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이 보일수록 처음처럼

▲ 구약성서의 전통 중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은 사막에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Getty Images

할렐루야. 새해가 되었습니다. 새해 첫주일을 함께 예배드릴 수 있게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새해첫주일이면서 주현절입니다. 주현절이라는 절기는 우리에게는 조금 생소합니다. 물론 교회력에 들어 있어서 지키고는 있지만, 부활절이나 성탄절, 추수감사절 같은 그런 절기와는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그냥 ‘주현절’이라는 게 있는가 보다. 그게 지금인가 보다 하고 지나갈 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교회의 전통에는 성탄절과 주현절이라는 두 가지 절기가 애매하게 얽혀있습니다. 가톨릭이냐, 정교회냐, 동방교회냐 서방교회냐 하는 교회 전통에 따라서 어떤 절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지 차이가 조금씩 있지만, 간단하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아기 때 태어나신 것 자체를 기념하느냐? 아니면, 태어나신 예수를 우리 인간이 경배한 것을 기념하느냐? 아니면 어린 시절은 필요 없고 메시야-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것을 기념하느냐? 하는 차이입니다. 물론 기독교 이전의 로마종교들의 풍습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복잡한 이야기는 신학자들에게나 맡겨버리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성탄을 통해서는 예수님의 나심을 감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 없이 신적인 일을 하고 하늘로 가버리신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나타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주현절을 통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핵심은 하나님이 예수님이라는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의 눈에 스스로를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현입니다. 주(主)-주님이, 현(顯)-현현하셨다. 나타나셨다는 겁니다.

사실 성탄의 핵심은 ‘주현’에 있습니다. 신적인 존재가 아무리 많아도, 그 존재가 대단하고 엄청나고 위대해도, 내 곁에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지요. 그림의 떡은 아무리 맛나 보여도 소용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태어나심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이야기라는 겁니다. 그렇게 태어나신 하나님의 아들이, 내 앞에 나타나시고, 나를 만나시고, 나와 함께 사시고, 나를 사랑해 주시고, 나를 구원하시고, 나를 살리셨다는 겁니다. 그게 주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현절이 더 중요한 절기입니다. 성탄이 나와 상관없는 남들 잔치가 아니라, 바로 내 잔치 우리집 잔치가 되는 것이 주현절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그것입니다.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고, 너희들은 나의 백성이다.” 하나님이 백성과 상관없이 혼자서 계시면, 아무리 위대하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해도, 그런 하나님은 의미 없는 분입니다. 있으나 마나 한 분이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백성이 있어야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겁니다. 주현절은 그래서 우리에게만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께도 축복입니다.

문제는 이런 주현절을 어떻게 보내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내 삶에 맞아들이느냐 하는 겁니다. 비단 주현절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 전체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우리 곁에 오셨는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어떻게 내 곁에 모시느냐는 겁니다. 우리 평생의 숙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여러 가지 다른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예수를 닮아간다. 하나님의 구원을 산다. 하늘 나라를 이루어 간다.’

첫걸음은 우리 곁에 오신 예수님을 먼저 아는 겁니다. “이분이 예수구나. 이렇게 가르치셨구나. 이렇게 살고 이렇게 죽으셨구나.” 그리고 나서는 그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알아가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가르치시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려는 삶이 이런 거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이런 거구나.” 예수를 통해서, 성서를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인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보다 먼저 예수를 알고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의 삶과 증언을 통해서 그렇게 알아갑니다. 그리고 나면,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 삶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그렇게 우리 삶이 예수를 닮아가기 시작합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면서 금년에도 어김없이 교회의 신앙표어를 정했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광야의 백성, 하나님의 땅으로 가자.” 오늘 말씀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신앙은 항상 첫걸음부터 시작합니다. 신앙은 연륜이라고도 말하지만, 그 연륜은 차곡차곡 쌓이지 않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통장잔고처럼 절대 변하지 않고 남아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손을 놓고 있으면,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눈 녹듯 사라져버립니다. 아련한 기억만 남습니다. 실제로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든든해 합니다.

신앙의 진짜 연륜은 항상 처음처럼 시작하는 마음자세입니다. 그렇게 처음인 양 시작할 수 있는 태도이고, 실제로 처음인 양 하나님을 알아가고 처음인 양 예수를 따라 살아가는 그 실천입니다. 그게 신앙의 진짜 연륜입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인 사람은 ‘내 신앙이 어쩌고 저쩌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몇 년을 믿었고...’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다. 처음 만나는 듯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처음인 듯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사랑하라’ 하신 말씀을 그저 겸손하게 순진하게 실천합니다. 그게 진짜 신앙의 연륜입니다. 우리 생명교회 모든 교우들이 그런 연륜을 쌓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매번 교회의 신앙표어를 정하는 것은 다시 그 첫걸음을 시작하는 출발점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 이렇게 신앙생활 시작해 봅시다. 처음인 것처럼요. 새롭게 배워가고, 새롭게 고민하고, 다시 처음처럼 주님을 사모해 봅시다!’ 하는 겁니다.

첫째는 내가 어디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광야에 있습니다. 나는 광야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광야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필요합니다. 금년 일 년 동안 출애굽기 강해를 하려고 합니다. 1장부터 40장까지 한주에 한 장씩 설교하려고 하는데요. 출애굽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할 수 있었던 그 근본적인 계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만히 있는데 뜬금없이 하나님이 ‘내가 너희를 출애굽 시켜줄게’ 그러신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먼저 끊임없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소연하고, 애원합니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주님, 우리 이렇게 살다가 다 죽습니다. 주님, 구원해 주세요.’ 왜 기도합니까? 지금 살고 있는 이곳이, 지금 사는 이 삶이, 힘들고 괴롭고 불행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삶 말고, 이렇게 사는 것 말고,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표현으로 하자면, 내가 지금 광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여기가 낙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그래서 탄원하는 겁니다. 모든 일은 이 기도에서 출발합니다. 모든 일은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깨닫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그랬더니 주님께서 ‘그래? 그러면 내가 너희들 살 곳을 주지. 너희들 여기서 살아라’ 하고 새로운 곳으로 인도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출애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출애굽의 구원역사를 감탄하고 찬양하면서, 우리에게도 출애굽 같은 구원을 허락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가나안 같은 낙원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1번을 하지 않고, 2번 3번 나가려고 합니다. 1번이 뭡니까? 네. “내가 지금 광야에서 살고 있구나. 내가 지금 이집트에서 살고 있구나. 내가 평안하게 살고, 나름 기쁘게 살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 삶이 전부가 아니구나.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게 1번입니다.

우리 살림살이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영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나의 영혼의 상태, 내 마음의 상태, 내 신앙의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내 신앙이 이대로 괜찮은가? 내 신앙의 목적지가 여기 맞는가? 내 영혼이 이렇게 온전한가? 이것이 내가 주님께 받은 최종적인 은혜인가?’ 끊임없이 나를 돌아봐야 합니다.

이 신앙의 성찰이 끊기면, 출애굽의 역사도 다 쓸모없어집니다. 가나안을 가는 길에 광야에서 조금 힘들어지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뭐라고 말합니까? ‘차라리 이집트의 고기가마 곁이 좋았다. 괜히 따라 나와서 다 죽게 생겼다’ 합니다. 왜 그럽니까?

기적이 없어서 그럽니까? 하나님의 역사가 부족해서 그럽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모자라서 그럽니까? 아닙니다. 신앙의 성찰이 부족하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나를 돌아보는 일이 근본 중에 근본입니다.

‘우리 목사님은 왜 맨날 자기 자신을 돌아보자 하는가? 그거 맨날 했는데 또 해?’ 그러실 수도 있습니다. 불평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게 신앙의 시작이니까요. 그 시작이 있어야 소망도 있고, 희망도 있습니다. 그 시작이 잘못되어 버리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엄한 데로 가버립니다. 하나님의 땅으로 가야 하는 데, 엉뚱한 데로 갑니다. 처음부터 원하는 바가 잘못되어 있고, 내가 가야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니까, 엉뚱한 말을 늘어놓습니다.

‘요즘은 하나님이 기도를 잘 안들어 주신다’느니, ‘응답받으려면 요렇게 해야 한다’느니, ‘지난번에 기도 응답을 이렇게 받아서 내가 이렇게나 잘 되었다. 내가 그런 거 다 해봤는데 아무 소용없다. 도대체가 신앙에 발전이 없다. 신앙생활 좀 쉬었다가 다시 해도 돼. …’

이런 말들을 늘어놓기 전에, 깊은 곳에서 내 자신을 매일 돌아보기 바랍니다. 기도하기 바랍니다. 하나하나 뜯어보기 바랍니다. 말씀을 대하는 내 태도를 봅시다. 말씀을 사모하고 얼마나 읽고 있는가? 얼마나 암송하는가? 얼마나 실천하는가? 찬양이 내 삶의 중심에 있는가? 얼마나 나는 감사하며 사는가? 불평불만이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께 매일 감사하는가? 불평하는가? 헌금 생활은 어떤가? 기도 생활은 어떤가? 이웃들과 교우들과 관계는 어떠한가? 내 영은 평안한가? 아무 소망 없이 비전 없이 매일매일 그저 이대로 괜찮다고 살고 있는가?

기도의 자리에서 면밀하게 나의 현재를 뜯어봐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이 어떤 광야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광야를 떨쳐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금년 우리 생명교회 모든 교우들이 새로운 신앙의 출발을 하기 바랍니다. 처음인 듯, 처음 주님을 만나서 처음으로 주님을 사모하고, 처음인 듯 주님의 은혜에 기뻐하고 감사하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게 우리의 신앙의 연륜이 두터워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어디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 내 신앙의 자리를 끊임없이 성찰하고, 내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내 신앙의 목표를 흔들림없이 붙드는 한 해가 되기 바랍니다. 그 길에 우리 서로 힘이 되고,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됩시다. 혼자 가기 힘든 길이니까요. 그렇게 그 길을 광야길을 헤쳐나가는 기쁨의 한 해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재훈 목사(생명교회) lewiscipe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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