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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어울리는 삶의 스타일을 찾으셨습니까예수께서 우리에게 오신 뜻(갈라디아서 4:4-7)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3.12.27 02:04

성탄의 기쁨을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늘 되새기는 것이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성탄절을 맞이하며 새삼 묻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간결 명료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새기는 가장 오래된 말씀일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이면 늘 두 복음서(마태, 누가)가 전하는 말씀을 연상하지만, 갈라디아서 본문은 그보다 훨씬 앞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삶보다는 죽음을 주목하며 보편적 구원 사건의 지평에서 그 의미를 힘주어 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의 의미를 간과하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은 그 삶의 의미를 명료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한이 찼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녀이므로, 하나님께서 그 아들의 영을 우리의 마음에 보내 주셔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사실은 당대의 법적 관념을 전제로 하여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들로 입양하여 상속자로 삼는 로마의 법적 개념을 그 바탕으로 합니다. 오늘 우리가 그 법적 개념에 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당대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의미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는 것을 알고 그 말씀의 초점이 무엇인지 헤아리면 족합니다.

말씀의 초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녀로 삼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인간과 똑같은 조건에 처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없는 아들을 대신하여 상속권을 물려주기 위하여 특정한 누군가를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당신의 아들을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똑같은 삶을 공유하게 만들어 그 사람들을 당신 앞으로 인도하여 자녀로 삼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각 사람은 이제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종이 아니라 자녀로 삼는다는 위대한 선언입니다. 종과 자녀가 어떻게 다를까요? 종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주인의 의지를 따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을 따라야 한다고 권유받기도 하지만, 부모와 자녀 관계는 그렇게 일방적일 수 없습니다. 종과 달리 자녀는 기본적으로 자유인입니다. 부모의 뜻을 따른다 하더라도 대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지에 부합할 때 따릅니다.

이 말씀의 진실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뜻을 끊임없이 묻고 대화하는 가운데 자신의 뜻을 펼쳐가는 존재입니다.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비로소 그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 본문 말씀의 요체입니다.

본문 말씀은,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또한 율법 아래에 놓이게 하셨다고 합니다. 인간과 동일한 조건에 처한 하나님의 아들의 삶입니다. 적어도 이 문맥에서 희생제물과 같은 관념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과 똑같은 조건 가운데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똑같은 삶으로 사람을 인도하게 했다는 뜻입니다. 인간 자신의 삶 안에 율법을 넘어설 가능성을 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 율법에 매여 종노릇 해야 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앞에서 인간은 한동안 그렇게 종노릇 하였지만 이제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선포합니다.

율법은 그 맥락에 따라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하지만, 본문의 맥락에서는 명확히 부정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유치한 교훈’과 동일시됩니다(4:3). ‘세상의 유치한 교훈’은 직역하면 ‘세상의 원소들’이라는 말로서, 이 세계가 몇 가지 원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당시 종교적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구성원리에 대한 과학적 인식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대 사람들에게 그 원소들은 사람들에게 적대적인 악마적 실재들로 간주되었습니다. 고대의 많은 종교들은 그 악마적 존재들을 달래기 위해 제의와 마법 등을 발전시켰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 노예로 살아갔습니다.

본문 말씀은 율법에 매인 것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사람이 그 굴레를 벗고 자유롭게 살아가도록 하는 데 있다는 것을 본문 말씀은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

▲ 예수의 탄생은 세상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삶의 질서의 전복을 의미한다. ⓒGetty Images

그 삶은 그저 자기만의 자유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앞에서부터(3:26) 쭉 이어지는 맥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갈라디아서 전체를 집약하고 있을 뿐 아니라 바울 서신의 정신을 한마디로 집약하고 있는 유명한 명제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3:28).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놀라운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바로 그 선언의 의미를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부연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은, 기존의 모든 대립관계와 그에 따르는 차별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유대인이나 그리스인, 종이나 자유인, 남자나 여자 사이에 종교적·사회적 차별이 없어집니다. 그런 구분 자체가 의미 없어집니다. 그러니 차별은 있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의 핵심적 요체가 담겨 있고, 또한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급진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이 선언은 종교적 차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사실 바울의 생각만은 아니었고 고대 세계의 많은 현자들의 공통된 이상이었습니다. 바울에게서 그 주장이 특별한 의의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은, 그 이상을 실현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있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이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없었던 철학자들에게서 그 이상은 그저 내면화의 차원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예컨대, 철학자인 노예는 자유롭다 불리는 반면 정욕의 노예인 자유인은 결코 자유롭다 불릴 수 없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면에 바울에게서 이 주장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십시오. 누가 나를 나누는 사람으로 만들었습니까? … 내가 나누는 사람입니까?”(도마 72) 도마복음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진실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마땅히 그 새로운 삶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종이 아니라 자녀로서 마땅한 삶입니다. 서로 정죄하지 아니하고 서로 용납하며 존중하는 삶을 이루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려는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모든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만의 정당성을 내세워 다른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거나 차별하고 정죄하는 오늘 세계와 교회의 현실을 보면 얼마나 안타까우실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참뜻을 새기고자 하는 이들은 기쁨으로 그 뜻을 기리고 있지만, 정작 예수께서는 그 참뜻을 저버린 세상과 교회의 현실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계실지 모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팔레스타인 땅에서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금도 살육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 지난 주간 한국교회에서는 성소수자를 축복한 목사가 출교 처분을 받았습니다. 반면 지난 주간 가톨릭의 교황은 누구든 교회에 다가오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되며 누구에게든 축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교회의 공식 문서로 확인했습니다. 인간을 속박하는 과거 가톨릭의 권력체제를 부정하고 복음의 자유 정신을 외쳤던 프로테스탄트는 어디에 있을까요? 슬픈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오신 뜻을 깊이 새기기를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자녀로 삼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몸소 보여주신 그 참뜻을 우리의 삶 가운데 실현하기를 바랍니다. 교회가 그 기쁜 소식을 널리 전하여 참 평화를 이루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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