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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민촌문학과 민중신학의 만남(히브리서 10:32-39)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09.27 01:14

히브리서는 신약성서 가운데서 최고 수준의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문제의식과 논리 전개 방식에서도 일관성과 집중도가 매우 높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편지라는 표제가 붙어 있고 그 내용상 히브리 성서, 곧 구약성서를 촘촘히 인용하며 그 관념을 전제하고 있기에 언뜻 보기에 유대교적 색채가 강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유대교의 한 측면, 곧 제사종교로서 유대교의 관념을 바탕으로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해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온전한 화해를 이룬 대제사장으로 이해하고 있는 점이 두드러집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면서 동시에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대교적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이해하는 것이지만, 동시에 유대교를 뛰어넘는 이해방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희생제물이자 동시에 자신을 바친 온전한 제사장이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과거 유대교적 관습이나 교리에 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대 사람들을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제사 관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의 의미를 조명하면서도 사실상 그 제사 관념을 철폐하고, 전혀 새로운 섬김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0장 전반부에 그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습니다. “주님은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 주님은 번제와 속죄제를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 그래서 내가 말하였습니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나는 주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10:5~7) “그리스도께서는 두 번째 것을 세우시려고, 첫 번째 것을 폐하셨습니다.”(10:9)

제사, 곧 예배의 의미를 삶의 차원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곧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과의 소통과 화해, 인간들 사이에서의 소통과 화해를 핵심으로 하는 제사, 곧 예배의 진정한 뜻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전통적 개념에 충실하면서도 그 의미를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데 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민촌’(民村)의 문학 정신을 새기며 지역사회에서 뜻을 모은 이들과 한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그 정신에 비추어 볼 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것입니다.

히브리서가 제사의 의미를 이와 같이 역설한 것은 제사, 곧 예배에 관한 교리적 해명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황을 헤아리며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히브리서는 로마에서 유대인을 쫓아내라는 클라우디스 황제의 칙령(49년)과 로마 대화재시(64년) 희생양으로 박해를 받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을 유념하는 가운데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일러주는 것입니다.

본문말씀은 그 격려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빛을 받은 뒤에, 고난의 싸움을 많이 견디어 낸 그 처음 시절을 되새기십시오. 여러분은 때로는 모욕과 환난을 당하여,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고, 그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친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감옥에 갇힌 사람들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고, 또한 자기 소유를 빼앗기는 일이 있어도, 그보다 더 좋고 더 영구한 재산이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런 일을 기쁘게 당하였습니다.”(10:32~35)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냈는지 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행하는 공동체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직접 고난을 겪은 사람과 그 고난에 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직접 고난을 겪은 당사자는 물론 이들과 연대하는 사람들의 고통 또한 가볍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빼앗기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그리스도인들은 반제국·반국가 세력으로 낙인찍혔을 뿐 아니라 무신론자들로 여겨져 박해를 받았습니다. 낙인찍힌 당사자들과 연대하는 행위마저도 당국은 철저하게 금했습니다.

본문말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을 견뎌낸 것을 격려하며 좌절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여러분의 확신을 버리지 마십시오. 그 확신에는 큰 상이 붙어 있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서, 그 약속해 주신 것을 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제 ‘아주 조금만 있으면, 오실 분이 오실 것이요, 지체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그가 뒤로 물러서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10:35~39)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지금 고통을 겪고 있지만 머지않아 좋은 날이 올 테니 인내하며 그때를 맞이하라.’ 여기서 인내는 그저 수동적으로 참고 견디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그 뜻을 실현하는 적극적 태도를 뜻합니다. 마침내 실현될 하나님의 뜻에 대한 믿음이요,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삶에의 용기를 뜻합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예언자 하박국의 말씀(2:3~4)은 그 진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이라는 고백은 그 결의를 다시 확인합니다.

히브리서의 이 결의는 당대 사회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역할에 대한 뚜렷한 자각을 기반으로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고통을 이겨내고 또 고통을 겪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행위를 칭송하고 있을 뿐 아니라 히브리서 곳곳에서 선을 행하고 서로 나누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히 13:1, 16). 그것이야말로 산 제사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은 당대 사회가 그와는 상반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통치자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사회, 부자들이 남의 것을 빼앗는 사회, 힘있는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마음대로 부려먹는 사회 안에서 그 불의를 배척하고 정의를 이루고 형제애를 구현하는 삶을 산 제사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의한 세상을 극복하고 마침내 새로운 세계를 이루게 되리라는 믿음을 히브리서는 역설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 11:1). 본문말씀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은 그 믿음을 역설합니다.

▲ 서재에서 집필 중인 민촌 이기영 선생

오늘 우리는 ‘민촌’(民村) 이기영 선생 39주기를 맞아 그 뜻을 기리는 지역사회의 자매형제들과 더불어 예배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 바로 입구에는 <민촌 이기영의 ‘고향’길 6-향교말> 표지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민촌’이라는 호의 기원이 되기도 한 소설 “민촌(民村)”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조봉 골짜기에서 나오는 물은 ‘향교말’을 안고 돌다가 동구 앞 버들숲 사이를 뚫고 흐르는데, 동막골로 넘어가는 실뱀 같은 길이 개울 건너 논둑 밭둑 사이로 요리조리 꼬불거리며 산잔등으로 기어 올라갔다.”

우리 교회와 민촌문학이 만나게 된 사연을 알려주는 대목입니다. 2019년 9월 7일(토) 민촌 35주기 추모제가 우리 교회에서 열리고 표지판을 설치할 때 이야기했지만, 민촌문학과 민중신학의 만남은 참으로 절묘하게 여겨졌습니다. 우리 교회가 민촉문학의 산실이 된 터에 자리잡게 된 것이 일종의 섭리처럼 다가왔습니다.

‘민촌’이 뭡니까? 양반들이 사는 ‘반촌’(班村)에 대비되는 상민들이 사는 마을을 뜻합니다. 아랫것들이 사는 마을입니다. 이기영 선생은 스스로는 반촌의 가계에 속해 있으면서도 오히려 민촌에 일체감을 느꼈습니다. 시종일관 그의 문학의 정신입니다. 가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아픔에 일체감을 느끼고 연대하며 그들의 강인한 삶과 희망을 그린 것이 민촌문학의 큰 뜻입니다.

그 민촌문학과 천안살림교회가 만났습니다. 그 의미를 새기게 해주는 한 가지 일화가 떠오릅니다. 이곳에 교회 세우는 것을 반대하는 유림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자리는 하정배(下庭拜: 아랫것들이 지체 높은 이에게 엎드리는 예)의 자리이지 당신들의 존엄한 주님을 모시는 자리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때 제가 말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는데, 그 ‘육신’이 뭘 뜻하는지 아시느냐, 바로 ‘종의 몸’을 뜻하니, 그렇다면 교회 자리로 딱 맞다고 맞받았습니다. 단순한 임기응변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세상과 이웃을 섬기는 교회의 정신을 환기한 것입니다. 민중신학은 바로 그 복음의 본래 자리를 회복하고자 한 신학적 통찰입니다.

그 민중신학과 민촌문학이 만났으니 얼마나 절묘합니까? 민촌문학의 산실이 된 터에 교회가 자리잡은 것은, 끊임없이 그 낮은 사람들의 자리, 민초들의 자리에서 세상에 희망을 펼치는 역할을 감당하라는 뜻을 일깨우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민촌문학의 뜻을 기리는 공간역할만 했었는데, 오늘은 예배 가운데 그 뜻을 함께 새기게 되었습니다.

민촌은 앞서 말한 단편소설 “민촌”뿐만 아니라 장편 『땅』과 『두만강』 등으로 민족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민촌 이기영 평전』의 저자 이성렬 선생은, 민촌이 성서의 핵심 개념인 ‘희년’(禧年) 사상을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놀랍게도 민촌은 『땅』에서 그와 같은 꿈을 그리고 있다고 지적합니다(492). 민촌이 교회와 인연을 깊이 맺은 적이 있지만 그 경험이 현실의 교회에 대한 비판적 태도로 이끄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진수를 문학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성서는 민중들의 애환과 고난, 그러나 동시에 강인한 생활력과 끈질긴 희망을 증언합니다. 민중신학은 그것이 신앙의 밑바탕이라는 것을 재확인하고 있습니다.

‘민촌’(民村)은 현실의 차별을 나타내는 이름이지만 동시에 민초들이 꿈꾸는 세계로서 의미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민중들이 더 이상 억울한 일 당하지 않고 저마다 땀 흘려 거둔 열매를 누리는 세상, 그것이 곧 민촌이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곧 희년의 성취입니다.

민촌은 짧은 유학 기간, 1923년 간토 대지진으로 끝낼 수밖에 없었던 유학의 과정이었지만, 그 과정을 통해 러시아문학과 사회주의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세계를 보는 눈이 더욱 예리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외래적 충격으로 그의 정신세계가 형성되었다거나 어떤 이념에 경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불평등과 차별의 현실 가운데서 고통을 겪고 있는 민중들을 향한 기왕의 관심과 애정, 그 밑바탕에 깔린 보편적인 휴머니즘이 당대의 언어로 가다듬어졌다는 것을 뜻합니다. 원래 지녔던 밑바탕의 생각이 시대의 언어로 가다듬어진 것입니다. 그 이후의 활동도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민촌 39주기를 맞아 그 문학의 정신을 새기는 것은 오늘 더욱 각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대한민국의 뿌리인 독립운동이 부정되고 있고, 분단체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결단코 있어서는 안되겠지만, 그야말로 언제든 전쟁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심각한 위기가 조성되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일상적 삶의 모든 영역이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일과중 여기저기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호소에 응하고 연대 서명하는 시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합니까? 국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정부는 없고, 자기 세력의 이익을 추구하느라 갈등과 증오를 부추기는 도당이 지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 상황이 장시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 파국적 상황은 분단과 갈등의 체제가 안정성을 지닌 것이 아니라 몹시 불안한 형국 가운데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대결을 추구하는 태도는 협력을 통해서만 공존하는 세계의 근본적 진실 앞에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거꾸로 우리 사회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갈망이 높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게 정말 인내가 필요한 시기입니다. 그 인내는 본문말씀이 말하는 바와 같이 그저 수동적으로 견뎌내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행동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이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결연한 의지를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뒤로 물러나서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을 사람들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깊이 새기며 지치지 않고 정진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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