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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無)와 무한(無限) 사이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에게!(룻 4:13-17 몬 1:8-18 막 6:45-52)창조절 여섯째 주일(10월8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10.06 03:12

1. 검은 피부, 하얀 가면

▲ 프란츠 파농이 스물여섯에 쓴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

지난주에 언급했던 탈식민주의 이론가 프란츠 파농은 스물여섯에 쓴 책 『검은 피부, 하얀 가면』(문학동네, 2014)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나 자신의 토대다. 내가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나의 역사적, 도구적 조건을 넘어설 때이다. 유색인의 불행은 노예화되었다는 데 있다. 백인의 불행과 비인간성은 일정 부분 인간을 살해했다는 데 있다.”

프란츠 파농은 프랑스령 서인도제도 마르티니크에서 흑인 혼혈로 태어나서 프랑스에서 의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정신과 의사입니다. 살아서는 알제리혁명의 지도적 이론가이고, 죽어서는 제3 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영웅으로 떠올랐다가, 20세기 후반 탈식민주의 이론의 상징적 인물이 된 사람입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의 말처럼, “니체, 프로이트, 사르트르를 잇는 우상파괴의 계승자, 일탈적이고 과도기적인 진리의 전달자”입니다.

식민주의 심리학의 창시자인 파농은 정신분석학과 정치경제학을 결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파농의 가장 큰 업적인데, 쉽게 말해 헤겔과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재해석하고, 전복시킨 데 있습니다. 사실 헤겔 변증법의 핵심은 역동적 상호 관계로, 둘의 위치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주인과 노예의 위치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타인을 억압하는 사람인 주인은 자신을 해방할 수 없고, 노예의 인정 투쟁이 결국 주인을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인은 노예의 노동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기에 비자립적이 되고, 반면 노예는 죽음의 공포를 처절하게 체험하면서 삶을 더욱 깊은 곳까지 의식하게 되며, 이에 더해 노동을 통해 자신과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주인이 가지고 있는 가짜 자립성과는 다른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립성을 획득하기 때문입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에 “노동자가 투쟁으로 자본가를 해방한다”라는 논리가 가능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러나 헤겔의 주인과 노예는 실제라기보다는 ‘나(Ich, I)’라는 자기의식을 구성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역사 발전의 원동력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따라서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인격과 자유를 형성하고 발전시킨다는 것입니다.

조금 철학적이지만, 부연 설명하면, 나의 자기의식은 대상을 만납니다. 물론 이 대상도 또 다른 자기의식을 가진 ‘나’입니다. 이 만남에서 누가 누구를 인정할 것인가를 두고 긴장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나’는 상대방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자신이 주인이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거나 혹은 굴복당합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각각의 나는 상호적으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헤겔의 생각입니다.

▲ 영화 <노예 12년>에서 주인(에드윈)과 노예(솔로몬) 사이에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적 역전이 있다.

​그러나 파농에 의하면, 이러한 ‘나’로서의 주인과 노예가 인종 문제에 있어서는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젠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흑인과 여성은 인간의 역사에 등장하는 계기는 노예이거나, 아이를 낳는 기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흑인은 백인 주인과의 상호 인정의 갈등 없이, 그저 노예로 지명 당했을 뿐입니다. 결국 헤겔의 주인 개념에는 상호성이 있지만, 인종과 젠더 문제에서는 상호성이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종 차별과 성차별은 견고한 성읍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여리고 성입니다.

따라서 주인인 백인 남성은 흑인 노예의 의식과 여성들의 젠더를 비웃습니다. 남성 백인 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원하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노동뿐입니다. 여성에게 원하는 것도 인정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따라서 파농의 노예 개념은 자신의 노동을 통해 해방의 근간을 마련하는 헤겔식 노예가 아닙니다. 파농의 말입니다.

“검둥이는 열등성의 노예로, 백인은 우월성의 노예로 양편 모두 신경증의 방향성에 따라 행동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소외를 정신분석적 설명에 따라 고찰하게 되었다. …… 유색인은 자기의 개인성을 회피하고 자기 존재를 무화하려고 기도한다. 유색인이 항의할 때마다 거기엔 소외가 있다. 유색인이 부정할 때마다 거기엔 소외가 있다.”

2. 무와 무한 사이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에게

파농이 책 제목에서 나오듯, 이렇게 소외된 유색인들은 끊임없이 하얀 가면을 씁니다. 그리고 백인과 같은 주인이 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파농의 흑인 개념은 헤겔식 노예보다 훨씬 종속적입니다. 여기에는 일방적인 동일시와 욕망만이 잔존하기에 변증법이 생길 수 없습니다. 물론 상호 해방의 가능성도 없습니다. 이 욕망은 절대성, 일방성, 그리고 주체적 종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파농의 말을 들어 볼까요?

“나는 세상만큼 드넓은 영혼, 진정 가장 깊은 강만큼 깊은 영혼을 자각한다. 내 가슴은 무한히 확장되는 능력이 있다. 나는 주인인데 그들은 내게 불구자처럼 부끄러워하라고 충고한다. …… 어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니 하늘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내장을 빼낸 침묵이, 날개가 마비된 채 내게로 돌아왔다. 책임질 수 없는 나는 무(無)와 무한(無限) 사이에 걸터앉아 울기 시작했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파농의 말처럼, 세상만큼 드넓은 영혼을 가진 모든 유색인종을 불구자로 여기는 잘못된 제국의 역사가 오늘도 우리를 무(無)와 무한(無限) 사이에 걸터앉아 울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울음을 멈추는 놀라운 역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은 인종 차별과 성차별에 대한 말씀입니다.

구약 말씀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나이 든 여인 나오미와 이방 여인인 며느리 룻의 회복입니다. 이들은 성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 곧 메시아의 세상을 여는 새싹입니다. 그리고 서신서 말씀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고 합니다. 노예해방, 곧 인종 차별 극복입니다. 이것은 무(無)와 무한(無限) 사이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린 사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차별 없는 평등공동체를 꿈꿉니다. 물론 그 완성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은 세례 요한의 죽음 이후 예수님께서 펼치신 밥상공동체였습니다. 이제 혼란을 평정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서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병이어 사건을 깨닫지 못하고 마음이 둔해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늘 말씀에 깨어있고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3. 네 생명의 회복과 네 노년의 봉양자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룻 4:13-15)

잘 아는 룻과 나오미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배경을 말씀드리면, 이스라엘에 기근이 왔습니다. 나오미와 그녀의 남편은 두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아들들은 모압 여자와 결혼했지만, 나오미의 남편과 아들 모두 숨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때 며느리 룻이 함께 갈 것을 맹세합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고백합니다.

▲ 절망적인 상황 속에 있는 나오미와 룻

아무튼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와서 생활합니다. 룻은 나오미를 잘 모십니다. 룻은 부자인 보아스의 밭에서 소일거리를 하는데, 보아스는 룻의 선행을 알게 되고 그녀를 돌보아주었습니다. 나중에 보아스와 룻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아기를 낳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이때의 말씀입니다. 나오미가 아이의 출생을 기뻐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양육자가 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룻 4:16-17)

메시아는 다윗의 가문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다윗은 룻에게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방 여인을 메시아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평등 세상입니다. 버려진 여성들을 통해 새로운 역사를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입니다. 이것은 노예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신서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4.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담대하게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그를 돌려보내노니, 그는 내 심복이라.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몬 1:8-14)

▲ 바울과 오네시모, 그리고 빌레몬

바울은 골로새에 사는 부유한 사람이자 바울의 전도로 그리스도인이 된 빌레몬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신과 함께 감옥에 있는 오네시모를 자신의 심복으로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강제로 오네시모를 해방하지 않고,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호소합니다. 이 일이 선한 일인데, 억지로는 하지 말라는 뜻이죠? 빌레몬에게 종 오네시모에 대한 자발적인 사랑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종이 아니라,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고 요청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아마 그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너로 하여금 그를 영원히 두게 함이리니,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몬 1:15-18)

사실 빌레몬의 가정에 노예였던 오네시모는 주인 몰래 도망갔습니다. 당시 노예들은 주인의 재산을 도적질하여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로마로 간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빚진 것이 있으면 자기 앞으로 계산하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재산을 도적질한 것 같습니다. 아무튼 오네시모는 로마로 도망갔고, 잡혀서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네시모는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믿음은 바울에게 인정받을 만큼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에게 꼭 필요한 충성된 일꾼이 되었습니다. 무익한 존재였으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고 나서, 유익한 일꾼이 된 것입니다.

오늘 바울은 주인인 빌레몬에게 종인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노예해방, 인종 차별에서 해방이 되는 세상이 바로 평등 세상이며 하나님 나라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이러한 혁명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을 깨닫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면 그것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5. 예수를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고 놀람이라!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니라. 저물매, 배는 바다 가운데 있고 예수께서는 홀로 뭍에 계시다가,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 밤 사경쯤에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오사 지나가려고 하시매,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유령인가 하여 소리 지르니,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막 6:45-50a)

▲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기적 사건 이후 제자들을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과정에서 거대한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건너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이 사건은 4 복음서 중 누가복음서를 제외한 나머지 복음서에는 다 기록돼 있습니다. 영국 <크리스천투데이>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 4가지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폭풍을 아신다.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이 폭풍 한가운데서 죽음의 위기에 처한 사실을 어떻게 아셨을까? 때로 우리가 겪는 삶의 폭풍이 예수님의 시야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당신이 겪는 폭풍에 대해 잘 아신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 가운데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시며 고통을 알고 계신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이 있던 배를 향해 바다 위를 걸어오실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인지하지 못했다. 성경은 제자들이 그분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유령으로 여겼다고 기록하고 있다. 폭풍 속에서 예수님과 그분의 역사하심을 인지하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지 못하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폭풍 속에서 건져내시기 위해 당신의 길을 가신다.”

“셋째, 불신은 우리를 바다에 빠뜨릴 뿐이다. 성경의 기록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께 ‘당신처럼 바다 위를 걷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실제로 베드로는 바다 위를 걸어 주님께 나아갔지만, 파도를 보고 두려워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의심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해가 없어 보일지라도, 우리를 절망과 낙심에 빠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폭풍을 지날 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믿음과 완전한 신뢰가 꼭 필요하다.”

“마지막 넷째, 예수님은 우리가 항해를 마칠 때까지 함께 하신다. 우리의 신앙 길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예수님은 이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신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요 6:21).’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계획을 갖고 계시지만 우리 힘으로는 이를 이룰 수 없다. 감사하게도 예수님이 계셔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탁월한 계획이 이뤄지도록 우리를 도우신다.”

바다 위를 걸으신 사건의 핵심을 잘 요약한 내용입니다. 특히 이어지는 본문 말씀은 둘째, 우리는 예수님을 쉽게 인식하지 못한다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먼저 말씀을 볼까요?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0b-5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조주이신 평화의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나이 든 여인 나오미와 이방 여인인 며느리 룻의 삶을 회복시키십니다. 성차별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 곧 메시아의 세상을 여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두라고 권면했듯이 주인과 노예가 없는 서로 형제가 되는 평등 세상을 여셨습니다. 이렇게 노예해방, 인종 차별을 극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무(無)와 무한(無限) 사이에 걸터앉아 우는 이들에게 열린 새로운 세상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세상을 여는 마중물로서 교회를 제대로 세워가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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