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막상 믿지 못하는 것 중 하나나의 거처를 정하다(요한복음 1:14)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2.17 04:01
▲ Sieger Köder, 「Weihnachten」

1.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은 역사적인 사건과 경험을 통해 만난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고백하고 세상의 모든 것의 주권자이심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혹은 저 멀리 피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한 가운데로 개입하시고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로 만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임마누엘의 신앙이 나오고 성육신의 신앙이 나온 것입니다.

‘폴 틸리히’라는 신학자는 “모든 유한한 피조물들은 신을 떠나서는 잠시라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 역시 하나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조금 어려운 말이죠? 풀어 드리면 이렇습니다. 인간은 부족하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 자기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다면, 혹은 우리가 하나님을 떠난다면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은 거꾸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증거라는 말입니다. 임마누엘은 관념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공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기의 고마움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기는 내가 부정한다고 사라지고 내가 인정한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공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거합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하나님은 오늘도 내 삶 가운데 현존하고 계시고 역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공기는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인정하든지 말든지 그저 그곳에 존재해서 우리가 살아가는 일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는 것과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것은 삶 자체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한 인간으로 백 번을 태어난다고 해도, 그 아들이 내 영혼 안에 태어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2000년 전에 유대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오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을 넘어 그리스도의 탄생이 지금 나와 아무 관련이 없다면, 그저 옛날이야기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2.

오늘 읽은 요한복음의 본문이 우리에게 대단한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헬라 문화 안에 있던 사람들은 오늘 이 짧은 한 구절을 읽으면서 눈이 휘둥그레지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당시 헬레니즘 세계의 철학적인 상식과 종교적인 상식에 비추어볼 때 충격적인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헬라 시대에 로고스라는 것은 만물을 이성적으로 관철하여 지배하는 법칙이라고 보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본, 원칙, 법칙입니다. 로고스는 영원하고 선재하고 신적이고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반면에 육체는 ‘사르크스’라고 하는데 이것은 멸망하는 것이고 유한한 것이고 변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영원한 것과 유한한 것은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고 서로 합쳐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유일한 가능성은 유한한 것이 열심히 노력해서 무한한 진리를 흉내 내어보려고 노력할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이 플라톤의 이데아이고, 그리스로마신화의 변신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근본부터 뒤집어 놓고 있는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높아지려는 유혹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이 낮아지시고 자신의 거처를 가장 천한 낮은 자리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 양식 자체를 바꾸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를 버리고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영원한 진리는 이 땅의 변화하는 현상세계를 초월해 있어야만 하는데, 변화하는 것이 영원한 것이 되어 보려고 노력해야만 하는데, 거꾸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은 이런 존재의 변화를 더욱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짐승들의 거처인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3.

과연 하나님이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이것은 오랜 기간 교회사적으로 논쟁을 이어온 주제이기도 합니다. 철학적인 논리와 신화에 빠져있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성육신의 구원의 신비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이해의 바탕에 따라서 나름대로 이해해보려고 시도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에비온주의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을 철저하게 신봉하고 율법과 전통 위에 기독교를 세우려고 노력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철저하게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했습니다. 예수님은 매우 뛰어난 인간이어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양자로 삼았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청빈과 경건을 강조하며 율법대로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뛰어난 인간이 신이 될 수 있을 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입니다. 에비온주의가 율법을 앞세웠다면 영지주의는 지식을 앞세웠습니다. 그런데 이 지식은 일반적인 지식이 아니라 영적지식입니다. 하나님이 비밀스럽게 전해주는 영적 지식을 받은 사람만이 악하고 추한 육신의 세계를 벗어나서 아름답고 선한 하나님의 세계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영적 지식을 전해주기 위해 온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가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가현설이라는 것은 예수님은 가짜로 현현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진짜로 인간이 될 수는 없고 우리 눈에만 인간처럼 비쳐졌을 뿐이지 진짜 인간은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 십자가의 수난과 부활도 우리 눈에만 그렇게 보인 쇼에 불과하다고 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길게 했습니다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정작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다는 복음의 진리는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될 리 없다. 가짜로 인간인 척했을 뿐이다. 아니다. 잘난 인간이 신처럼 위대해진 것이다.’ 이런 식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정리하기 위해서 교회는 공의회라고 하는 전세계교회회의를 수 차례 열고 몇백년 간의 긴 논쟁을 거쳐 교리를 완성해 나갑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이해하기 어려운 파격적인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4.

하지만 하나님이 이 땅에 스스로 내려오신다는 것은, 사실 옛날 창세기 때부터 성서가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1장은 말씀으로 세상의 모든 만물이 창조되는 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창조는 ‘하나님이 말씀만 하시면 짠~! 하고 다 이루어졌다더라’ 하는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말씀으로 창조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능력이 이 땅에서 비로소 형상을 입고 실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똑같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시는 성육신이 완전해진 것이지만, 사실 성육신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줄기차게 이 땅에서 행하고 계신 구원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행하시는 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 구원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 하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하나님이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를 옮기셨다는 말씀입니다. 높은 자리에서 낮은 자리로, 영원한 것에서 유한한 것으로, 고상한 것에서 비천한 것으로, 깨끗한 것에서 더러운 것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면 어두움은 사라지고 찬란한 광명만이 존재하듯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있는 그 거처는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자리가 됩니다. 누추하고 더러운 마구간이지만 바로 그 자리는 빛나는 별이 찬란하게 비추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그 거처를 옮기는 사건이야말로 우리에게 축복이고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놓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내가 살아가고 겪고 있는 삶의 한가운데로 거처를 정하셔서, 더러운 내가 깨끗함을 바라보게 하시고, 유한한 내가 영원을 사모하게 하시고, 흑암과 어두움에서 빛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질병으로 신음하는 나로 하여금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피안에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오늘 내 안에 거처를 정하시고 나와 더불어 숨 쉬시고 나와 더불어 아파하시고 나와 더불어 고통을 나누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신비입니다. 지금 나에게 오셔서 ‘내가 살 집, 내가 살 곳을 바로 너로 정했다.’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하나 돌아봅시다. 사실 뭐하나 내가 이룬 것이 있습니까? 내가 살아있는 것부터가 내 능력이 아니지 않습니까? 나에게 가족 있는 것, 나에게 좋은 이웃이 있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이제까지 이렇게 부족함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것, 한편으로 내가 원하는 일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 없습니다.

그 은혜의 정체가 바로, 하나님의 함께하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저기 저 높은 보좌 위에 계시지 않고, 지금 내 삶의 곁에 내 비천한 구유에 오셔서 함께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 이거 필요하다면서, 자 이거 가져라~!’ 하고 주시는 그런 은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철저하게 함께하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이 오늘 요한복음의 진짜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행복의 정체가 뭡니까? 다른 사람보다 돈 많이 가지면 행복합니까?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차 끌고 다니면 행복합니까? 아닙니다. 물질은 그저 부족하지 않을 정도면 충분합니다.

진짜 우리의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입니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놀고, 함께 일하고, 함께 싸우기도 하고, 다시 함께 화해하고... 그 함께하는 삶을 그냥 우리끼리가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행복이고, 구원입니다.

5.

오늘 말씀의 제목을 그래서 ‘내가 살 곳을 정하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도 행복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저 멀리 하늘 위에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사는 바로 이곳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로 정하셨습니다.

잠시 잠깐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거처를 정하고 함께 사시기로 했습니다. 함께 태어나고 살고 함께 죽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그렇게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도 그게 기쁘다고 하시는 겁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멀리 계신 하나님을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그저 우러르기만 하고, 그저 두려워만 하고, 그저 기도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바로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만 살 곳을 내 곁으로 정하시면 안 됩니다. 우리도 내가 살 곳을 하나님 곁으로 정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면서, 정작 내 삶은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고, 하나님 곁에 있지 못하고, 나만 좋은 곳에, 나만 행복하고 즐거운 곳에, 그렇게 홀로 있지 않았나 돌아보기 바랍니다. 내 안에 주님은 이미 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만 주님 곁으로 가기만 하면 됩니다.

오늘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굳게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