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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아닌 바로나를 위해 누가 죽을까?(요한복음서 11:47-53)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1.26 02:49
▲ Valentin de Boulogne, 「Abraham Sacrificing Isaac」 (ca. 1629–32)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search/663875

1.

남아메리카에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아즈텍 문명이 있었습니다. 역시 남미에 있었던 잉카 문명, 마야 문명과 함께 16세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인들에 의해서 안타깝게도 멸절되었습니다. 아즈텍 사람들은 해를 숭배했습니다. 해는 모든 만물을 생겨나게 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낮에는 뜨겁게 불타오르는 해가, 밤만 되면 죽어서 없어지는 것입니다. 아즈텍 사람들은 이 신을 살려내려면, 사람을 죽여서 그 붉은 심장을 바쳐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누구를 바쳐야 합니까? 자기 가족, 자기 부족을 바칠 수 없으니까, 서로 이웃 부족을 공격해서 포로를 잡아갑니다. 수십 명, 수백 명을 이웃에서 잡아와서 모조리 제물로 바치면서, 우리를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이 무서운 종교의례를 치르느라, 전쟁과 공포에 시달리다가 파멸한 것이 아즈텍 문명입니다.

종교학과 고고학의 도움을 받아서 살펴보면, 인류의 종교들은 항상 신에게 제물을 바쳤습니다. 인류가 탄생하고, 종교의식을 가지게 된 이래로, 항상 우리 사람들은 신에게 희생제물을 잡아 바치는 의식을 해왔습니다. 아즈텍 사람들처럼 사람도 바치고, 동물도 바치고, 온갖 것들을 바쳐왔습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은 신에게 제물을 바쳤을까요? 가장 원초적인 이유는 나 자신의 안전을 추구하고, 나아가서 풍요와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막강한 힘을 지닌 신에게 제물을 바쳐서 그 마음에 들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부하는 것이지요. 언제 신이 화를 내고 진노하고 세상을 향해서 폭주할지 모르니까, 그 때가 되면 나는 좀 봐달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런 강력한 신이 나를 잘 봐줘서 나에게 비도 내려 주고, 햇빛도 내려 주고, 열매도 맺게 해주고, 고기도 잘 잡히게 해주고, 아이도 많이 낳게 해 주고, 그렇게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안전과 나의 풍요와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 나 아닌 누군가, 나 아닌 무언가를 신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

2.

우리 그리스도교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 종교는 그런 물질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물질적인 생사화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행복이라고 하는 새로운 차원을 고민합니다. 올바른 삶이 무엇이냐, 어떻게 사는 것이 선한 것이냐 하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용어로 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종교가 된 것입니다.

성경통독을 할 때 제일 힘든 책이 어디죠? 레위깁니다. 그 레위기의 말씀을 보면, 속죄제라고 하는 제사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속죄제는 희생제사입니다. 곧 자기 죄를 벗어버리는 속죄의 수단으로서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나 죄에 대해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야 도덕적이고 정신적으로 행복해집니다. 그런데 그 죗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놓을 수는 없으니까, 대신 양이나 소와 같은 동물을 속죄 제물로 바쳤습니다. 구약의 종교가 바로 이런 속죄종교입니다.

물질적인 생사화복을 위해 제물을 바치는 다른 종교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신 앞에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면에서는 조금 발전해 왔지만, 바라는 것을 이루어가는 방법에서는 여전히 옛날 그대로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 나 아닌 누군가, 나 아닌 무언가를 신에게 바친다는 것입니다.

3.

하지만 잘 살펴보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다릅니다.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의 방향에 따라서 발전하고 진보하고, 쇠퇴하고 멸망하는 그런 종교들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차이, 그것은 바로 우리가 믿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종교 사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시는 그 길에 우리가 붙들려 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이 성장하고 진보해서 종교가 이렇게 저렇게 발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 신이신 하나님께서 마음에 품고 계신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해 가시는 그 섭리에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우리를 가르치시고 우리를 마침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쳐 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그 길이 조금씩 눈에 들어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냅니까? ‘이야, 아들까지 바치는 그 믿음이 대단하다!’ 아닙니다. 신의 명령이라면서 다른 사람을 죽이고, 그렇게 자기들 행복을 보장받으려던 천박한 종교의식을 끝장내 버리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제단 위에서 죽이려는 아브라함에게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십계명을 받습니다. 십계명과 함께 수많은 율법을 전해 받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냅니까? ‘와, 하나님은 참 까다롭다. 정말 사람 복잡하게 하네. 하나님 믿기 참 힘들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가르쳐 주신 것은 인간의 종교를 정신적인 종교, 윤리적인 종교,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로 한 단계 도약시키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축복에만 머물러 있는 천박한 종교를 끝장내 버리신 것입니다. 율법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거룩하게 살기 위해서 여러 가지로 힘들게 노력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가르침은 역사를 통해 계속 나아갑니다. 더 높은 차원으로 인류를 천천히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와 포로기를 거치면서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통해 새로운 차원으로 다시 한 번 도약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의례, 의식, 행위, 행동으로 성취하는 거룩함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거룩하고 존재 자체가 거룩해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나 아모스는 이렇게 외칩니다. ‘하나님은 제사상을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제사 제물을 달가워하지 않으신다. 다만 너희는 정의를 행해라.’ 예레미야와 요엘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을 찢지 말고, 너희는 마음을 찢어라! 그것이 참 회개다!’

4.

이런 하나님의 가르침이 예수님에 이르러 이제 그 절정에 달합니다. 예수님은 속죄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삶의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마가복음서에는 예수님의 진리선포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여라.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생명세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제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바쳐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복을 위해서 나 아닌 누군가를 희생하고 나 아닌 다른 것을 바치는 그런 삶에서 돌이켜서, 그것이 회개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 자신을 던져야 됩니다.

그런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구약의 희생제사와 관련해서 이해하려고 한 것이 히브리서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 옛 질서의 틀 속에 갇혀 있어요. 그래서 그 질서를 벗어나서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해요, 그래서 희생제사라는 전통적인 종교의례의 관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한번 완전한 제사를 드려버렸으니, 이제는 더 이상 제사나 제물이 필요 없게 되었다는 것을 전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벗기 위해 거듭거듭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과거의 죄를 씻고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과거를 어떻게 씻어낼 것이냐가 아니라, 지금의 재 그리고 미래를 어떻게 죄 없이 살아갈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삶의 모습은 그대로 놓아둔 채로, 이미 지은 죄를 어떻게 씻을까만 고민하는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한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 그 모든 속죄의 행사를 단번에 폐지시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매달려서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은 이제 모두 끝났다. 이제 새 세상, 하늘나라, 하나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어떻게 살아갈지 그것을 고민하자.”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뒤에 부활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것, 새롭게 주어지는 삶, 부활을 어떻게 살아갈까? 그것을 우리의 가장 큰 문제로 삼고 고민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종교자체는 이렇게 위대한데,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우리는 점점 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을 위대함을 옛날 인신제물을 바치던 시절, 속죄제 제사를 드리던 구약시절의 종교의식으로 퇴화시켜버리고 있습니다.

기껏 한다는 고백이 “내가 바쳐야 할 생명을 예수님이 대신 바쳤으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세요.” 이것입니다. 이게 뭡니까? 이것이 위대한 생명종교를 믿는 우리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이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를 대신해 죽어 줬으니 감사합니다?’ 이것은요, 처음에 말씀드린 아즈텍 사람들이나, 가나안 우상숭배자들이나 하나 다를 바 없는 태도입니다. 구약시절 속죄제와 똑같습니다. 어차피 다른 부족 사람들 잡아와서 바치면 될 것을 황송하게도 예수님을 바쳤을 뿐입니다. 송아지, 염소, 양, 비둘기로 바쳐도 될 것을 황송하게도 예수님을 바쳤을 뿐입니다. 매년마다 죄를 지을 때마다 그때그때 바쳐야 될 것을 번거롭지 않게 한 번에 다 끝내주셨으니 편해졌을 뿐입니다.

5.

오늘 요한복음서를 보시면,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가 나오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자는 결의를 합니다. 예수를 그냥 두면 유대사회의 질서가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만 죽이면 우리 민족 전체가 사는데, 그게 유익한 것 아니오?” 복음서의 기자는 이 말을 우리 모두를 위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속죄로 해석해 놓았지만, 가야바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닙니다. ‘이 사람 하나만 죽이면 우리는 모두 산다’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나의 구원, 그것을 고백하는 것은 매우 훌륭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만 머물러 있고, 그것만이 목적이 되면 그 훌륭함은 금세 빛이 바래버립니다. 그것은 더 이상 아름다운 신앙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내가 또 속죄 받아야 하니까 나를 위해서 또 죽으셔야겠습니다.’ 하는 협박에 불과합니다. 가야바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를 구원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감사하고 새 삶을 살고 영원한 삶을 사는 것 아닙니까? 맞습니다. 문제의 열쇠가 바로 그 새 삶에 있습니다. 새 삶은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우리에게 허락됩니다. 옛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새 삶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 교회 잘 다니고 신앙생활 잘 하다가 죽으면 나중에 부활합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그런 것 아닙니다. 부활하시는 분은 단 한 분 주님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주님만이 부활하십니다. 왜 부활하십니까? 죽으셨기 때문에 부활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렸기 때문에 부활하십니다. 제 목숨 살아보겠다고 남을 십자가에 매달기만 해서는 결코 부활하지 못합니다. 옛날 죄를 씻어보겠다고 희생제물 아무리 바쳐봐야 결코 부활하지 못합니다. 그 어떤 것을 바쳐도 부활하지 못합니다. 살진 염소, 송아지, 황소가 아니라, 코끼리를 바치고 공룡을 가져다 바쳐도 우리는 부활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해야 부활합니다. 단 한 가지,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야만 부활합니다.

나의 입장에서만 십자가를 보면, 주님의 십자가는 나를 위한 대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십자가를 보면, 십자가는 너를 위한 나의 희생입니다. 똑같은 말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전혀 다른 말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셨구나’가 아니라,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다’ 입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죽었다’ 하시는 말씀을 그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이 되어 이제는 우리가 우리 입으로 그 말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를 위해 내가 죽었다’ 하시는 말씀은 ‘그러니까 나에게 감사해라’가 아니라, ‘너희도 십자가에 달려라. 그래야 산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부활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적이 아닙니다. 지금 살아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살아있는 자에게 ‘그리스도처럼 죽어라’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대로 그렇게 죽어야 부활입니다.

이것은 비유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산다는 것은 몸뚱아리가 숨 쉬는 것이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해 내야 그래야 사는 것입니다. 모든 세상을 사랑하고 품어내는 그리스도가 되어야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되어서 세상을 살려야 비로소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신성모독적인 말이 아닙니다. 어떻게 감히 인간이 신이 됩니까? 될 수 없지요. 그렇지만 분명히 주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가 되어보아야,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보아야, 나를 십자가에 매달고 누군가를 살려보아야, 그래야 비로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느냐? 세상을 바라보면서 ‘누구를 죽여야 내가 살까?’ 하고 있느냐? 아니면 ‘내가 죽으면 누가 살 수 있을까?’ 하며 살려낼 사람을 찾고 있느냐?”

6.

예수님의 십자가는 진실로 생명의 문입니다. 이 십자가는 이 땅에서 억울하게 고난 받는 희생양들을 찾고 부르고 끌어안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또한 이 십자가는 나를 희생양으로 드려서, 모든 폭력과 악행을 끊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우치고, 그 십자가의 길에 들어서고, 그리스도의 길을 걸어가게 되면, 우리 인생에서, 그리고 이 세계에서 폭력은 사라지고, 평화와 생명의 새 역사가 열릴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는 모든 사람이 이 땅의 예수입니다. 그들이 참 교회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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