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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니라!(왕하 10:1-11 약 2:14-20 막 12:1-8)창조절 아홉째 주일/종교개혁주일(10월29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10.27 03:30

1. 천지개벽의 종교개혁주일, “멸시하는 자를 받들고 배척하는 자를 섬기라!”

오늘은 종교개혁 506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는 종교개혁이라 하면 로마 가톨릭에서 개신교회가 개혁하며 나온 것으로만 생각하는데, 당시 유럽은 종교가 삶의 전부였고, 기독교가 정치와 문화, 경제와 예술 전부를 좌우했기에 단지 종교만 개혁한 것이 아니라 삶 전반을 개혁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로 치면 사회-문화의 대변혁, 아니 정치-경제의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구약 말씀에 나오는 예후 혁명처럼 왕조가 바뀌고, 우상 숭배자들이 몰살당하는(왕하 10:18-28 참조) 천지개벽의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대변혁을 통해 개벽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불의의 세상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불의하게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주인집 아들을 죽이는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세상, 곧 불의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참된 말씀, 참된 은총, 참된 진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리의 행동은 불의한 세상을 여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적 행함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의 개혁과 혁명이 어떠한 이념에 기초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 <아라문의 검> 등장인물, 타론, 은섬, 탄야, 태알하

지난주 끝난 tvN 토·일 드라마 <아라문의 검>입니다. 미흡한 CG효과와 영상 이미지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열연과 대사의 탄탄함으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주었습니다. 기독교와 불교 사상의 핵심, 그리고 단군신화의 홍익인간 이념을 잘 버무려 종교적으로도 재미있게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깊은 통찰을 주는 대사들이 좋았는데, 가령 신의 뜻을 전하는 제사장 탄야(신세경 분)의 말인 “멸시하는 자를 받들고 배척하는 자를 섬기라!”라는 말은 기독교의 핵심을, “스스로 아사신이 되어라!”라는 말은 불교의 핵심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라!”라는 말은 홍익인간의 이념을 보여주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종교개혁기념 주일을 맞아 교회개혁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새로운, 그러나 의로운 변화를 만들기를 소망합니다. 그것은 멸시하는 자를 받들고 배척하는 자를 섬기는 세상, 스스로 작은 예수가 되어 널리 세상과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2.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다!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사마리아에 있는지라. 예후가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내서 이스르엘 귀족들 곧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전하니, 일렀으되, 너희 주의 아들들이 너희와 함께 있고 또 병거와 말과 견고한 성과 무기가 너희에게 있으니, 이 편지가 너희에게 이르거든,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의 아버지의 왕좌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왕하 10:1-3)

오늘 구약 말씀은 지난주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주신 사명이 이뤄지는 말씀으로 북이스라엘 오므리 왕조(오므리-아합-아하시야-요람) 44년을 무너뜨리는 예후 혁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엘리야의 제자인 엘리사가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인 예후를 기름 부어 왕으로 삼습니다(왕하 9:3). 그리고 예후는 아합의 집을 쳐서 그의 온 집을 멸망시킵니다. 특히 바알신 숭배자들을 다 죽이는 종교개혁도 성공합니다. 이렇게 예후는 악하고 부패한 오므리 왕조를 무너뜨림으로, 이스라엘에 자신을 포함한 ​5대를 잇는 89년간의 예후 왕조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후가, 아람과의 전쟁에서 상처를 입고 치료받던 이스라엘의 9대 왕인 요람(여호람)을 배반하고 군사혁명을 일으켜 왕권을 빼앗고, 유다의 6대 왕 아하시야와 아합의 아내인 이세벨도 죽이고, 아합 왕가의 남은 후손들과 바알 숭배자들을 철저히 숙청하는 사건입니다. 특히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을 죽이는 말씀입니다. 배경은 이렇습니다.

▲ 예후의 정치혁명과 종교개혁

아합의 아들 칠십 명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에 있었습니다. 예후가 사마리아의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들을 써서 사마리아에 보냅니다. 이것은 경고의 편지입니다. 그러자 이들은 예후의 편지를 받고, 예후가 북이스라엘의 요람 왕도 죽이고 남유다의 아하시야 왕도 죽였는데, 우리가 예후를 어찌 당하리요? 하면서, 당장 아합의 아들들 칠십 명을 잡아 죽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이 그 말씀입니다.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두 왕이 그를 당하지 못하였거든, 우리가 어찌 당하리요? 하고, 그 왕궁을 책임지는 자와 그 성읍을 책임지는 자와 장로들과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이 예후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라.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을 우리가 행하고 어떤 사람이든지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리니, 당신이 보기에 좋은 대로 행하라 한지라.”(왕하 10:4-5)

그러자 예후가 다시 편지합니다.

“예후가 다시 그들에게 편지를 부치니, 일렀으되, 만일 너희가 내 편이 되어 내 말을 너희가 들으려거든, 너희 주의 아들된 사람들의 머리를 가지고 내일 이맘때에 이스르엘에 이르러, 내게 나아오라 하였더라. 왕자 칠십 명이 그 성읍의 귀족들, 곧 그들을 양육하는 자들과 함께 있는 중에 편지가 그들에게 이르매, 그들이 왕자 칠십 명을 붙잡아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 이스르엘 예후에게로 보내니라.”(왕하 10:6-7)

이렇게 아합의 오므리 왕조는 멸망합니다. 예후 왕조가 열린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볼까요? 예후는 혁명의 완성인 종교개혁까지 단행합니다. 아합 당시 정권과 야합한 제사장들을 다 죽입니다.

“사자가 와서 예후에게 전하여 이르되, 그 무리가 왕자들의 머리를 가지고 왔나이다. 이르되, 두 무더기로 쌓아 내일 아침까지 문 어귀에 두라 하고, 이튿날 아침에 그가 나가 서서 뭇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의롭도다. 나는 내 주를 배반하여 죽였거니와 이 여러 사람을 죽인 자는 누구냐?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예후가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를 다 죽이고 또 그의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들과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생존자를 남기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0:8-11)

이렇게 정치혁명은 종교개혁과 결합되어 일어났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가 제대로 서지 않으면 정치가 타락하고, 종교가 제 기능을 하면 정치는 제대로 섭니다. 아무튼 예후가 정치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을 바로 잡고 옳은 일을 하였지만,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1세가 행했던 벧엘과 단의 금송아지 숭배는 금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충실하지 않았습니다(왕하 10:28-31). 따라서 예후도 심판을 받습니다.

3. 예후 혁명과 대척점인 예후의 외교정책

▲ 앗시리아 비석 중 하나인 ‘블랙 오벨리스크’(런던 대영박물관 보관)

예후 왕에 관해 조금 더 살펴볼까요? 그림은 앗시리아의 살만에셀 3세(Shalmaneser III, B.C. 858-824) 앞에 무릎을 꿇고 조공을 바치는 예후의 모습입니다. 역사적으로 예후가 앗시리아의 봉신국(封臣國)이 되는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아니지만, 열왕기하 10:32-33절을 보면, 예후의 말년에 하나님께서 아람의 왕 하사엘에게 힘을 주어 온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하게 하여 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지파, 르우벤 지파, 므낫세 지파가 사는 광대한 지역을 공격당합니다.

이러한 아람의 침입은 예후의 외교정책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구약 신학 및 역사학의 정설입니다. 문제는 예후 혁명 과정에서 예후가 많은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아하시야를 죽이면서 남유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페니키아인(팔레스타인)이 섬기던 바알신과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페니키아와의 관계도 단절되었습니다.

▲ 남유다, 북이스라엘, 페니키아, 아람, 그리고 앗시리아 제국

이렇게 예후의 혁명으로 오므리와 아합 왕 당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외교관계가 단절되자, 아람 왕이 요단강 동부 지역을 공격합니다. 사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아람은 삼국지의 위, 촉, 오와 같은 관계입니다. 그러나 앗시리아라는 더 큰 세력에 의해 결국은 이 세 나라도 망하게 되거나(북이스라엘, 아람), 전쟁에 시달리게 됩니다(남유다). 북이스라엘은 아람을 견제하기 위해 앗시리아를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앗시리아는 아람은 물론 북이스라엘까지 침략합니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예후는 B.C. 841년에 당시 강대국이었던 앗시리아의 왕 샬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당시 앗시리아의 샬만에셀 3세는 카르프에 군사령부와 무기고를 포함한 요새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은 현재 샬만에셀 요새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샬만에셀 3세에게 조공을 바쳐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벗어난 후, 예후는 남유다를 속국으로 삼는 기반을 만듦과 동시에 예후왕조의 가장 위대한 왕인 여로보암 2세(4대왕)의 찬란한 미래를 위한 기반을 다진 것입니다. 물론 성서는 선택적으로 예후 혁명을 이야기하고 있고, 또한 여로보암 2세의 부흥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재해석하며 평가절하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외교정책과 종교정책이 상반됩니다.

아무튼 이러한 정치와 종교의 대변혁을 통해 개벽의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불의의 세상이 펼쳐지기도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복음서 말씀에 나오는 포도원 농부들이 그렇습니다. 복음서 말씀으로 들어가 볼까요?

4. 이사야서의 ‘악한 농부 비유’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막 12:1-5)

▲ 악한 농부 비유

‘악한 농부 비유’로 소개되는 이 말씀은 공관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마 21:33-46, 눅 20:9-19). 이 비유는 사 5:1-7의 포도원의 노래가 그 배경입니다. 이사야는 ‘포도원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을 농부로, 이스라엘을 포도밭으로 비유하여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기대에 못 미친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백성에 대해 탄식합니다. 곧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궁핍과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 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사 5:3-7)

5.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와 예수님의 악한 농부 비유

예후가 살해한 아합의 칠십 명 아들 사건과 포도원 농부들의 포도원 주인 아들 살해는 전혀 다른 관점이죠? 전자는 의로운 혁명을 위한 것이고, 후자는 불의한 혁명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포도원 농부들의 불의한 사건은 오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격하는 이스라엘을 보는듯합니다. 물론 비극의 시작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야만적 대응도 국제법을 위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전면전 양상으로까지 치닫고 있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서 이해하기 힘든 것은 전혀 상대되지 않을 것 같은 하마스가 왜 먼저 이스라엘에 싸움을 걸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지난 2023년 10월 23일 『국민일보』 ‘한반도포커스’에 북한대학원대학교 김동엽 교수가 쓴 칼럼 ‘네타냐후의 비극’을 보면 그 이유가 아니라 시점에 집중하며 이렇게 정리합니다.

▲ 이스라엘 시위와 네타나후 총리
“어떤 이유에서 약자인 하마스가 먼저 공격했는지가 아니라 왜 이 시점을 선택했을까로 질문을 돌려보자. 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공식의 첫 번째는 강자의 약점에 집중하는 것이다. 하마스가 공격을 결정한 시점, 네타냐후 정권의 무수한 약점이 드러났다. 부패와 정책 실패에 따른 퇴진 요구로 2021년 총리에서 물러간 네타냐후가 2022년 총리로 복귀하면서 이스라엘 사회는 내홍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정치적 기반 강화를 위해 극우 성향의 종교 시온주의당과 연정해 극우 인사를 장관으로 선임하면서 꾸린 내각은 우경화될 수밖에 없었다. 사법부를 무력화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는 사법개혁 문제를 놓고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있다며 수많은 시민이 반정부 시위를 하고, 예비역들까지 군 복무를 거부하는 등 내부 분열이 지속되고 있다. 그럼에도 힘의 절대적 우위를 맹신하고 싸우면 이길 것이라는 자만심과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하마스는 네타냐후 정권의 이런 약점을 호기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지난 2023년 7월 24일 이스라엘 의회가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사법개혁안 중 핵심 부분을 승인했습니다. 개혁안의 핵심 내용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정부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대법원의 권한’을 폐지한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고 독재로 가는 길입니다. 야당 지도자인 야일 라피드는 의회 연설에서 이번 조치는 “극단적인 소수가 이스라엘의 다수를 점령하는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네타냐후 총리는 법원의 독립성은 유지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번 사법 개혁안은 정부가 “국민 대다수의 결정에 따라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 개혁안이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생각에 이스라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시위를 일어났습니다. 물론 지금은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으로 시위는 사라졌습니다. 정치인이 전쟁을 이용하여 자신의 독재를 어떻게 유지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교권주의자들과 똑같은 상황입니다. 사랑의 종교를 이야기하지만 철저히 정치적인 무리들은 포도원 농부들이 포도원 주인의 아들을 죽이듯,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입니다. 이것은 예후의 마지막과 같은 상황입니다. 정치 혁명에는 성공했으나, 종교개혁에는 실패한 것입니다. 네타냐후 총리 역시 자신의 권력을 위해 종교를 이용합니다. 전심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네타냐후 총리는 국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민주주의를 무너뜨렸고, 국외적으로는 팔레스타인과 대화와 타협이 아닌, 힘의 우위를 맹신하고 전쟁을 벌입니다. 이렇게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이들의 마지막은 결국 심판입니다. 이사야의 말씀이 그것을 잘 보여줍니다.

이렇게 이사야의 이 비유를 전제로, 예수님은 포도원은 이스라엘 혹은 세상, 집주인은 하나님, 농부들은 유대교 교권주의자와 율법주의자 또는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모든 사람을 상징하며, 종들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보내신 예언자들, 그리고 아들은 메시아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계속 본문 말씀을 볼까요?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막 12:6-8)

농부들은 불의하게 포도원을 빼앗기 위해 포도원 주인의 아들까지 죽입니다. 이들이 바라는 것은, 주인집 아들을 죽이는 혁명을 통해 자신들의 세상, 곧 불의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 기반하고 있는지 잘 보아야 합니다. 참된 말씀, 참된 은총, 참된 진리에 기초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우리의 행동은 불의한 세상을 여는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가 이것을 잘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말씀을 볼까요?

6.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4-17)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행함 없는 믿음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의 표어인 ‘오직 믿음’을 ‘행함을 부정하는 심정적인 믿음’으로 오해하는데, 루터의 오직 믿음은 인간의 죄된 속성을 지적하며, 피조물로서 한계를 인정하라는 뜻이지, 선을 행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실천을 무시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적 행함이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 또한 우리의 개혁과 혁명이 어떠한 이념에 기초하는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약 2:18-20)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입니다. 서두에 <아라문의 검> 이야기를 했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깨달은 것 또 다른 것 하나는 “백성은 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백성을 어떤 그릇에 담기느냐가 중요하다”라는 탄야의 말입니다. 이것은 제대로 된 정치인이 통치할 때는 백성은 어질고 지혜롭지만, 반대로 불의한 정치인이 통치할 때 백성의 성품은 교활하고 이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드라마에서 아스달의 왕인 타곤(장동건 분)의 폭압 정치는 끝났지만, 백성들이 본질적으로 변하는 새로운 세상은 그리 쉽게 오지 않았고, 세상은 여전히 혼란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드라마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대로 된 정치가 있어야 하고 제대로 된 행함과 믿음의 종교가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참된 종교개혁, 나아가 천지개벽의 놀라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것을 깨닫고 행하는 믿음에 바로 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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