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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였다정의로운 평화의 왕(스가랴 9:9~10)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12.06 02: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새기며, 오신 그날을 예비하는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스가랴서의 본문 말씀은 정의로운 평화의 왕이 오시어 펼쳐질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같은 스가랴서이지만, 사실은 이전의 8장까지의 내용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포함한 9장 이하의 말씀은 그 분위기가 전혀 다릅니다. 앞의 내용이 바빌론 포로로부터 해방된 직후 새로운 이스라엘 공동체를 재건해야 하는 상황에서 선포된 말씀이라면, 9장 이하의 말씀은 모든 역사적 희망이 사라진 이후 상황에서 전혀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이미 보아 왔고 경험했던 그 어떤 것에 기대하는 마음은 사라졌고,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 시작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에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에도 희망을 기대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왕이 오십니다. 그 왕은 겸손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그렇게 겸손한 모습으로 오시지만 그분이 이루시는 일은 놀랍습니다.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을 꺾습니다. 그분은 온 땅에 평화를 선포하고 그분의 다스림은 땅끝까지 이릅니다.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마침내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포합니다(마태 21:1~11; 마가 11:1~11; 누가 19:28~38; 요한 12:12~19).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스가랴의 그 예언처럼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사람들은 ‘호산나!’ 외치며 그리스도 예수를 환영합니다.

나귀를 탄 왕, 과연 어떤 분일까요? 성서에 그와 같이 예언되었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와 같은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고 전하고 있기에 우리는 의당 그러려니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상상해보기 바랍니다. 어린 나귀를 탄 왕의 모습에 어떤 위엄이 있었을까요? 어린 나귀를 탄 왕은 위엄 있는 존재로서 왕의 모습은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희극적인 장면일 수도 있습니다. 결코 위풍당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왕다운 행차라기보다는 평범한 민중들의 거동을 닮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먼 옛날 한때 나귀가 지체 높은 사람들이 타는 짐승으로 여겨진 적이 있습니다(사사 5:10; 10:4; 12:14; 삼하 19:26). 그러나 이미 오래 전에 왕이 타는 짐승은 말로 바뀌고 나귀는 보통 사람들이 타거나 짐을 실어 나르는 짐승으로서 몫을 맡았습니다(왕상 10:28; 예레 17:25; 잠언 21:31). 나귀는 그 어떤 권위를 나타내거나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위엄이나 효과적인 전쟁 수행과는 상관없이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 삶을 거드는 몫을 맡은 짐승이었을 뿐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메시아는, 구원을 기대하는 사람들에게 다가오는 그 메시아의 참모습을 상징합니다. 그 메시아는 결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힘으로 세계를 호령하고 지배하는 권력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구원을 열망하는 바로 그 사람들에게 가장 친근한 존재, 그들의 필요와 희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존재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분입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세상을 평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에브라임에서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에서 군마를 없애며, 전쟁할 때 쓰는 활도 꺾으시는 분입니다.

평화를 말하지만 사실상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망에 불타는 이들은 더 많은 병거와 더 많은 군마와 더 많은 활을 원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땅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며 살아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병거와 군마와 활은 그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절망에 빠트릴 뿐입니다. 나귀를 타고 오시는 평화의 왕은 그 허망한 환상에 마침표를 찍고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분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예언한 평화의 왕은 구약성서에서 전해지고 있는 두 가지 메시아상이 절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두 가지 메시아상이 어떤 것일까요? 하나는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이며, 하나는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입니다.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는 탁월한 능력으로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일거에 해결해주는 통치자입니다.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는 사람들의 고통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몸소 그 고통을 겪는 분입니다.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고통스러운 삶의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극대화된 희망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누군가가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의타성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기대는 수시로 오용됩니다. 권력자들이 백성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명분으로 오용됩니다.

반면에 고난의 종으로서 메시아에 대한 기대는 철저하게 자각적이며 자기성찰적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알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그 어떤 능력자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수는 없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우리의 고통을 몸소 공유한 이만이 우리와 더불어 고통을 이겨내도록 이끈다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것은 고통을 겪는 당사자의 각성과 의지를 나타냅니다.

▲ 이 땅의 가치관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평화를 위해 오신 왕, 그리스도 ⓒGetty Images

스가랴가 선포한 메시아의 모습은 그 두 가지 메시아상을 동시에 겹쳐놓고 있습니다. 민중의 고통을 헤아리고 공감하며 통치하는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메시아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 메시아는 당당한 통치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그 바탕은 철저하게 수동적입니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소극적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근본적인 적극성을 나타냅니다. 정의로 평화를 열 그 위대한 통치자는 두 가지 면에서 수동적입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에 대해서요, 두 번째는 백성에 대해서입니다. 하늘의 뜻을 받들며 백성의 뜻을 받든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정의로운 평화의 왕의 근본입니다. 그것이 통치자를 진정으로 당당하게 만드는 조건입니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9절). 이 말씀 가운데 그 의미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라는 번역은 의역입니다. 원문은 ‘구원받은 자’, ‘도움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자, 곧 하나님에게 인정받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 왕은 어떤 정치력이나 군사력으로 권력을 쟁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를 도왔기에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그렇게 도움을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합니다. ‘구원을 베푸는 왕’이라는 번역은 그 의미를 새긴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자의 마땅한 역할이 무엇일까요? 어떻게 구원을 베풀까요? 우선 백성과 자신을 일치하는 것입니다. 백성의 뜻을 받드는 것입니다. ‘그는 온순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이 말씀에 그 뜻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백성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늘의 뜻을 받들고 백성의 뜻을 받들어 펼치는 구원의 행위가 무엇일까요? ‘병거를 없애고, 군마를 없애며, 활을 꺾으며 이방 민족들에게 평화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온 세상에 평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도마복음서를 공부하면서 빛의 자녀라는 진실을 어떻게 입증하느냐는 물음에 ‘움직임과 쉼’이야말로 그 증거라는 예수님의 답변(도마 50)의 의미를 함께 나눴습니다. 그 대답만큼 명쾌한 선포입니다.

스가랴의 이 예언이 선포된 역사적 맥락을 생각하면 그 의미는 더더욱 놀랍습니다. 유다 왕국이 강대국에 의해 멸망 당하고, 바빌론에서 포로 생활까지 경험하고 난 이후의 선포입니다. 새로운 제국 페르시아의 관용 정책에 따라 해방된 이후 처음에는 공동체의 회복에 대한 기대가 높았습니다.

그 기대마저 쉽사리 이뤄지지 않은 절망적 상황 가운데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부국강병의 길이야말로 민족 공동체의 보존을 위한 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던 바로 그 시기에 선포된 말씀입니다. 마치 김구 선생이 해방직후 새로운 조국의 이상을 선포한 것과 통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역사적 상황에 대한 근본적 통찰을 함축합니다. 그야말로 보편적인 세계정신이 움텄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오늘 본문 말씀의 의미는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강대강의 정치군사적 대결의 논리가 지금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습니까? 남북간에 철거했던 군사시설이 복구되고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펼쳐지고 있지 않습니까? 막대한 국민 세금을 쏟아가며 펼친 외교정책의 결과는 과연 무엇입니까? 일하는 사람들의 생명과 안전, 정당한 권리를 보장하는 법률은 폐기되고 있습니다.

평화도, 민주주의도, 인권도, 일상의 삶을 떠받치는 경제도 모두 뒷걸음치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뼈저리게 체험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을 저버리고 백성의 뜻을 저버린 통치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절감하고 있습니다.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 “그는 온순하셔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새기는 것은, 그 허황한 평화를 주장하며 평범한 사람들을 불안과 고통 속으로 내모는 세력을 단호히 거부하고, 저마다의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오신 의미를 다시 새기는 대림절에, 우리가 그 믿음으로 진정한 평화를 향한 희망의 의지를 더욱 굳게 다지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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