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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아주 똑같지는 않게더 이상 부끄럽지 않습니다(창세기2:18-25; 마가복음서10:1-10)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09.17 02:09
▲ Albrecht Durer, 「Adam and Eve in the Garden of Eden」 (15세기) ⓒHulton Archive/Getty Images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창세기 2:23)

1.

창세기에는 두 가지의 인간 창조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의 인간 창조는 사제 문서, 제사장 문서의 자료입니다. 제사장들 사이에서 보존되어 왔던 인간 창조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문서들을 남겼습니다. 첫날에는 어떻고 둘째 날은 어떻고 빛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 안에 생명체를 만들고 사람을 만듭니다. 모든 것을 마치고 안식하십니다. 그렇게 태초의 일주일이 진행됩니다.

바벨론이라는 대제국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섭리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모르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그 정확한 계획에 따라 실은 지금도 그 구원의 역사가 흘러가고 있다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질서정연한 하나님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는 솔로몬 궁정에서 활동한 역사가들이 편집한 창조 이야기입니다. 이 역사가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야훼’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성서학자들은 이들을 야휘스트라고 부릅니다. 이들이 기록한 창조 이야기는 논리, 질서, 순서, 규칙 이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아름다운 시절, 그 기쁨의 고백들입니다. 그와 동시에 왜 우리는 그 기쁨을 실제로 누리지 못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입니다. 그 고백과 성찰을 한편의 아름다운 드라마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짝을 만들어 주시는 이야기입니다. 주로 결혼식 주례 말씀에서 자주 사용되지요. 하지만 말씀을 곰곰이 상고해 보면, 이 말씀이 단순히 남녀 사이의 부부관계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지으시고는 생명동산으로 이끌어 가서 거기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가만 보니, 이 아담의 삶이 즐거워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는 맛과 흥이 없는 것입니다. 에덴의 경치가 그렇게 아름답고, 먹을거리가 지천에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좋아 보이는데, 실제로 아담은 그런 것 같지가 않아 보입니다.

“이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먼저 하나님은 흙으로 온갖 들의 짐승과 하늘의 새를 지으셔서 아담에게 데려 오셨습니다. 그랬더니 아담이 관심을 보이면서 그 생물 하나하나마다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아담은 혼자 있을 때 보다는 훨씬 좋았습니다. 눈앞에서 동물들이 왔다 갔다 하지, 새들이 날아와 어깨 위에 앉지, 짐승들의 새끼들이 재롱을 부리고 하니 지내는 것이 조금은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담은 여전히 허전했습니다.친구들이 생겼는데도 아담은 썩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많은 생명들이 함께 있지만 아담에게는 마땅히 마음이 통해서 가슴이 뻥 뚫리는 상대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날 아담이 아주 깊은 잠을 자고 눈을 뜨니, 찬란한 아침 햇살 사이로 주님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서 아담 앞에 데려 오셨습니다. 이 생명체를 보는 순간, 아담의 눈이 번쩍 뜨이고, 자신도 모르게 손뼉을 치며 환희의 탄성을 내지르게 되었습니다. 생김새도 나를 닮았고, 말도 통하고, 척척 손발이 맞고, 아담 입에서 탄성이 터졌습니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불러야겠다.”

창세기 1장에서는 하나님이 자신이 지은 세계를 보시며 탄성을 지르셨습니다. 오늘 창세기 2장에서는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여자, 곧 이웃을 보고 사람이 사람에게 탄성을 지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표현했다면, 창세기 2장은 사람의 관점입니다. 사람은 사람에게 어떤 존재인가? “내가 보기에 참 좋구나. 내 뼈로구나, 내 살이로구나!” 그러나 그 맥락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꼭 닮은 존재를 만드시고 기뻐하십니다. 사람이 자신과 꼭 닮은 존재를 만나 기뻐합니다.

2.

두 이야기를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꼭 닮았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은 논리적으로 그 질서를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질서가 우리 안에 그대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창세기 2장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실은 그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모습과 똑같더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는 말씀으로의 창조도 아니고, 무에서의 창조도 아닙니다. 똑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똑같은 존재요, 심지어는 하나님과 우리도 똑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요즘 흔히 하는 말이 이것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자. 저 사람은 나랑 다른 존재다. 나랑 똑같을 수 없다. 저 사람은 본래 저렇다는 것을 인정하자.’ 서로 간에 갈등이 있을 때, 다툼이 있을 때, 먼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시작하자는 것이죠. 참 좋은 깨달음입니다. 그런 깨달음이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런 깨달음이 진정한 깨달음이 되려면 더 근본적인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 전에, 서로 똑같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나랑 다르다’ 하고 인정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그것은 ‘저 사람도 나랑 똑같은 존재다’ 하는 성찰이 없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나랑 똑같이 감정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살아온 삶의 굴곡이 있고, 아픔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소망이 있고, 삶의 간절함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랑 똑같이 강한 의지를 가졌고, 동시에 나랑 똑같이 연약한 감성을 지녔습니다. 나랑 똑같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나랑 똑같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나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달란트가 풍성한 것처럼, 그 사람도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달란트를 풍성히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 주신 은혜에도 불구하고 내가 부족하고 못난 것처럼, 그 사람도 그렇게 부족하고 못난 것입니다. 내가 부족하고 못나지만, 그래도 완전하고 잘난 사람 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그 사람도 똑같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같으나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보면서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 똑같은 존재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높고 낮음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고, 잘나고 못난 것도 없이 똑같은 피조물이다. 똑같이 귀하고 똑같이 사랑받는 피조물이다. 우리끼리만 똑같은 것이 아니라, 황공하게도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다. 그런 내가, 그런 우리가,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존재를 닮아서, 무한한 모습으로 창발하고 삶을 뻗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눈에 서로 다르게 보이는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실은 하나님의 한 부분을 닮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귀한 피조물의 삶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기는 했으나, 우리가 하나님은 아니어서, 하나님의 모든 부분을 내 삶 속에서 실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담당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삶은 다른 이가 살아가면서 나를 보듬어주고 감싸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처럼 나도 내가 담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삶으로 다른 이들의 삶을 지탱해주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근본이고 구원의 실체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가 어떻고 부활이 어떻고 우리는 많은 말을 합니다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 안에 그려진 원대한 하나됨의 이상을 실제로 살아가도록 우리를 이끄는 하나님의 가르침의 방법의 하나일 뿐입니다. 참으로 구원은 하나님과 똑같은 우리가 하나님과 똑같은 모든 생명들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3.

함께 읽은 마가복음서 말씀은 하나님이 맺어 주신 부부는 어느 경우든 절대로 이혼할 수 없다는 선언입니다. 이 선언을 오늘의 잣대로 해석해서 보수적인 율법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혼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냐 잘못이냐? 하는 그런 규정의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 시대에 이 말씀은 아주 혁명적인 인권선언이었습니다.

당시에는 모세의 율법을 근거로 남자들이 공식적인 이혼장만 작성해 버리면 여자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쫓겨나는 사회였습니다. 사람 같지도 않은 사람과 이혼했으니 더 좋은 것 아니냐? 하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오늘날의 이야기입니다. 당시에는 이혼하는 순간 여성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립니다. 빌어먹거나 거리의 여인이 되는 방법 말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근거로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품어 안아야 할 생명을 율법, 제도, 법칙 그런 따위의 알량한 구실 가지고 마음대로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부관계, 한걸음 더 나아가 너와 나의 공동체 관계는 하나님이 정하시고 복 주신 관계이기에 신성하고 아름답게 반드시 유지하고 지켜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의 중심에 있는 정신이 바로 이것입니다. 율법에 하나님께 제사를 어떻게 지내고, 인간들 사이에 어떻게 벌주고 어떻게 다스리는지 그런 것들이 율법으로 적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참뜻은 그런 것 아닙니다. 율법의 참뜻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을 하나님이 돌보듯이 그렇게 서로서로 돌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구약의 율법이 있습니다. 신명기 22장에 나오는 율법입니다. 어떤 불한당 같은 사람이 처녀를 욕보입니다. 그러면 남자를 붙잡아서 처녀의 집안에 배상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여자는 그의 아내가 되고, 그는 평생 동안 그 여자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율법입니까? 자기를 억지로 욕보인 사람과 결혼하고 평생 이혼도 못한다니 말이 됩니까? 하나님은 왜 여자에게 이런 엄청난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성경을 출판한 사람들이 원래 성경에는 없는 소제목을 달아놓았습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이 단락의 주제는 이렇습니다’ 하고 소개해 놓는 것인데요, 신명기 22장 말머리에 ‘순결에 관한 법’이라고 딱 써놨습니다. 완전히 잘못 적은 것이지요. 이 말씀은 순결이야기가 아니라, 정의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정의로 약자를 보호하는 이야기입니다. 폭행당한 여성을 보호하고 구제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그런 스캔들에 휘말린 여성은 앞으로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잘못한 것 하나 없는 피해자인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삶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폭력을 저지른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얼굴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오늘날 같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법률상의 아내가 되지만, 아내는 자기 자신의 장막이 있고 그 영역에서 독자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그 모든 삶을 가해자가 책임지는 것일 뿐입니다. 평생 가해자를 만나지 않도록 보호받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속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신명기 율법이 가르치고 있는 정의라는 맥락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책임져라. 끝까지 품어라. 너의 가족이다. 결코 버릴 수 없고 외면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자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외면할 수 없다. 책임져야 한다. 너와 나는 다르다고,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는 내 삶을 살겠다고 눈 돌리지 말아라. 하나 되어 함께 살아야 한다!’

4.

오늘 창세기의 이야기 속에 이 모든 권고가 들어있습니다. 이 세계 모든 생명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벗으로 세상의 모든 생물체를 지어 보내셨습니다. 근본적으로 지구의 모든 생명들은 우리의 삶의 수단이 아니라 가족들입니다.

아담은 이 생명들에게 이름을 붙이는 일을 합니다. 이름을 붙이는 행위는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체와 깊은 교감을 하는 사귐 행위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생명들과 사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노동입니다. 어떤 노동이든, 주방에서 음식을 하든, 직장에서 일을 하든, 닭을 키우고 소를 키우든, 책을 보며 연구를 하든, 운전을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모든 일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만나고, 그 이름을 부르며 친교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 창조해 주신 또 다른 피조물들과 만나는 것, 그것이 노동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상을 지으시고, 흙으로부터 생명들을 지으셨다면, 인간은 이 생명들을 생기 있게 가꾸고 보전하는 일로써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 일이 바로 이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이름을 불러주고, 그 의미와 가치를 주는 노동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과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사람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물들은 인간과 같은 존재는 아닙니다. 인도의 어느 종교는 ‘만물동근’(萬物同根)이라고 말합니다. 거시적인 눈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도 맞습니다. 모든 생명이 한 뿌리, 같은 뿌리인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러나 원숭이와 사람의 생명은 차원이 다릅니다. 소와 사람이 나란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 안에서 나온 특수 존재, 하나님과 그 모습과 형상이 닮은 각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서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었다’ 그렇게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사람을 낳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시인은 이 생명계 안에서 생명들의 위계와 인간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노래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이렇게 까지 생각하여 주시며 돌보아 주십니까? 주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그에게 존귀하고 영화로운 왕관을 씌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만물, 온갖 집짐승과 들짐승까지도, 하늘을 나는 새들과 바다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시편 8편의 말씀입니다.

아담이 보고 놀란 그 사람이 누구입니까? 우리 인간이 하나님 내부에서 나온 존재이듯이, 하와는 남자의 내부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아담 안에서부터, 아담을 닮은 모습으로, 그러나 아담과는 다른 성정을 가진 돕는 짝을 지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사람에게 경탄하게 되었습니다. 남녀문제만이 아니지요. 사람 사이, 곧 공동체의 평화 문제입니다. 너는 하나님이 내게 이끌어 온 선물입니다. 그것도 내 내부에서부터 만들어서 말입니다. 때문에 너는 ‘나의 너’입니다. 너는 나의 일부요, 나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나와는 개성도 성격도 취향도 다른 너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서로에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는 것이며 토론과 대화가 되는 것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짝으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 내 주장을 가정에서, 교회에서 기어이 관철시키려 할 때 그것은 폭력이고, 독재이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혼돈으로 되돌리는 악이 됩니다.

여기에 공동체의 신비가 있습니다. 우리는 남이 아닙니다. 모두가 나의 일부입니다. 그럼에도 너는, 심지어 한 몸이라는 아내도 전혀 다른 인격체입니다. 우리는 다르지만 그 다름을 가지고 부부로, 교우로, 한 공동체로 삽니다. 서로 다름을 가지고 공존할 뿐 더러 상생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관계이고 아름다운 인간 공동체입니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은 같은 사람에게서 경탄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애완견이나 동물에게 정을 줍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근본에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에서 떠나 살기 때문은 아닐까요? 아내를 볼 때, 가족을 볼 때, 이웃을 볼 때, ‘내가 보기에 좋구나! 내 살 내 뼈로구나!’ 하는 감격을 다시 훈련하고 회복해야 합니다. 또 그런 탄성이 나오기 까지 서로에게 경이로운 존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도 있지요? 아름답다 뿐입니까? 너는 나에게 한없이 경이로운 존재입니다.

5.

오늘 주일은 총회가 정한 남신도 주일입니다. 최근의 역사 속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가 세계를 주름잡아 왔습니다. 그런데 이 남성중심의 정치, 사회가 우리 사회와 문화를 건강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병들게 해왔습니다. 모든 현상과 원인을 정확하게 진단하기는 어렵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나와 너를 구분하고, 구별 짓고, 담쌓고, 틀 안에 넣어버리고, 그렇게 규정한 데 있습니다.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나의 벌거벗은 모습이 아닙니다. 그럴듯하지 못한 나의 외관이 아닙니다. 나를 진정으로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고개를 뻣뻣이 들고 고결한 척하지만, 실상 그 껍데기 안에 감추어진 불쌍한 영혼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감싸주지 못하고, 밀어내고 부정하고 외면하면서, 하나 되지 못하는, 그래서 기뻐하지 못하는 나의 실체입니다.

오늘 남신도주일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 남신도들의 신앙의 결단과 각오가 하나됨의 결단, 하나됨의 각오이기를 원합니다. 함께 살라고 우리에게 베푸신 우리 이웃들을 품어 안는 따뜻한 가슴이 되기를 원하는 각오이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든 생명 교우들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이웃 앞에 더 이상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고 떳떳한 모습으로 새롭게 창조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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