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얼마나… - 에큐메니안

▲ Louis-Jean-François Lagrenee, 「Elizabeth and John with Zechariah」 (before 1805) ⓒPublic Domain

벌써 성탄이 다가왔습니다. 한 해가 정말 빨리 지나가지요. 겨울이 오면 대림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이 대림절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한 절기입니다.

왜냐하면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인데요, 우리가 무엇을 기다리고 희망하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이 씨가 된다’고 하는데, 우리 마음속에 품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으로 발현된다는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나고 똑같이 죽는 것 같지만, 저마다 품고 있는 마음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기다림과 희망의 출발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며 어떻게 느끼는가에서 출발합니다. 현실이 마냥 즐겁고 마냥 행복하면, 아무런 기다림도 없고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의 현실에 취해서 지금 그대로 마냥 계속되기만을 소망할 뿐이지요. 그러나 현실이 아프고 현실이 괴로운 사람은 소망하게 됩니다. 그 괴로움이 씻겨지기를 소망하고, 그 아픔이 사라지기를 소망합니다.

대림절을 지내면서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무엇인가를 다시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왜 그런 것을 소망하고 있는가? 내가 그 소망을 품게 된 현실은 무엇인가? 내가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내가 나의 삶을 잘못 바라보고 현실을 잘못 판단하고 헛된 소망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내 삶 속에서 바라고 계신 하나님의 소망은 무엇인가? 깊은 성찰과 기도 속에서 우리의 삶과 신앙이 바로 서는 대림절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서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제사장인 사가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사가랴의 아내는 엘리사벳인데, 이 부부는 나이가 많이 들도록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사가랴 앞에 갑자기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는 뜻밖의 말씀을 합니다. “하나님이 너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래서 네 아내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다.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어라. 그 아들은 엘리야 같은 큰 인물이 될 것이다.” 얼마나 복된 소식입니까? 이 부부는 매우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깁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복된 소식만 준 것이 아니라, 사가랴에게 벙어리가 되는 벌을 내려버립니다. 사가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의심했다는 것입니다. 사가랴가 믿지 못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사가랴는 왜 복된 소식 앞에서 의심했을까요?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기뻤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다 포기했던 일입니다. 그래서 ‘불가능한 일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하고 반문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가랴가 의심한 것은 ‘어떻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문맥상 그렇게 읽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가랴의 의심의 핵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가랴는 자신의 소망에만 집중한 나머지 천사가 전해 준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하나님의 소원을 발견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가 왜 태어나야 하는가? 이 아이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소망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 하나님의 소망에 공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가랴는 개인적인 소망과 개인적인 희망에만 매몰되어 있는 삶을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간적인 판단과 계획으로만 살던 사람입니다. ‘나’라고 하는 존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웃을 보지 못하고, 민족과 나라를 보지 못하고, 역사를 보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아픔에 아파할 줄만 알았지, 지금 내 이웃이 무엇을 아파하고 있는지, 내 민족이 이 인류가 무엇으로 고통당하고 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느끼지도 못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무엇을 소망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마음속 깊이 안타까워하고 아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가랴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아픔, 내 고통에만 몰두합니다. 내 행복, 내 즐거움을 위해 살아갑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불행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이치라고 받아들입니다.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 앞에서, 하나님이 온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엄청난 사건을 깨닫고 기뻐하기는커녕, 자기 아들 태어날 일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 앞에서 내가 얼마나 힘들고, 내가 얼마나 애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고, 내가 받은 것 하나 없고, 내가 얼마나…

지금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에 앞서서, 지금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마음의 상태인가를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구세주의 탄생으로 깨닫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세주의 탄생에 벅차고 즐거워서 하나님께 감사하기는커녕, 내 코앞에 닥친 내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가만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식 태어나는 일만 생각하고, 내 식구 아픈 일만 생각하고, 내 자식 시험만 생각하고, 내 직장 문제, 내 집 문제, 내 먹고 살 문제가 해결될 일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천사들이 외치는데도 사람들은 이 말을 그저 ‘이상한 말이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2:18). 지금 우리는 모두 평화가 이상하고 영광이 의아한 사람들이에요. 지금 아기 예수가 태어나셨는데도 나 사는 일이 더 중요해서 아기 예수님께 방 한 칸 내어주지 않고 마구간으로 내몰아 버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제대로 읽어보면,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벅찬 감동의 기쁜 이야기가 아닙니다. 슬픔과 반성과 깊은 뉘우침의 이야기입니다. 통회와 회개가 가득해야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의 심정도 똑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복음을 앞에 두고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율법이 대체 뭐고, 이방인이 뭐고, 할례가 뭡니까? 지금 그따위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지금 이루어진다니까요! 눈을 크게 뜨세요. 하나님의 구원의 엄청난 지평 속으로 들어오세요. 들어와서 주님 주시는 구원을 누립시다. 구원 안으로 들어오면 유대인, 이방인 이런 것도 없구요. 나는 할례받았느니 너는 할례 안 받았느니 그런 것도 없습니다. 율법도 없고 저주도 없습니다. 다만 주님이 주시는 커다란 은총만 가득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율법은 인간적인 판단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세계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좁아터진 시각을 가지고 자기 삶에만 붙들려서 살아가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존재로 도약하라는 것입니다. 그런 새로운 차원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새로운 차원의 사람이 되면, 새로운 소망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내용을 새롭게 가지게 됩니다. 헛된 소망을 내버리게 됩니다. 소망하지도 못하던 엄청난 것들을 소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망의 영역도 새롭게 됩니다. 나 개인의 소망에만 매달리던 삶이 변화하여 나의 소망이 아닌 우리의 소망, 전체의 소망 함께 이루는 소망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 소망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먼 훗날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그 소망을 지금 이 삶 속에서 이미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내일을 기다리기만 하던 신앙에서 주님의 구원을 미리 살아가는 신앙이 됩니다. 벙어리 같은 사가랴의 삶을 뛰어 넘어서 이제 그리스도 예수의 삶을 미리 사는 요한의 삶으로 들어서는 것입니다.

그 때에는,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새끼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풀을 뜯고, 어린 아이가 그것들을 이끌고 다닌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눕고,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는다.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 곁에서 장난하고, 젖뗀 아이가 살무사의 굴에 손을 넣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서로 해치거나 파괴하는 일이 없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 이사야11:6-9

이사야 11장의 말씀입니다. 먼 미래의 환상을 노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세계, 요한의 삶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빛이 되시고, 주님이 구원이 되시고, 주님이 품어주시고, 주님이 감싸주시는 그런 현실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내 눈 앞에 놓인 일들만 가지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던 우리에게, 우리가 알지도 못하던 사이에 하나님은 그 크신 구원을 이미 이루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사가랴가 제 한 몸 아들 볼 생각만 하는 그 때에 주님은 이미 온 인류의 구원을 준비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구원을 우리가 바라보지도 못하는데도, 율법에만 얽매여서 복음을 쳐다보지도 않는 그 때에도, 이미 주님은 구원을 약속하시고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주님은 이미 그 때를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먼 훗날 언젠가가 아니라, 바로 지금 이 곳에서, 내 삶의 한 복판에 주님이 뚫고 들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의 간구를, 네가 미처 간구하지 못한 것들까지 내가 이미 다 들었다. 오늘 내가 그 모든 것을 이루겠다.’

우리는 모두 사가랴입니다. 내 눈 앞에 놓인 내 운명만을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이 운명이 어디로 향할지 노심초사 안달복달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짜 운명은, 우리가 걱정하고 염려하고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그런 운명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진짜 운명은, 주님의 복된 구원으로만 확정된 그런 운명입니다. 구원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 기뻐할 수밖에 없는 운명, 복되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 그래서 감사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 운명을 깨닫고 그 운명을 감사하고 그 운명 속으로 우리는 뛰어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대림절에 우리에게 임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풀리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내 삶 속에서 나를 괴롭히는 구체적인 삶의 문제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하는 삶, 아름답고 좋습니다. 내 문제들만 보지 않고 이웃의 문제를 보고, 나라와 민족의 문제를 보고, 역사의 문제를 보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의 문제가 풀리지 않는데 하나님의 뜻도 다 의미 없는 것 아닙니까?

내 코앞에 닥친 내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구원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자식 태어나는 일, 내 식구 아픈 일, 자식 시험 문제, 직장 문제, 집 문제, 먹고 살 문제를 떠난 구원이 도대체 어디 있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런 구원은 없습니다. 사실 구원의 문제는 돌고 돌아 다시 내 삶의 문제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을 알지 못하고서 내 삶을 바라보던 때와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을 깨닫고 나를 돌아보면, 내 문제가 이제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되어서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슬픈 일은 여전히 슬픈 일입니다. 슬픈 일 앞에서 우리는 슬퍼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슬픔이 나를 붙잡지 못합니다. 나를 절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그 슬픔으로 내가 파멸하지 않습니다. 그 슬픔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됩니다. 슬픔을 넘어선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보고 감사하게 됩니다.

어려운 일, 힘든 일은 여전히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고통이 가짜 고통이 아니라 온전한 진짜 고통이었던 것처럼, 나의 고통도 온전한 고통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아픔이 주님을 지배하지 못한 것처럼, 모든 고통도 나를 온전히 주장하지 못합니다. 어렵고 힘든 일들 속에서 실패하고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어려움은 오히려 나를 기쁘게 합니다.

그렇게 내 삶을 다시 보기 시작하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고, 송아지와 사자가 함께 풀을 뜯는 게, 어린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고 장난하는 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 했던 내가, 내 곁의 어린 양을 돌아보게 되고, 사자를 돌아보게 되고, 독사의 굴을 살피게 되는 나로 바뀌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나와 상관없던 독사굴이 내 삶의 현장이 되고, 내 책임이 아니던 어린 양이 내 품의 자식처럼 생각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내 삶이 세상 모두와 하나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물이 바다를 채우듯, 주님을 아는 지식이 우리에게 가득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삶을 깊이 슬퍼하고, 한없이 기뻐해야 됩니다. 온 힘을 다해 고민해야 합니다. 온 힘을 다해 내 삶을 힘써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신 주님의 역사하심을 느끼며 감사해야 합니다. 다만 모든 것을, 우리의 운명을 구원으로 확정 지으신 주님께만 맡기면 됩니다.

성탄절은, 거룩하신 분이 태어나서 ‘성탄’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거룩하게’ 태어나서 성탄이기도 합니다. 거룩한 분의 태어나심만을 바라보는 그런 성탄이 아니라, 우리도 그렇게 거룩하게 태어나는 그런 성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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