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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 인해 넘어진 자 하나님을 짚고 일어나라부서져야 하리(이사야서 6:1-8)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0.29 00:48
▲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아의 무너짐을 경험했다. ⓒGetty Images

1.

유다의 왕 웃시야는 유다를 52년간 통치했습니다. 그가 통치하는 동안 유다에는 유례없는 안정과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솔로몬 왕 시절이 이스라엘의 최고의 전성기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시대만큼이나 잘나가던 때가 두 번 있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874-854) 시절입니다. 우리는 아합 왕을 악한 왕으로만 기억하지만, 세계사 속에서 아합은 북이스라엘을 부강하게 만든 최고의 통치자로 기억됩니다.

또 다른 전성기가 있는데 그게 바로 오늘 등장하는 웃시야 왕(791-739) 때입니다. 아합 왕 시절에는 북이스라엘만 전성기였다고 한다면, 웃시야 왕 때는 남북이 모두 번성한 시절입니다. 웃시야 때 북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여로보암 2세(793-753)는 아합 왕보다 더 찬란한 황금기를 가져옵니다. 군사, 정치, 경제, 문화 다방면에서 최고의 시절을 누립니다. 솔로몬 시절의 영토도 거의 그대로 회복합니다.

남유다의 웃시야 왕도 그에 못지 않았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웃시야 왕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데, 웃시야는 특별히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습니다. 블레셋, 암몬, 아라비아를 무찌르고 영토를 확장하고 여기저기에서 조공까지 받습니다. 대제국인 이집트까지 유다를 두려워하고 견제합니다.

‘언제든지 나가서 싸울 수 있는 큰 규모의 군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엄청난 말입니다. 왜냐면, 당시 군대는 오늘날 군대처럼 정규군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는 농사도 짓고 고기도 잡고, 그렇게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있을 때에만 일반인들을 징발해서 군인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보면 전쟁의 시기가 따로 있습니다. 파종기나 추수기를 피해서 주로 봄철에 전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웃시야 왕은 그런 임시부대가 아니라 평상시에도 온전히 군인으로만 일하는 직업군인 정규군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 군인들이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 유다 군대는 싸울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당시 주변 국가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점입니다.

2.

이제 이런 시대적 상황에 대한 배경지식을 가지고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나는데, 감히 그 얼굴을 보지는 못하고 옷자락만 봅니다. 하나님을 보좌하는 천사들만 봅니다. 천사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 문지방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 연기가 가득합니다. 이게 뭇느 상황일까요? 심판의 날, 멸망의 날, 최후의 날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하고 부르짖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심판의 선언은 이미 세상에 선포되었습니다. 특별히 그 심판의 선언 속에는 인간의 교만함과 거만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인간의 거만한 눈초리가 풀이 죽고, 사람의 거드름이 꺾이고, 오직 주님만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2장 11절, 17절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고 스스로 슬기롭다고 하는 자들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다.” 5장 21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오늘 이사야에게 나타나셔서 심판을 선언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의 교만함, 인간의 거만함, 자만심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너희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지혜롭다고 슬기롭다고 교만에 빠져 있지만, 실은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들이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극적으로 그리고 있는 책이 있죠? 예, 요한계시록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오늘 말씀과 비슷합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재난, 최후의 진노의 대접을 가지고 와서, 일곱 개의 대접을 하나하나 땅에 쏟아 놓기 시작하는데, 마치 출애굽 때에 이집트를 덮친 열 가지 재앙처럼 순식간에 온 땅을 뒤덮어버립니다.

그러자 세상의 지혜로 세상을 주름잡고 통치하던 소위 ‘짐승’이, 그 짐승의 통치, 짐승의 권위, 짐승의 질서, 짐승의 나라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모습을 우리는 계시록에서 봅니다.

오늘 6장 1절에서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말로 그 이야기를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어떤 왕이라고 했습니까? 황금기, 전성기, 떵떵거리면서 내가 최고라고 목에 힘주던 때! 웃시야의 세상이 대단하다고 찬란하다고 영원할 것이라고 스스로 으쓱하며 자만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한 순간에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단하던 웃시야는 죽고, 웃시야의 시대는 가고, 하나님의 때가 온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세상이 아닌 인간의 세상, 하나님의 통치가 아닌 인간의 통치, 하나님의 진리가 아닌 인간의 진리, 이런 것은 아무리 부흥하고 아무리 찬란하고 영광스럽게 보여도, 결국에는 망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을 우리는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만, 교회력으로는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중세기 가톨릭교회가 얼마나 찬란했습니까? 황제의 권위마저 복종시키고 온 세상을 주름잡는 최고의 권력으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점차 하나님의 진리가 사라지고 인간의 진리가 그 자리를 대신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지고 인간의 욕망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한 종교권력이 그 자리를 차지합니다. 정신 차리고 보니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가 아니라, 인간의 더럽고 교만한 소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겉으로는 찬란하고 위대하고 멋져보였지만, 하나님 앞에는 그저 교만하고 거만한 학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무너집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이지요.

3.

무너져야 됩니다. 무너지는 것은 나에 대한 심판이기도 하지만, 무너지는 것이야 말로 구원입니다. 내 존재의 중심이 무너져야 합니다. 자랑하던 것, 뽐내던 것, 나의 성취, 나의 업적, 나를 으쓱이게 하던 것 그것이 무너져야 합니다. 한 인격이 무너져야 하고, 한 공동체가 무너져야 하고, 한세상이 무너져야 합니다. 전 세계가 무너져야 합니다. 땅이 흔들리고 갈라지고 연기가 가득 차고 불길이 치솟고,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이 쏟아 부어져서 폐허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하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음성이 비로소 들립니다. “너의 악은 사라졌다. 너의 죄는 사해졌다.”

다 무너져 버려서 끝나버린 줄 알았는데, 내 인생 끝난 줄 알았는데, 망한 줄 알았는데, 다 끝난 것이 아니라, 다 없어져 버리고, 다 헛것이 되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나를 살려주고, 나를 의미 있게 만들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줄 알았던 것들, 그러나 사실은 헛된 것들, 그것이 나에게서 없어져야, 그래야 비로소 내가 살아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멸망시키고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헛된 것들을 없애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하나님의 천사가 불타는 숯을 들고 와서 이사야의 입술을 지져주시는 것입니다. 입술이 정화되고, 말이 정화되고, 생각과 마음이 정화되고, 우리의 존재가 정화됩니다. 이사야의 전인격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악과 허물, 죄악과 불의 이 모든 것이 심판받아 마땅한 것이지만, 이로 인해서 우리가 죽어버리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통해서 그 안에서 구원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채워지고, 내가 성공하고, 내가 세워지고… 그래야 은혜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은혜는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임하는 모든 심판은 사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망했습니다. 심판당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심판당하고 끝나버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긴 바벨론 포로 기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참믿음으로의 길을 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바벨론의 침략은 사실 구원의 손길이었습니다. 가톨릭교회도 멸망했습니다. 심판당할 만했습니다. 그래서 심판당했습니다. 그러나 결코 끝나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참된 교회로 오히려 아름답게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나님의 심판이 선언되는 곳에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랫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천사들이 노래합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사6:3).”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크고도 놀랍습니다.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됩니다(계15:3).” 하나님의 심판이 대단하다고 찬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두고 감사하다고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4.

우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고백합니다. 구원받았다고 기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는 왜 기뻐합니까? 무슨 구원을 받았습니까? 우리가 받은 구원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내 마음에 드는 것,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소망하는 것, 그런 것들이 이루어져서 감사하고 기쁘고, ‘나 구원받았어요~’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감사할 때, ‘하나님은 나에게서 무엇을 없애셨는가? 무엇을 무너뜨리셨는가? 무엇을 심판하셨는가?’ 그것을 제대로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철저하게 우리는 무너뜨리고 우리 안에 하나님을 새롭게 세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무너져 버린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하나님의 심판 아래 무너져 내린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아무것도 무너진 것 없이, 예전의 것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으면서, 예전의 삶이 번창하고 번영하기를 바라면서, 그것을 구원이라고 은혜라고 착각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나는 이제 죽게 되었구나’ 하면서 엎드러지는 철저한 회개의 무너짐은 없이,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서 “나를 보내주십시오. 내가 갈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성공하고 싶습니다. 그곳에서 승리하고 싶습니다.” 그런 식의 ‘나를 보내소서’는 아니올시다입니다.

복음서 말씀 중에,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자가 돌을 던져라” 하시니까, 하나둘 부끄러워 떠나고 맙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너희는 심판하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는다.” 우리의 시선은 심판을 향하고 있고 심판에 고정되어 있어요. 그런데, 주님의 시선은 심판이 아니라 심판 이후의 구원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십니다. “내가 심판하면 그 심판은 참되다.” 하나님의 심판이 죽이는 심판이 아니고 살리는 심판이기 때문에, 주님의 심판은 참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신앙의 목적이 목표가 살기 위한 것 아닙니까? 신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는 ‘아, 나는 죄인이구나.’ 하고서 벌 받고 죽어버리자는 것이 아니지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서, 회개함으로써 그 두려움을 이겨내고, 의롭다함을 받아서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우리는 죄인입니다. 심판받았으니 죄인입니다. 그렇지만, 심판하신 바로 그 분이 용서하셨으니 우리는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의로운 자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죽어야 마땅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결코 죽지않고 영원히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사야처럼 하나님 앞에 엎드러지고 ‘내가 죄인입니다.’ 하고 무릎 꿇어야 합니다. 완전히 무너져서, 완전히 부서져서 엎드려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너를 정죄할 사람 아무도 없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이제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구원의 음성, 새 생명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너는 혼자가 아니다. 너는 죄인이 아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

5.

그때 비로소 우리 앞에 새 세상이 열리게 됩니다. 이사야는 새로운 음성을 듣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까?” 이 음성은 하나님의 독백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아무나 듣는게 아닙니다. 내 안의 거짓된 내가 무너지고, 내 안에 하나님의 마음으로 새롭게 세워질 때, 그때 하나님의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십시오.” 이 말은 결코 영웅적인 결단이 아닙니다. 우리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도 돼서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내가 맡아서 하겠다고 지원하고 나서는 그런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은 어쩔 수 없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정의, 하나님이 이루시는 구원, 그 길에 하나님과 하나 된 나도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고백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그 길이 십자가의 길로만 보이고 고난의 길로만 보여서, 두렵고 피하고 싶지만, ‘주님 가시니 나도 갑니다.’ 하는 것입니다.

두렵다고 했지만, 사실 두려울 것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갑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이 가시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었으니 우리도 덩달아 가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내가 나서서, 내가 가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실은 가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일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 웃시야 왕은 심판의 죽음을 죽었지만, 우리는 스스로 회개하고 주님 앞에 무릎 꿇어 무너져서, 새롭게 태어나는 구원의 죽음을 죽읍시다. 그리고 하나님과 하나 되어서 하나님 가시는 그 구원의 길에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 주소서.” 기쁨으로 함께 따라나섭시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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