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민중신학을 보다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확장한 학자였습니다”<황성규 교수 추모예배> 추도사
김명수(심원기념사업회전회장) | 승인 2023.11.02 02:02
▲ 고 황성규 한신대 명예교수는 안병무 교수를 이어 민중신학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의 역작인 《예수운동과 갈릴리》

1970년 11월 13일, 제가 대학 3학년 때였습니다. 청계천 피복노동자였던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焚身事件)이 터졌습니다. 자기 몸을 불살라 고난받는 노동자들의 제단에 바친 전태일의 살신성인(殺身成仁) 사건은, 당시 한국사회의 ‘행동하는 양심’ 세력과 기독교 비판지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적 불평등 해소와 민주 실현에 대한 열망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이슈로 떠올랐습니다.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을 아우르는 민중의식(民衆意識)이 사회적으로 표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국기독교는 KNCC를 비롯하여 한국교회는 복음과 신앙의 정체성(identity)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전태일은 저와 동갑내기였습니다. 그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은, 저 개인에게 인생 방향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는 전기(轉機)로 작용했습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1년 동안, 앞으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인생의 방향 문제를 놓고 치열한 내적 투쟁을 벌였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공학에서 신학에로”, “엔지니어에서 목사에로”인생의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1972학년도 봄, 저는 수유리에 있는 한국신학대학에 편입했습니다. 캠퍼스에서 안병무 선생님과 황성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두 분 선생님을 만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두 분 선생님은 저에게 메시아로 추앙받는 예수를 새롭게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저에게 자애로운 아버지 같은 분으로 기억되고 있지만, <헬라어 문법>과 <신약성서개론> 등 신약성서 기초과목을 자상하게 가르쳐주신 황성규 선생님은 학생들의 성장통(成長痛)을 어루만져주신 어머니 같은 분이셨습니다. 독일유학 후, 신학교 강단에 서게 되면서,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이 두 과목은, 제 인생을 살아가는 데 기본이 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주었습니다. “밥 문제”와 “자아실현 문제”가 그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 반(反)유신 민주화 학생운동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제가 4년 반 동안 옥고를 치르는 동안, 두 분 선생님께서는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두 분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저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내 평생의 화두(話頭)로 삼아 연구생활을 해왔습니다. 이에 관해서 20권 이상의 저서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017년 3월 30일, 오랫동안 진행된 재심재판 과정을 거쳐 저는 대법원에서 무죄확정 판결을 받았습니다. 평생 동안 목에 걸고 다녀야 했던 주홍글씨였던 간첩누명을 완전히 벗게 된 것입니다. 실로 42년 만이었습니다. 그 날은 추웠습니다. 헌데도, 황성규 선생님은 노구를 이끌고 재판정까지 나오셨습니다.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김 목사, 고생 많았어. 하늘에 계신 안병무 선생께서도 오늘을 기뻐하실꺼야!” 하며 해맑게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대표 저서인 《예수운동과 갈릴리》를 통해서, 황성규 선생님은 스승의 민중신학을 보다 학문적으로 체계화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통시적(diachronic)이고 공시적(synchronic) 맥락에서 갈릴리인들의 예수운동을 새롭게 재구성했습니다. 구약시대 예언자들의 민중전통과의 신약시대 로마제국의 식민통치 하에서 고통을 당한 갈릴리민중 이야기의 합류(合流)를 통하여 민중 친화적(民衆親和的)인 예수운동의 성격을 새롭게 규명했습니다.

신구약성서 66권이 공(共)히 증언하고 있는 핵심줄거리는 무엇인가요? 바실레이아(basileia)입니다. 하나님통치입니다. 공정과 평화로 다스려지는 세상 건설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말했듯이, 일체의 차별이 철폐되고, 사회적 약자들도 기(氣)를 펴고 주인이 되어 사는 세상을 펼치는 것입니다.(갈라3:27-29) 모두를 이롭게 하는 대동홍익(大同弘益)의 하늘 뜻을 이 땅위에 펴는 것입니다.(마태6:9) 이와 같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꿈을, 선생님께서는 우리에게 전해주시고 떠나셨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사회적 불평등과 기후 생태적 불평등이 극단으로 치닫는 생태 묵시적 위기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예수의 꿈을 계승하여, 우리의 시대적 과업을 이루어가야 할 것입니다.

“만물은 하나님의 선물로 세상에 태어나, 하나님의 은혜로 존재하다가, 때가 되면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갑니다.”(로마11:36) 사도 바울이 로마교회 신도들에게 들려주신 만법귀일(萬法歸一)의 복음입니다. 선생님은 우리 곁을 떠나셨으나,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나님 품안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반짝이는 햇살로, 한 줄기 바람으로, 꽃잎에 맺힌 새벽이슬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수많은 별빛으로, 우리 곁에 계십니다.

상실감에 빠져있는 사모님과 유가족 여러분, 그리고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평화와 위로가 함께하시길 빕니다.

김명수(심원기념사업회전회장)  kmsi1204@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