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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지 않는 비움높여진 그 사람(빌립보서 2:5-11)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2.10 03:36
▲ 비어 있지만 공허한 것은 아닌 자기비움 ⓒGetty Images

1.

엘리야회의 아름다운 찬양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리라고 믿습니다. 우리 엘리야회 찬양만큼이나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악기들이 있습니다. 그 종류에 따라서 다르겠습니다만, 대부분 악기들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원리를 공명이라고 말합니다. 울림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울림을 공기 중으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예배를 시작할 때 우리는 징을 울립니다. 징소리가 여운을 남기며 길게 이어지는 것은 징 뒤편에 비어있는 공간을 소리가 돌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냥 쇳덩이를 때린다면 둔탁한 소리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쇳덩이를 다듬어 텅 빈 공간을 만들면, 겉으로는 아무런 의미 없어 보이는 그 공허한 공간이 가장 중요한 공간이 되어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얼마나 잘 비워내느냐가 징의 소리를 결정합니다. 어떻게 아름답게 공간을 비워내느냐가 징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징의 모습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 비워진 곳, 바로 비움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도 이 비움이 있습니다. 이 비움을 신학적으로는 ‘케노시스’라고 그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의 본문을 흔히 ‘그리스도 찬가’라고 부르는데, 이 그리스도 찬가가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론을 ‘케노시스 기독론’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은 “너희 가운데서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에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대림절에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깊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가장 위대함은 섬김에서 나옵니다. 가장 위대하고 존경을 받는 것은 자기 비움과 낮아짐, 겸손과 섬김에서 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2.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님은 주님이 우리에게 세 가지 방법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 세 가지 방법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말씀’과 ‘성례전’과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 안에 계시하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 걸어 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함으로서 우리는 주님 안에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말씀에 응답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고 책임적인 존재가 될 때, 말씀은 역사 속에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로 살아 움직이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범죄 한 인간에게 ‘아담아, 어디 있느냐?’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형제를 살해한 가인에게 ‘네 동생 아벨이 어디 있느냐?’고 말을 걸어 오셨습니다. 그 말씀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은 이 땅과 상관없는 분이 되어버리기도 하고, 이 땅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땅에 현존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올바르게 응답하면 비로소 하나님이 이 땅에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례전을 통해 우리 안에 현존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성례전은 우리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몸과 피를 타자를 위해 줄 수 있느냐 하는 물음 때문입니다. 성례전은 그저 퍼포먼스인 것만이 아닙니다. 낮아짐과 비움과 죽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현재에 대한 물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지향하는가? 대한 물음입니다.

성례전은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입니다. 곡식이 빵이 되고 포도 열매가 포도주가 되기까지 짓이겨지고 으깨어지고 오랜 기간 숙성의 과정을 거칩니다. 그렇게 우리도 빵과 포도주를 거룩하게 우리 안에 모시면서, 우리도 말씀대로 성숙되기를 결단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빵과 포도주를 받는 순간 자신을 완전히 비우고 낮추고 겸허한 인간임을 성례전을 통해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실존하는 주님으로서 교회공동체는 매우 중요하다고 본 훼퍼 목사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중보하시는 분으로서 우리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본 훼퍼 목사님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나를 위한 존재”로 주님은 공동체 안에 현존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나를 위해, 역사를 위해 세상 모든 피조물 가운데 존재하시고 활동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대단하고 위대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마치 말구유에 탄생했듯이, 주님의 존재방식은 I’m nothing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나를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아무것도 아닌 모습으로 현존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온 세상 종교를 통틀어서 정말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모든 종교에서 신은 구원자는 아무것도 아닌 모습이 아니라, 가장 그럴듯한 모습으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영화로운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심지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우리 하나님을 그런 모습으로 바라봅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하나님은 결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우리 하나님을 위대한 하나님으로 찬양하지만,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 아니라, 초라하고 별볼일 없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나타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공동체 속에서의 하나님의 현현이 갖는 의미입니다.

3.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주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리는데요, 이 말씀은 철저하게 낮아지고 비움을 실천한 주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마음을 품으라’는 뜻의 ‘프로에오’라는 말은 본래 ‘생각하다. 몰두하다. 골몰하다’라는 말입니다. 예수에게 몰두하고 예수만 골똘히 생각하고 예수님에게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예수님에게 집중해야 할까요? 바로 그 이유가 오늘 본문의 7절부터 나오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모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은 성품과 본질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같은 권세와 권능을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항상 이 유혹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이브도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뱀의 꾀임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세계 패권을 쥐고 흔들던 왕들이 자신을 신격화 시키고 무소불능한 모습으로 되어보려는 것은 신과 같이 되려는 유혹 때문입니다. 이단 사이비 교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신을 신격화 시키는 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본질에 있어서, 본성에 있어서, 그 존재의 근본에 있어서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만 하나님을 닮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처럼 보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닮아서 하나님과 똑같은 그 마음을 지니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그 내용은 전혀 닮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내용은 상관없이 그 모습만 그럴듯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버려버렸다는 것입니다. 본질은 하나님과 한없이 닮았으면서, 하나님처럼 대접받지는 않으려 했습니다.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합니다. 본질은 하나님의 본질로 가득 채우고, 그 모습은 그 외향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종의 모습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주님, 온 땅의 지배자, 영광과 찬양 받으시는 분, 그런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닌 피조물의 모습으로, 총칼과 권력 아래 복종하는 모습으로, 비난과 멸시를 받는 모습으로 오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십자가가 그 모습의 상징이고, 오늘 마굿간 구유가 그 모습의 상징입니다.

이사야 42장을 보면,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계시하시고 있는데, 그 구원자의 모습을 전능하고 위대한 모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택한 사람, 내가 마음으로 기뻐하는 그는, 소리를 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거리에서 그 소리가 들리게 하지도 않는다(사42:1-2)”는 것입니다. 드러나지도 않게 비천한 모습으로, 겉모습으로는 아무도 그가 구원자인줄 알지 못하게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삶의 모습이 진리이며 공의이며 온 세상에 공의를 세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양식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7절의 자기를 비운다는 말은 원래 자기에게 돌아올 명성이 영광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NIV라는 영어성경을 보면 made himself nothing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가 되려고 발버둥 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큰소리 치고 싶어 합니다. 요즈음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누가 알아주기 전에 적극적으로 ‘나 이만큼 잘났다’고 자신을 알리고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비워내시고 낮아지시고 복종하시고 순종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라는 것은, 우리의 삶의 양식을 버리고, 바로 이런 예수님의 삶의 양식에 집중하고 이런 삶의 양식에 몰두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낮아질 수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까? 주님은 바로 이런 삶의 양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 곁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낮아 질 때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9절의 말씀은 놀라운 반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9절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비우고 낮추고 복종했더니 높이고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대 반전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자신을 낮추면 짓밟히고 무시당하고 실패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높이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낮추었더니, 복종했더니, 섬겼더니, 그랬더니 높아지고 뛰어난 이름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낮춤과 비움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요 반응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높이고 뛰어나게 하시고 모든 무릎을 그의 발아래 꿇게 하시고 저 밑바닥까지 낮아진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을 내 주인으로 모든 이들이 섬기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에서 한없이 낮아지는 한없이 비우는 십자가의 길과 그를 다시 높은 곳으로 올리는 대반전을 통해 부활의 역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이 빠진 신앙은 거짓 신앙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부활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승리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교회에게 바로 이런 종말론적인 궁극적인 승리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12절의 말씀을 마지막으로 나누겠습니다. 바울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두려운 것입니다. 구원은 떨리는 것입니다. 낮아져야 하기에 두렵습니다. 하나님의 모습이 아니라 낮고 낮은 종의 모습을 입어야 하기에 수치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입은 것은 종의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은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참 구원의 정체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입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의 구원입니다.

4.

예수님은 자기의 구원을 허름한 말구유에서 찾으셨습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런 십자가에서 찾으셨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을 시작하며, 저마다 자기의 구원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자랑할 만한 것 있을 때, 오직 하나님께만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오히려 이를 숨기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세와 권능을 가지고 오히려 낮아져 모든 이들을 섬기는 우리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높여지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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