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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지기여, 깨어있으라!(에 9:17-28; 계 12:1-12; 막 13:28-37)창조절 열셋째 주일(11월26일)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 승인 2023.11.24 00:56

1. 교회력과 세본문 설교

지난 2021년 9월 코로나 자가격리 기간 중 하나님께서 저에게 교회력과 성서일과(성서정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셔서 각 복음서를 중심으로 4년 동안 전체 신구약 성서를 다 살펴볼 수 있는 주일 성서일과를 만들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삼위일체 교회력을 중심으로 한, ‘최병학 목사의 그리스도론적 성서일과(CCL, Choi’s Christologic Lectionary, 2021)’입니다.

▲ 삼위일체 교회력의 7절기와 절기 색(윗 사진)과 기독론 중심 교회력의 6절기와 절기 색(아래 사진)

교회력 세본문 설교를 하면서 제가 느낀 것은 교회력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이든, 성자 예수님 중심이든 크게 이 두 가지 교회력을 중심으로 주일 성서일과, 곧 세본문 말씀(시편 포함 네 본문)은 다양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그렇고, 또 기독교는 말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특히 세본문 말씀은 구약을 통해 성부의 약속을, 복음서를 통해 성자의 성취를, 서신서를 통해 교회의 응답을 살펴봅니다. 삼위일체 교회력 세본문의 전체 구성입니다. 반면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은 비록 기독론 중심이지만 예수님을 통한 구약의 약속과 서신서의 교회 활동이 유기적으로 연결됩니다(결국 교회력은 삼위일체 교회력으로 가는 것이 성경을 입체적으로, 또한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CCL도 절기는 삼위일체 교회력 절기를 따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회력은 기독론 중심인 통상축제력의 단점을 개혁하며 나온 것이고, 주일성서일과에서도 통상축제력에 기반한 성서일과인 공동성서정과(Common Lectionary, 1983년)와 개정판 공동성서정과(The Revised Common Lectionary, 1992)보다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3년 주기의 성서일과의 틀을 잡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1960년대에 삼위일체 교회력의 틀을 잡았으나 사용하지 않았고, 캐나다 연합교회가 1969년 이어받았으나, 이후 나온 RCL에 합류하였습니다(현재 영어권 나라들은 RCL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삼위일체 교회력의 방향이 좋다고 믿었고, 1979년 기장총회 새역사 25주년 기념총회에서 삼위일체 교회력을 채택하였습니다. 기장 교단은 기독론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교회력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동시에 창조절기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삼위일체 교회력에 있는 창조절기(9~11월)는 오늘날과 같은 기후 위기의 시대에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CCL은 삼위일체 교회력과 RCL의 장점을 취합한 교회력 성서일과입니다. 절기에 창조절을 넣고 삼위일체 신론 중심 교회력이며, 성서일과로는 네 복음서를 중심으로 4년을 한 주기로 전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교회력입니다. 이것은 RCL의 기독론적 관점을 취하되, 매년 돌아가는 절기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각 해의 주제를 ‘가’해는 마태복음 중심 ‘생명의 하나님’, ‘나’해는 마가복음 중심 ‘평화의 예수님’, ‘다’해는 누가복음 중심 ‘정의의 성령님’, 마지막 ‘라’해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회 공동체라는 주제로 주일 세 본문 말씀이 구성됩니다. 시편은 교독문으로 읽기에 넣지 않았습니다(이는 CCL의 약점이기도 하나, 이후 시간이 된다면 150편 시편을 4년 주기로 앞의 세본문과 연결되도록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CCL에 따르면, 다음주 대림절기부터 복음서가 ‘다’해인 누가복음으로 바뀌지만(원래는 하나님의 천지 창조가 시작이기에 창조절부터 한해가 시작되며 기준이 되는 복음서 말씀이 바뀌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대림절부터 절기 설교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번 주는 마가복음으로 설교하는 마지막 주간입니다. 이렇게 한 해 동안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평화의 예수님에 초점을 맞추어 구약과 서신서 등, 세 본문 말씀을 살펴보았는데, 평화의 예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참 평화를 주셨기를 소망합니다.

2. 창조주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의 말씀

오늘 세본문 말씀은 창조절기 마지막 주일 말씀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은 이스라엘의 부림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부림절의 ‘푸림’은 히브리어 푸르의 복수 형태로써 ‘제비 뽑다’는 의미의 아카드어에서 온 단어입니다. 이 절기는 고대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에스더 3장 7절에 의하면, 하만은 제비를 뽑아 유대인들을 살해할 달로 아달월(Adar, 유대인들의 종교력에서 열두 번째 달인 12월, 이때 총독 스룹바벨이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끝마쳤다. 그러나 현재 태양력으로 하면 3월)을 얻었고, 그달 13일 하루 동안 페르시아 제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유대인을 살해할 음모를 꾀하였습니다. 하지만 극적인 반전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하만은 죽임을 당하고, 반면 살해당할 위기에 빠진 유대인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하는 날이 부림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아달월 14일과 15일 이틀간을 부림절로 지킵니다. 이것은 구약 말씀의 마지막 구원 말씀이고 신약의 마지막 구원은 요한계시록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계시록은 ‘하늘의 전쟁(계 12:7-9)’과 ‘용의 패배를 축하하는 하늘의 예배(계 12:10-12)’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비록 용과 두 짐승으로부터 고난을 겪지만, 하늘의 예배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에스더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마지막 구원을 소개합니다.

따라서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날을 위하여 늘 깨어있으라고 말씀합니다. 특히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 마지막 날이 임박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마지막 날은 유대인만이 아니고, 또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입니다. 먼저 구약 말씀부터 볼까요?

3.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

“아달월 십삼일에 그 일을 행하였고 십사일에 쉬며 그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겼고 수산에 사는 유다인들은 십삼일과 십사일에 모였고 십오일에 쉬며 이날에 잔치를 베풀어 즐긴지라. 그러므로 시골의 유다인, 곧 성이 없는 고을고을에 사는 자들이 아달월 십사일을 명절로 삼아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더라.”(에 9:17-19)

앞서 말씀드린 대로 부림절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날이기에 잔치를 베풀며 즐깁니다. 사실 부림절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유대인들이 지켜야 할 세 절기인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하누카(수전절, 성전을 수리한 명절)와 더불어 이스라엘 내외 모든 유대인이 기쁨으로 지키는 국가적 명절입니다. 물론 율법이 정한 절기가 아니기 때문에 부림절에 일하고 물건을 팔고 사도 율법을 어긴 것은 아닙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모르드개가 이 일을 기록하고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모든 유다인에게 원근을 막론하고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십사일과 십오일을 지키라. 이달 이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에 9:20-22)

▲ 피터르 라스트만 <모르드개와 하만>

구원받은 날인데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것은 당연한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고 합니다. 기쁨을 나누라는 것이죠? 이후 말씀은 다시 한번 부림절의 시작을 설명합니다.

“유다인이 자기들이 이미 시작한 대로 또한 모르드개가 보낸 글대로 계속하여 행하였으니, 곧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모든 유다인의 대적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를 꾀하고 부르, 곧 제비를 뽑아 그들을 죽이고 멸하려 하였으나, 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에 9:23-28)

이렇게 페르시아 시대에 아각 사람 하만이 유대인들을 살해하려던 음모에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을 기념하는 절기가 부림절입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그림을 보면, 하만이 모르드개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부럽고 두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악에 대한 승리, 믿음의 승리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마귀인 용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승리의 기쁨을 노래하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이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고난받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3. 열두 별의 관을 쓴 임신한 여자와 일곱 왕관을 쓴 용의 대결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를 쓰며 부르짖더라.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데, 그 꼬리가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천이백육십 일 동안 그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계 12:1-6)

요한계시록 12장부터 15장 4절까지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중심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하늘의 전쟁(계 12:7-9)’과 ‘용(龍)의 패배를 축하하는 하늘의 예배(계 12:10-12)’에 관한 말씀입니다.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비록 용과 두 짐승으로부터 고난을 겪지만, 하늘의 예배에 대한 환상을 통해서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힘과 용기와 희망을 얻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에서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본 두 가지 이적에 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해산하는 여인이며 다른 하나는 용에 관한 환상입니다. 처음 환상의 한 아름다운 여자는 머리에 열두 별이 있는 관을 쓰고 해를 입고 달을 밟고 서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열두 별이 있는 관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합니다. 사실 요한에게 기독교 공동체의 뿌리는 열두 지파를 가진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따라서 아름다운 여자는 메시아를 대망한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서 산출된 기독교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이 여자가 해산의 진통 때문에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것은 로마 제국으로부터 박해와 환란을 당하고 있는 소아시아 교회들의 현재 상황을 비유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두 번째 환상의 용은 해산하는 여자와 대조됩니다. 구약성서와 유대 묵시 문학에서 용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됩니다. 가령 용은 에덴동산의 사탄과 동일시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을 대표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적하는 용이 꼬리로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졌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반대하며 그분의 창조 질서를 깨드리는 오만한 행위입니다(창 1:14-18). 사실 유대 묵시 문학에서 하늘의 별들은 억압자들에게 학살당한 의인들을 상징하는데(에녹1서 46:7), 용이 하늘의 별 삼 분의 일을 떨어뜨렸다는 것은 억울한 죽임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를 경멸하는 용의 오만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 오만한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여인이 해산하면 아이를 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위험한 상황에서 태어나는 수난당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험한 상황에서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여자가 낳은 아이가 바로 세계를 다스릴 메시아, 아기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무력한 여자에게서 태어난 아이는 하늘의 보좌 앞으로 이끌려 올라갑니다. 따라서 이 아이를 삼키려고 했던 용의 시도는 하나님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이신 아이 예수님은 하늘의 보좌 위에 앉아서 메시아의 권세를 행사합니다.

6절 말씀에 보면, 여자가 광야로 도망갔다고 합니다. 이 광야는 소아시아 일곱 교회가 서 있는 장소를 상징합니다. 일곱 교회는 각기 척박한 광야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고 양육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렇게 곤경에 처한 자들을 도와주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양육 기간이 1,260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기독교 공동체를 지금부터 종말의 날까지 보호하고 지켜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숫자가 상징하는 것을 잘 읽어내야 합니다. 가령 1,260일은 3년 6개월입니다. 개월 수로는 42개월입니다(42×30일=1,260). 3년 반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인 7의 절반으로 제한된 시간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42라는 숫자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42곳에 진을 치면서 이동했던 사실에서 유래합니다(민 33장).(1)

▲ 출애굽 여정 42지점(주요 부분만 표시, 윗 사진)과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 42대(아래 사진)

이러한 1,260일 또는 42개월은 소아시아의 교회들이 사탄의 조정을 받는 로마 제국의 유혹과 압제에 맞서 싸우면서 증언하는 현재의 시간을 상징합니다. 이 기간은 짐승이 권세를 가지고 악행을 저지를 기간과 동일합니다.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 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계 13:5).” 계속 말씀을 볼까요? 이어지는 말씀은 하늘의 전쟁에 관한 말씀입니다.

“하늘에 전쟁이 있으니,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더불어 싸울새, 용과 그의 사자들도 싸우나, 이기지 못하여 다시 하늘에서 그들이 있을 곳을 얻지 못한지라.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 그가 땅으로 내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그와 함께 내쫓기니라.”(계 12:7-9)

미가엘은 하늘 군대의 사령관입니다. 미가엘과 용의 싸움은 역사의 심층적인 차원을 상징하는 하늘에서 일어나는 전쟁입니다. 이 전쟁에서 미가엘의 군대가 승리합니다. 따라서 용과 그의 군대는 더는 하늘에 거주할 곳이 없습니다. 또한 용은 패배함으로써 그가 가지고 있던 영적인 힘을 빼앗겼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땅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들은 남아 있는 불완전한 힘을 가지고 성도들을 미혹하려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통해 이 미혹을 이길 수 있습니다(엡 6:11).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은 용의 패배를 축하하는 하늘의 예배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나타났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에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0-12)

하늘의 예배에서 하늘에 살아 있는 순교자와 죽은 성도들은 큰 음성으로 용의 패배와 추방을 축하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노래의 내용을 살펴보면 1세기 로마 제국에서 통용되었던 많은 정치적인 용어들이 사용됩니다. 가령 구원(σωτηρία), 능력(δύναμις), 나라(βασιλεία), 권세(ἐξουσία)가 그렇습니다.

가령 소테리아는 로마 황제가 베푸는 안전, 복지, 구출을 의미하며 두나미스는 로마 제국의 막강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을 의미합니다. 바실레이아는 영원히 지속될 것으로 선전된 로마 제국을 뜻하며 엑수시아는 로마 황제의 신적 권위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용의 세력을 정복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권세를 찬양하는 이 노래와 예배는 1세기 말엽 소아시아 그리스도인들의 반제국적 의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동일한 역사의 모순 속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대의 징조를 읽고 말씀이 상징하는 비유의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은 결국 깨어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을 볼까요?

4. 깨어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28-32)

임박한 재림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고 창조주 하나님만 아십니다. 계속 말씀을 볼까요?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그러므로 깨어있으라. 집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깨어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막 13:33-37)

집을 맡긴 집주인의 비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문지기로 파송 받았습니다. 집주인이 언제 오실지 모르기에 늘 깨어 하나님의 집인 이 창조 세계가, 그리고 우리 인간 세상이 그리스도의 평화로 보전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 세계 질서와 평화를 파괴하는 저 사탄의 무리인 용과의 질 수 없는 싸움에서도 계속되어야 합니다.

왜 용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질 수 없나요? 왜냐하면 오실 아기 예수께서 장차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음주부터 대림절기가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께서 오십니다. 지금 세상은 전쟁과 기후 위기로 종말의 때를 보여줍니다. 욕망의 바벨탑이 양극화와 혐오, 차별을 양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용과같이 교만한 자와 권세 있는 자들, 곧 로마 제국을 무서워하지 말고 큰일을 행하시는 분, 구원을 베푸시는 분,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분의 나라가 영원함을 믿고 오직 그리스도의 평화를 증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미주

(1) 이스라엘 백성들의 여정은 42지점(라암셋 → ① 숙곳, ② 에담, ③ 믹돌 앞(홍해 도하), ④ 마라, ⑤ 엘림, ⑥ 홍해 가, ⑦ 신 광야, ⑧ 돕가, ⑨ 알루스, ⑩ 르비딤, ⑪ 시내 광야, ⑫ 기브롯 핫다아와, ⑬ 하세롯, ⑭ 릿마, ⑮ 림몬베레스, ⑯ 립나, ⑰ 릿사, ⑱ 그헬라다, ⑲ 세벨산, ⑳ 하라다, ㉑ 막헬롯, ㉒ 다핫, ㉓ 데라, ㉔ 밋가, ㉕ 하스모나, ㉖ 모세롯, ㉗ 브네야아간, ㉘ 홀하깃갓, ㉙ 욧바다, ㉚ 아브로나, ㉛ 에시온게벨, ㉜ 가데스, ㉝ 에돔, ㉞ 살모나, ㉟ 부논, ㊱ 오봇, ㊲ 이예아바림, ㊳ 디본갓, ㊴ 알몬디블라다임, ㊵ 아바림 산, ㊶ 모압 평지 등을 거쳐서 좋은 땅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비슷한 예로, 이스라엘 족보에서 보면,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가 42세대로 나옵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애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마 1:17).”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좋은 땅으로 인도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상징이 바로 42입니다.

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hak-9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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