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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삼상 22:1-2 히 4:1-11 막 8:10-21)창조절 일곱째 주일(10월15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10.13 02:22

1.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그에게 모였고!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인종차별, 성차별이 없는 평등 세상이라 배웠습니다. 그 예가 바로 예수님의 심포지엄(오병이어 기적 사건)이고, 바울과 빌레몬의 노예 오네시모에 대한 인종차별 없는 사랑이며, 룻과 나오미를 통한 성차별 없는 메시아 세상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구약 말씀에 나오는 다윗의 아둘람굴이 바로 그런 세상입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모여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둘람굴에서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과 기적으로 보여주시는 세상을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의 제자들은 잘 깨닫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깨닫지 못한 제자들을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서 말씀에서 책망하십니다. 또한 서신서 말씀인 히브리서는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평등 세상, 하나님 나라를 세워야 하는데, 제자들은 물론, 초대 그리스도인들도, 그리고 오늘 우리도 예수님 말씀처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해 아둘람굴과 같이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모이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깨닫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그러므로 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환난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가량이었더라.”(삼상 22:1-2)

아둘람은 히브리어로 ‘은신처, 피난처, 격리된 장소’라는 뜻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의 칼날을 피해 숨었던 곳이며 이곳에는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가 다윗이 이곳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모였습니다. 그 수는 400여 명 가량인데, 이들은 비록 현재 상황이 힘들고 어렵고 원통하지만, 다윗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시편 57편과 142편은 이때 다윗이 지은 시로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이 재앙들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시 57:1).”라고 울부짖습니다. 또한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시 142:1).”라고 간구도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것을 믿고 감사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뭇 나라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시 57:9).” “내 영혼을 옥에서 이끌어 내사 주의 이름을 감사하게 하소서! 주께서 나에게 갚아 주시리니, 의인들이 나를 두르리이다(시 142:7).”

비록 척박한 굴이지만, 또한 모인 사람들도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가 넘치고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결국 원수들은 자빠집니다.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중에 빠졌도다(시 57:6).”

▲ 아둘람에 있는 굴의 안과 밖 모습

사실 교회가 1,000명이 모이고 10,000명이 모이더라도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의 영혼을 구해야겠다는 긍휼의 마음과 이러한 현실을 유발하는 구조적 악으로서 타락하고 병든 사회를 바로 잡아 보겠다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곳은 교회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10명이 모이고 100명이 모이더라도 영혼 구원에 대한 열정과 병든 사회를 고치겠다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 그곳은 진정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교회일 것입니다.

아둘람굴이 그렇습니다. 사울의 화려한 궁궐보다 아둘람굴이 바로 은혜의 동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둘람굴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잘 깨닫지 못합니다. 놓인 환경, 주어진 상황에 그저 불평하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꿈과 희망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 말씀을 볼까요?

2.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곧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사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시니라.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다시 배에 올라 건너편으로 가시니라.”(막 8:10-13)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또다시 칠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십니다. 오병이어와 달리, 칠병이어는 무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흘을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굶주렸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먼저 먹을 것을 챙깁니다. 그리고 심포지엄을 엽니다. 이후 사천 명이 배불리 먹었고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 일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평등 공동체, 심포지엄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또 구합니다. 평등 공동체는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들을 떠납니다. 부정적인 자들의 악한 영향력은 예수님께서도 피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바리새인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밖에 그들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수군거리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수군거리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하지 못하느냐?”(막 8:14-18)

제자들이 남은 떡 가져오기를 잊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 하셨는데, 제자들은 남은 떡을 가져오지 않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라 오해합니다. 그렇다면 평등 공동체는 단지 먹을 것만 나누는 공동체인가요?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누룩은 ‘죄의 영향력’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표적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표적이 임했으나, 믿지 않고 더 큰 표적을 구합니다. 제자들은 놀라운 기적과 표적의 사건을 두 번 이나 보았지만(오병이어, 칠병이어), 그것을 은혜로, 또한 감격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누룩, 곧 죄의 영향력은 큽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막 8:19-21)

예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부족해서 더 요구한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과 동행하며 많은 은혜를 깨달았지만 변하지 않는 제자들,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3. 내 안의 유인원, 침팬지와 보노보

세계적인 영장류 학자이자 에모리대학교 심리학과 석좌교수인 프란스 드 발교수는 『내 안의 유인원』(김영사, 2005)에서 침팬지(pan troglodytes)와 보노보(pan paniscus)라는 두 종의 영장류 친척을 등장시켜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의 논의를 넘어서는 종합적이고 균형 잡힌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드 발 교수의 말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권력과 공격성, 섹스, 사랑, 협력, 도덕성에서 유인원과 인간이 어떤 행동을 나타내는지 직접 비교할 것이다. 이 모든 차원에서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 측면을 다 드러낸다. 어떻게 인간은 다른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한편으로 관대한 사랑을 실천하며, 이 두 가지 성향을 어떻게 함께 지니고 있을까? 나는 다른 많은 사람이 한 것처럼 우리의 본성을 성선설 또는 성악설로 딱 잘라 말하는 대신에 그 다면성을 탐구하고 조명하고자 한다.”

결론은 인간 내부에는 수평적 관계의 보노보와 수직적 관계의 침팬지가 모두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스스로가 내부의 양면성을 통제할 수 있으며 한쪽 면이 다른 쪽 면보다 더 잘 표출될 수 있도록 하는 환경이나 동기를 만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드 발은 이렇게 말합니다.

▲ 보노보와 침팬지
“보스니아와 르완다에서 대량 학살을 자행할 때처럼 사람들이 나쁜 짓을 저지를 때, 우리는 그들을 짐승이라 부른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구한다거나 가난한 자를 돕는 것과 같은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 우리는 그러한 행동이 인간 특유의 도덕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치부한다. 기독교에서 흔히 이야기하듯이 야수와 천사 사이에 머물고 있는 이러한 인간 본성의 이중성이라는 주제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두 친척 동물, 침팬지와 보노보를 살펴봄으로써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침팬지는 폭력적이고 권력에 굶주린 동물이라는 평판을 얻고 있는 반면, 영장류 세계의 히피족이라 할 수 있는 보노보는 ‘전쟁이 아니라 섹스’를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침팬지와 보노보 사이에 유전적 거리는 가깝지만, 행동형질의 차이는 매우 다릅니다. 그렇다면 침팬지와 보노보는 어떤 성향 차이가 있을까요? 먼저 침팬지는 수컷 중심의 엄격한 위계질서와 잔인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공격적 성향으로 싸움을 통해 권력을 쟁취하고 유지하며, 성적 문제를 해결합니다. 그래서 침팬지를 ‘도살자 유인원(killer ape)’이라고도 합니다.

반면 보노보는 감수성이 풍부하고 성욕이 왕성한 낙천성(카마수트라 영장류), 그리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돕는 동료 의식과 역지사지(易地思之)의 공감(empathey) 능력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특히 보노보는 암컷 중심으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짝짓기를 통해 서로 연대하고 수컷을 견제합니다.

이들 유인원과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사회 역시 ‘먹이’와 ‘성’을 두고 경쟁합니다. 따라서 제한된 자원과 성을 서로 차지하기 위한 전쟁과 학살, 정치적 탄압과 노사 갈등, 차별과 강간 등의 폭력성은 침팬지의 성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것을 기독교적으로 보면, 우리 인간은 ‘카인의 후예’인 것입니다.

반면 식량원조나 불우이웃 돕기, 각종 기부활동, 지진이나 화재 시 낯선 사람을 구하는 행위 등 ‘측은지심’을 통해 평화를 지키려는 것은 보노보적 성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침팬지와 보노보의 성향을 모두 지닌 야누스적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에 침팬지가 득실거립니다. 학교에도, 교회에도, 정치에도, 문화에도, 마침내 우리 마음속에도! 끊임없이 비교하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혐오합니다. 흥미로운 침팬지 실험이 있습니다. ‘오이’는 괜찮은 음식이지만, 옆에서 ‘포도’를 먹는 침팬지가 있으면, 오이를 먹던 침팬지가 오이를 던져버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안에 보노보를 부활시켜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바리새인들과 제자들은 보노보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침팬지에 굴복당한 것입니다. 만족을 모르고 비교하고, 더 큰 것을 원합니다. 따라서 늘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참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안식에 들기 위해 말씀을 듣고 믿음과 결부시켜 순종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서신서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4.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는 혹 이르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그들과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들은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는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 그가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어졌느니라.”(히 4:1-3)

▲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와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참된 안식에 들어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 신뢰하는 것과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의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믿은 유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예수님을 죄를 속해주시는 대제사장 직분을 가지신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또한 바리새인과 많은 유대인들은 사람으로 보이는 예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습니다. 메시아는 선지자로 혹은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너희들 조상 선민 이스라엘이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듯,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지 않으면 참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권면합니다. 선민 이스라엘도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런 예를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충격이었을 겁니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진정한 안식이 주어졌더라면, 더 이상 진정한 안식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참된 안식을 주지 못했죠?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제칠 일에 관하여는 어딘가에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또다시 거기에 그들이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 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면 거기에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복음 전함을 먼저 받은 자들은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들어가지 못하였으므로 오랜 후에 다윗의 글에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이라고 미리 이같이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나니,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3-8)

따라서 우리는 늘 참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쓰고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히 4:9-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안식할 때를 남겨 두셨고, 그리고 이를 위해 힘쓰면, 하나님께서 천국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면서 참된 안식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십니다. 그곳이 비록 아둘람굴이라도, 풍랑이 이는 바다 위 배라도 참 평안과 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 주시는 참된 안식을 아직도 깨닫지 못해 어둠 속에서 헤매지 마시고 주님께로 나오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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