던 이 하나님의 음성을 오늘 우리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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