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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인으로 살아가십시오법의 정신(출애굽기 20:1-1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10.11 04:32

오늘 우리가 마주한 말씀은 십계명입니다. 한 계명 한 계명 그 뜻을 헤아리는 것도 벅찬데, 한꺼번에 주어졌으니 어찌할까요? 주어진 그대로 대의를 새길 수밖에 없습니다.

십계명은 계명으로서 조문 그 자체뿐 아니라 그 의미가 매우 분명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통상 십계명으로 말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를 어떻게 나눠야 할지 그 이해가 다릅니다. 또한 그 계명의 내용을 고대의 종교적·사회적 맥락에 한정해 받아들여야 할지 아니면 오늘의 상황에서도 보편적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 하는 것도 중요한 쟁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십계명으로 전해진 말씀은 실제로 10개의 계명이 아닙니다. 굳이 의미상 구분해 보면 13~14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십계명이라고 했으니, 어떻게든 10개로 나눌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나누는 데 각기 다른 전통이 있습니다. 유대교 그리고 그리스도교 안에서 교파별로 다릅니다.

유대교와 개신교 및 동방정교는 첫머리를 하나의 계명으로 보느냐 안 보느냐에서 차이를 지니고 있고, 나머지는 거의 일치합니다. 하나님을 소개하는 대목(1~2)을 개신교와 동방정교는 전문으로 이해하고, 이를 유대교는 하나의 계명으로 받아들이면서 대신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3)과 우상숭배 금지(4)를 하나의 계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다음은 일치합니다. 가톨릭과 성공회, 루터교는 전문을 전제하고, 유대교처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과 우상숭배 금지를 하나의 계명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마지막 말씀 가운데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과 이웃의 아내나 종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17)을 두 개로 나누어 십계명을 맞추고 있습니다.

참고삼아 하는 이야기이지만, 성서 자체 안에서도 이미 서로 다른 이해가 있고(출애 34:10~28 참조),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서도 서로 달리 이해하는 입장이 있다는 것은, 성경 말씀을 문자적으로 확고부동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가 과연 가당한 것인지 새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십계명이 한 시대의 특수한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아니면 오늘날에도 보편적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형성되고 기록될 당시의 특수한 의미를 지니지만, 동시에 오늘의 맥락에서 보편적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물론 재해석의 과정을 통해서입니다. 십계명 역시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따라서 당대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알고, 그것이 오늘날 어떤 상황에 적용될 수 있을지 헤아릴 수 있으면, 우리는 그 진의에 다가서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먼저 개신교의 일반적인 전통에 따라 본문말씀의 의미를 새기고자 합니다. 더불어 기록된 당시의 의미와 오늘의 의미를 동시에 새기고자 합니다.

먼저 전문의 의미를 새겨볼까요? “나는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2). 이 말씀은 십계명의 근본 동기를 일러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사건으로서 출애굽을 환기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종살이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민으로서 살아가게 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자유를 누리는 법도를 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마치 대한민국 헌법이 3.1정신과 4.19혁명을 환기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으로 집약되는 1~3계명의 내용은, 그 어떤 것으로도 제약당하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곧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라는 진실을 환기합니다.

제1계명 곧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3)은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이스라엘, 종에서 자유인이 된 이스라엘에 대한 기본적인 요구입니다. 이것은 당대의 모든 신들이 각기 해당 사회의 질서를 승인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현실에서 다른 신들이 보장하는 질서와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환기합니다.

제2계명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계명(4)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마저 우상화할 가능성을 경계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을 뜻합니다. 이방종교의 형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우상화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어떤 것을 하나님 자리에 두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흥미로운 구절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리겠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수 천대 자손에게까지 사랑을 베풀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징계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그에 매이는 것은 근본적 진실에서 벗어납니다. 성경은 잘못의 책임을 그 당사자에게 물을 뿐 오히려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곳곳에서 강조합니다(신명 7:9~10, 예레 31:27~37, 에스 18:20).

제3계명 곧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말라는 계명(7)은 그 이름이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계명으로부터 하나님의 이름을 아예 부르지 않는 전통이 생기도 하였지만, 영광을 기리며 찬양을 드릴 때조차 금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때나 아무것에나, 또는 그저 자기 욕망과 의지일 뿐인 것에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아무 때나 하나님 이름을 갖다 대는 사람들을 너무 많이 봅니다. 경계할 일입니다.

제4계명 곧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그저 종교적인 계율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십계명을 정신을 가장 잘 집약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이른바 제의에 관한 계명이 하나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도 일상의 삶 가운데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지 제의의 맥락에 한정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안식일 계명 역시 그렇습니다.

본문말씀인 출애굽기에서는 창조의 질서를 환기합니다. 십계명을 전하는 또 다른 본문인 신명기(5:1~21)에서는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때를 환기합니다. 창조의 질서를 환기하고 있는 본문말씀에서도 사회적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너희가 쉬어야 아들 딸, 남종과 여종, 그리고 가축들이 쉰다.’

여기서 십계명을 지켜야 할 당사자가 누구인지, 곧 자유민 남자가 그 당사자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 있습니다. 이는 그 사회의 책임 있는 이들이 모든 사람과 생명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어떻게 공동체를 운영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일깨워 줍니다. 안식으로 거룩한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은 중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본래의 모습대로 회복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제5계명 곧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은 사회적 유대와 생명의 질서를 환기합니다.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일하지 못하는 노인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윤리를 말합니다. 돌봄 노동은 부차적인 것이 아닙니다. 생명을 존속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에 해당합니다. 이 계명에 약속이 딸린 이유입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대와 세대로 이어지는 생명의 유대를 환기하는 것입니다.

제6계명 곧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그 누구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범죄자 처형이나 전쟁 중 공격행위를 나타날 때는 다른 히브리어를 사용하기는 하고, 그래서 이 계명을 두고 논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근본 취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이 중요하다는 진실, 누구든 그것을 임의로 빼앗을 수 없다는 진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명적인 말 한마디라도 살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습니다(마태 5:21~22). 이로써 그 의미를 더욱 확대하였습니다. 혐오발언을 일삼는 이들이 깊이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제7계명 곧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14)은 오늘의 일반적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서도 확대하여 해석하였습니다(마태 5:27~28). 다만 고대 세계에서 아내는 소유로 여겨졌다는 것을 전제하면, 이는 개인간의 성적 윤리 문제에 한정되지 않고 가족관계와 공동체의 질서를 파괴하는 심각한 문제로 간주되었다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8계명 곧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15)은 그 말뜻으로 보자면 분명하지만, 그 대상이 무엇인지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마지막 계명(17)에서 소유에 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것과 구별되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히브리어 용어 자체가 인신을 구속할 때 사용하는 개념(창세 40:15)으로 되어 있어서, 인간을 대상물로 하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사람을 마음대로 부려 먹거나 팔아넘기기 위해 구속하는 것, 사람을 노예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신매매를 포함하여 인간의 자유를 속박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의 삶의 방식은 모두가 도둑질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제9계명 곧 이웃에서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하지 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법정에서 위증을 금지하는 의미입니다. 법적 책임을 지닌 주체가 불리한 증언으로 이웃을 곤경에 빠트리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통상 일체의 거짓말을 금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어 그 의미가 이미 확대되어 있지만, 정확하게 의미를 새기자면 이웃을 불리한 조건에 처하게 만드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 이웃을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만드는 일에 우리는 과연 얼마나 연루되어 있을까요?

제10계명 곧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은 사실상 제7계명이나 제8계명과도 겹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구별되는 의미는 남의 소유를 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내와 종, 그리고 가축이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소유는 배타적 재산권의 대상인 재화에 한정된다기보다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함축합니다. 그것을 무너뜨리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인간관계와 물질적 대상과의 관계 전반을 통틀어 자유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청중은 넓은 의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법적인 책임을 지닌 남자들이었습니다. 그 사회를 구성하고 이끄는 이들이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고 나아가 그 자유민 공동체의 존속을 위하여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 시대적 맥락을 헤아리며 볼 때, 십계명은 그 책임적 주체들이 스스로 오만에 빠지거나 자신의 힘을 남용하여 타인을 곤경에 빠트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의 맥락에서 보면 누구나 예외 없이 당당한 주체로 인정받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취지입니다.

십계명은 성경이 말하는 법의 정신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십계명을 비롯하여 성서에는 다양한 법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법을 고대 근동지역의 다른 법들과 비교하면 그 정신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가장 분명하게 두드러진 점은 그 제정자가 다른 법들은 왕이라면 성서의 법들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법의 적용 범위와 그 동기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법들은 대개 국가가 강제할 수 있는 실정법으로서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동시에 그 법은 현존하는 위계질서를 철저하게 옹호하는 성격을 띱니다. 반면에 성서의 법은 실정법의 성격을 넘어 윤리적 성격을 지닙니다. 다른 법들이 양심이나 도덕적 올바름, 또는 동정심의 문제를 다룰 여지가 없는 반면 성서의 법은 이를 포괄하고 있습니다. 거기에서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자 하는 일관된 관심이 두드러집니다.

그것은 근대 이전의 종교적 법률의 성격이겠거니 단순히 치부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당대 사회에서 비교해 보더라도 그 특징이 두드러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묻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다른 법이 질서의 유지에 관심한다면 성서의 법은 생명존중과 인간존엄의 정신을 일깨웁니다. 현대 헌정국가에서 법은 실정법의 성격을 명확히 지니고 있지만 인간존엄을 보장하는 법의 정신을 지닐 때 그 정당성을 인정받습니다. 실정법이 양심까지 규율하려고 하면 월권이 되지만, 인간존엄을 훼손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계명 또는 성서의 어떤 율법 조문을 대할 때 생명에 대한 경외와 인간 존중 가운데 자유를 보장하고자 하는 정신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은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자유를 누리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환기하며, 그 뜻을 이 땅에 구현해야 하는 백성의 도리를 일깨운 것입니다. 그 진실을 알고, 우리가 말씀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자유를 누리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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