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말씀의 잔치 Junger Prediger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 맞이하고도”거듭나지 않고선 누릴 수 없는(마2:1~12)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 승인 2023.12.31 03:03
▲ James Tissot, 「The Magi in the House of Herod」 (1886-1894) ⓒWikipedia

1.

할렐루야. 함께 인사 나눕시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제도 뵙고 오늘도 뵙고, 너무 반갑습니다. 어제는 기쁜 감사의 잔치로 함께 했구요. 오늘은 또 경건한 예배로 만납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복된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기쁜 축제와도 같은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기쁜 사건을 전하고 있는 마태복음의 말씀은 평온하고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아름다운 분위기가 아닙니다. 긴장감, 긴박함, 안타까움, 안쓰러움 등의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우리는 예수 탄생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의 감추어진 신앙의 속살을 발견해야 합니다. 적나라한 우리 신앙의 참모습을 발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즐겁고 기쁜 날로써 예수 탄생을 전하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날이 마냥 즐겁지만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캐묻고 있는 것입니다.

2.

먼저 우리는 말씀 속에서 동방박사들을 발견합니다. 동방에서 박사들이 와서 구유에 나은 아기를 보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누굽니까? 이방인들입니다. 우상숭배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믿기는커녕 별을 보고 세상일을 예측하는 미신에 빠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를 먼저 경배합니다.

하나님을 기다리고 구원의 때를 고대하던 사람들이, ‘와, 마침내 주님이 우리에게 메시야를 보내셨다! 하고 외치면서 기뻐 달려온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들,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섰다는 사람들은 예수 탄생을 까마득하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들이 외면하던 사람들, 저주하던 사람들, 백안시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예수를 알아보고 예수님께 경배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이렇다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로 우리의 삶은 주님의 오심과 상관없는 삶을 살아갑니다. 민감하게 깨어있어서, ‘주님이 오시는 때는 언제일까? 주님은 어떤 곳에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동방의 이방인들이 끊임없이 하늘을 보고 별을 보듯이, 우리도 그렇게 끊임없이 기도하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을 살피면서 살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내 삶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 내가 이 지경인데, 바로 여기에 오셔야 하는데, 왜 안 오셨나?’ 원망하기 급급합니다. 내 욕심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기도 제목의 맨 위에 올려놓고서 ‘왜 이대로 이루어주지 않느냐?’며 투정 부리기에 급급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나 열심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하면서도, 결국에는 멸망 당하고 오히려 심판당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런 신앙으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내 삶에 하나님이 맞춰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해야 하는데, 땅을 보면서 내 마음에만 민감하게 살고 있으니, 아기 예수의 탄생하신 것을 알 수가 없지요.

오늘 동방박사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겉으로는 신앙생활도 오래 하고, 예배도 잘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찬양도 잘하고, 그렇게 경건해 보이는 우리의 모습에, 우리 스스로도 속아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나를 보면서 스스로 ‘나 잘했어’ 하십니까? 아니면 하늘을 보면서 주님께서 ‘너 잘했다’ 하시는 말씀을 듣습니까?

내 삶에 예수를 진짜로 모시는 사람은 동방박사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제대로 몰랐고 신앙도 모르고, 예배도 모르고, 찬양도 모르고, 기도도 모릅니다. 성경통독, 금식, 헌금, 교회봉사.. 이런 것도 모릅니다. 심지어는 교회도 안 다닙니다. 우리들 대단한 신앙인들하고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러나 단 하나 그들이 잘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단순한 마음, 간절한 마음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 하나로 우리를 능가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그것입니다.

땅을 바라보면서 내 삶에 매몰되어 있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동방박사들처럼 하루하루를 순례하듯 예수님만 바라보며 살아갈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아기 예수를 영접할 수 있게 됩니다.

3.

동방박사 중에서도 네 번째 동방박사처럼 되어야 합니다. 어제 우리 아이들이 성극으로도 보여드렸죠? 네 번째 동방박사 이야기는 원래 ‘헨리 반 다이크’라는 미국의 목사님이 1895년에 지은 소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동방박사 말고, ‘알타반’이라는 네 번째 박사도 있었다는 겁니다. 이 알타반 박사도 예수님을 경배하려고 평생을 순례하고 다녔는데, 결국에는 예수님을 못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요, 예수님은 못 만났는데, 예수님 말고 이웃들을 만났다는 겁니다.

이 이야기도 우리의 모습을 폭로하는 이야기입니다. 구원자를 만나겠다고 길을 떠난 사람들이 실은 진짜로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겁니다. 진짜로 경배해야 할 사람들을 경배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아기 예수를 만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리기는 합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하고 찬양하기는 합니다. 헌금도 드리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나 진짜 만나야 할 사람들, 진짜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봐야 할 사람들을 지나친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얼굴도 못 봤지만, 강도 만난 병자를 구하고, 헤롯의 칼에 죽게 된 어린아이를 구하고, 노예로 팔려 가는 소녀들을 구하는 그 삶이, 진정으로 예수를 만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를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 방법이 하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가족, 내 이웃,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웃에 대한 헌신, 봉사, 구제, 돌봄, 선행… 그런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초점이 ‘나’에게 맞춰진 삶을 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초점을 맞추고 살면 ‘하늘’이 안 보이고, ‘하늘’만 보고 살면, 진짜 ‘하나님’이 안 보인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것들을 보기 위해서 조금씩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들만 보려고 하지 말고, 내가 잘 보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못 보는 것들을 보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4.

그렇게 우리는 마지막으로 헤롯을 만납니다. 헤롯은 그 옛날 헤롯왕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헤롯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세상 권력의 꼭대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권력을 주무르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사람입니다. 자기 뜻대로 못 할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자 어떻게 합니까? 자기 권력을 총동원해서 예수를 찾으려 하고, 그렇게 찾은 예수를 말살하려 합니다.

헤롯은 하나님에게 맞서는 악한 세력, 사탄이 아닙니다. 대단한 악의 무리가 아닙니다. 헤롯은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헤롯이라구요? 우리는 힘도 없는데요? 권력도 없는데요? 왕도 아닌데요? 더구나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요? 에이, 아닙니다. 우리는 헤롯이 아니에요!’

과연 그럴까요? 우리가 헤롯과 다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을 보지 않고, 철저하게 자기 자신만 보고 있는 사람의 전형이 바로 헤롯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헤롯입니다. 권력의 크기가 중요합니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내 힘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에게 허락된 힘, 나에게 허락된 삶, 나에게 허락된 시간, 나에게 허락된 마음, 그 모든 것을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율성을 주시고 내 사람을 내 뜻대로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신 것은 내 맘대로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내 삶을 사용하는지를 주님께서 보시는 겁니다.

내 마음을 헤롯처럼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헤롯처럼 내 삶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을 밀어내기 위해, 어떻게든 하나님을 밀어내고 내 맘대로 해보기 위해서,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을 외면하고,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말살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나도 가서 경배하겠습니다’ 하면서, 사실은 내 안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하나님의 음성에 절대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힘들어지고, 그렇게 하면 내가 고달파지고, 그렇게 하면 내가 손해 보고, 바보 되는 것 같고, 인정받지 못하고, 우쭐해 할 수 없고, 자랑할 수 없는데요?’ 그래서 헤롯처럼 내 힘을 내 마음대로 사용하고 맙니다.

우리 신앙에서 제일 치열하게 싸워야 할 전장이 바로 이곳입니다. 내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의 투쟁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게쎄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순간이 바로 그 치열한 전투의 순간이었습니다. 내 삶을 주장하고 싶어하는 헤롯의 마음을 결국 굴복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예수 탄생하셨습니다. 할렐루야. 메리 크리스마스!” 하고 즐겁게 인사합니다만, 즐거운 인사를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반드시 조용한 개인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시간에 우리는 내 마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 제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저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님, 제가 하늘을 본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외면하지는 않았습니까? 주님, 내 마음만 편하기 위해서, 제가 주님을 억지로 밀어내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면서 그게 옳다고 그게 맞다고 억지부리지는 않았습니까?

구상이라는 시인이 쓴 시 한 편을 함께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라는 시입니다.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권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베들레헴 말구유로 오신
그 무한한 당신의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들처럼
순수한 환희로 조배할 줄 모르옵네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허영의 마귀들이 들끓고 있어
- 지극히 높은 데에서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평화 -
그날 밤 천사들의 영원한 찬미와 축복에
귀먹어 지내고 있습네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안일의 짐승만이 살고 있어
헤로데 폭정 속, 세상에 오셔,
십자가로 당신을 완성하신
그 고난의 생애엔 외면하고
부활만을 탐내 바라고 있습네

성탄을 쉬흔 번도 넘어 맞이하여도,
나 자신 거듭나지 않고선
누릴 수 없는 명절이여!

오늘 기쁨으로 성탄을 맞이하는 우리 생명교회 모든 교우들의 귓가에, 하나님의 위로의 말씀, 격려의 말씀이 크게 울려퍼지기를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대학로 19 한국기독교회관 503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4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