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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서 찾은 삶의 해답유혹을 이겨낸 예수, 참 인간의 길(마태복음 4:1~11)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 승인 2024.02.21 05:35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순절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기도하면서 악마의 유혹을 받았던 일을 기억하고자 한 데서 유래합니다. 광야에서의 사십일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경험한 일로서, 공생애 기간 예수님의 삶의 지표를 미리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순절은 예수께서 겪으신 고난을 생각하며 우리의 삶의 자세를 다시 가다듬는 절기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사순절을 처음부터 엄격하게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대개 부활절 전 며칠을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하는 절기로 지켰습니다. 그러다가 600년대 교황 그레고리오 1세 때에, 재의 수요일 또는 성회 수요일(올해는 지난 2월 14일)부터 부활절 전날까지 주일을 제외한 평일 사십일간을 특별하게 기리는 전통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그 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은 유혹을 기억하며 그 유혹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절기에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전통이 형성되었습니다. 금식을 하기도 했고, 금식하지 않는 경우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욕망을 억제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사순절을 기리는 뜻은 어떤 의례나 관습을 지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말 마음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고자 했던 그 삶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내면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사시고자 했던 그 삶을 살기 위해 저마다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로서, 이 사순절을 지키기를 원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일간 기도하며 그 막바지에 겪었던 유혹의 사건을 전합니다. 공생애 직전에 등장하는 이 기사는 공생애 전반을 일관하는 예수님의 깨달음을 전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깨달음은, 광야에서 사탄과의 유혹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극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광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전통에서 항상 위험스럽고, 따라서 고통의 시련을 주는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광야는 바로 위험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장이기에 거꾸로 거룩한 장소로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시련의 장이요 연단의 장으로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새로운 신앙운동을 전개했던 이들이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을 했던 것이나 초기의 수도원들이 광야에 자리를 잡은 것도 다 이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물리적·지리적 공간으로서 외지고 황량한 곳을 나타내는 것만은 아닙니다. 온갖 시련과 유혹이 끊이지 않는 우리 삶의 현장 그 자체가 광야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그 시련과 유혹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 한 고통스러운 광야요, 거꾸로 그 시련과 유혹을 물리치고 거듭난 삶을 살게 된다면 거룩한 장소로서 광야가 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고 동시에 그 유혹을 이겨낸 광야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으로서 광야가 아니라 구체적 몸뚱어리를 가지고 살아간 삶의 현장 한복판일 수 있습니다.

그 삶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은 유혹을 받습니다. 아니 번민을 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무엇일까, 참 인간으로서 살아야 할 바른 길이 무엇일까 고민합니다. 그 유혹이 악마의 시험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은 모두 전통적으로 환기되어 왔던 구약의 말씀, 특히 신명기의 말씀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본문 말씀에서 악마의 유혹은 모든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는 번민의 실체요 유혹을 말합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사람이 쉽사리 선택하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구원을 보장해 줄 수 없는 길들입니다. 너무나 뻔히 잘못된 길이거나 고통스러운 것은 유혹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누구에게나 시험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유혹은 항상 달콤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서 모든 사람이 쉽사리 선택할 수 있는 상식처럼 되어 있는 것들로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 가지 시험은 바로 그러한 유혹을 극적으로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에 관한 이야기는 마가복음에 그 사실 자체가 간단히 전해지고 있고(마가 1:12~13), 마태복음과 더불어 누가복음에 상세하게 세 가지 내용이 전해지고 있는데(누가 4:1~13) 그 순서가 다릅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의 본문을 따라 그 세 가지 시험, 곧 유혹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새기고자 합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말씀일 수도 있지만, 우리가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그 의미를 다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유혹이기에, 이 말씀의 의미를 새기는 것은 우리의 삶 자체를 되돌아보는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첫 번째로 악마는 사십일을 금식해서 시장한 예수님더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고 유혹합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가장 일반적인 물질의 유혹입니다. 소유의 욕망이며, 물질적 번영의 유혹입니다. 경제적 유혹입니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절실한 필요와 관련된 유혹입니다. 스스로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겪는 유혹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더 부유해지고 싶고,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이 지긋지긋하기에 누구나 물질적 소유의 욕망을 끝끝내 떨쳐 버리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신명 8:3)라고 답합니다. 마태복음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다.”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주 간단하게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질적 생활도 영위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물질적 삶과는 별개로 하나님의 말씀을 덧붙여 이해하는 식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 삶 따로’ ‘영적 삶 따로’ 분리하여 자족하는 방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삶은 빵으로 사는 삶과 정확하게 맞대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빵은 빵대로 추구하고 또 여기에 덧붙여 말씀은 말씀대로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병행이 아닙니다. 빵으로 살아야 하되 그 빵으로 사는 삶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을 말씀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의미를 구체적으로 새기자면, 빵을 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는 하나님의 의가 깃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빵을 나눌 수 있는 지혜, 빵을 나누는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적인 일상의 삶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이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출애굽 여정에서 만나 이야기(출애 16:6~36)와 상통하며,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마태 6:11)과 상통하는 의미를 지닌 것입니다.

두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예루살렘의 성전 꼭대기로 데리고 올라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라”고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성경 말씀을 들추어냅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이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시편 9:11, 12)

이 유혹은 말씀으로의 유혹, 신앙으로의 유혹입니다. 종교적인 유혹입니다. 말씀으로, 신앙으로 유혹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사실은 이 역시 아주 흔한 유혹입니다. 신앙을 추구하는 이들이 쉽사리 빠지는 유혹입니다. 밥 먹듯이 빠지는 유혹입니다. 주술적 신앙의 유혹입니다. ‘하나님 이거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못 믿겠습니다.’ 이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유혹에 빠진 것입니다. 자기가 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하나님의 뜻이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앙이 다 이런 유혹에 빠진 신앙입니다. 일상을 초월하여 기적을 바라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마디로 일축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신명 6:16) ‘하나님을 믿어야지, 하나님을 네 손아귀에 넣고 주물럭거리려고 생각하지 말아라!’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적을 바라고 놀라운 일을 바라는 믿음, 그런 놀라운 일이 내 눈앞에 펼쳐져야만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에서 벗어날 것을 말합니다. 그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따르는 믿음을 말합니다. 일상의 삶 자체가 여일하게 하나님의 의를 따르는 삶,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훗날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요나의 기적 외에는 보여 줄 게 없다고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2:38~41).

▲ Rembrandt, 「Temptation of Christ Sketch 3」 ⓒWikimediaCommons

세 번째로 악마는 예수를 높은 곳으로 데려가 세상의 모든 나라를 보여 주고 자기를 숭배하면 그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는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대처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그리고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기라.”(신명 6:13)

누가는 이 유혹을 두 번째로 배치하고, 성전 꼭대기에서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유혹을 마지막으로 배치했습니다. 반면 마태는 그 순서를 달리했습니다. 악마가 자신을 숭배하면 세상 모든 것을 주겠다는 유혹을 마지막으로 배치했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장 단호한 태도를 취한 것으로 기록했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이 유혹으로 악마가 비로소 자신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아예 자신을 숭배하라고 요구하고 있고 그러면 세상을 얻는다고 유혹합니다.

이 유혹은 세상을 지배하는 근본 법칙을 환기하며, 그 법칙 안에 매여 있는 모든 인간의 욕망을 말합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 두고자 하는 지배의 욕망입니다. 그 지배의 욕망이 가장 뚜렷하게 가시화한 것이 정치권력입니다. 권력은 누군가를 지배하고 복종하게 하는 힘입니다. 마태는 그 지배의 욕망이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이 유혹을 마지막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가장 격하게 이에 대응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정치권력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는 태도와 일치합니다. 그 까닭에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지배의 욕망이 만악의 근원인 까닭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러기에 누구나 그 욕망을 떨쳐 버리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고로 괴물과 같은 정치권력의 해악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인류사의 숙명적 과제이며 성현들의 공통된 과제였습니다.

더불어 사는 인간사회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수적이지만, 그것이 특정한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류는 부단히 지혜를 모아 왔습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제도는 그 한 방편이지만 여전히 불완전합니다. 그러기에 각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공동선을 이루기 위한 과제는 여전히 미결의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제도상 정치권력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누구든 어떤 힘에 의존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싶은 욕망을 떨치기 어렵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이 부단히 우월한 능력에 따른 업적과 자격을 요구한다면 평범한 사람은 절대로 그 유혹을 떨쳐내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만악의 근원이 될 만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죄의 실체를 인간의 ‘오만’ 곧 ‘휴브리스’라고 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정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탄의 요구 앞에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 어떤 것도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섬김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권력과 지위를 탐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권력과 지위를 누리는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순종하는 노예적 삶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 가운데 그 누구 또는 인간 사회 안의 그 어떤 것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만을 섬길 때 우리는 어떤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공평한 형제자매로 살아갑니다. 서로를 아끼며 서로를 존중하는 삶을 삽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한 토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삽입된 <대심문관>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대심문관>에서는 마태복음의 내용을 따라 기술되고 있습니다. 16세기 스페인 세빌랴에서 이단자들을 처형한 현장에 예수께서 나타나시고 대심문관이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대심문관은, 예수가 인간을 너무 고상하게 이해했다고 질책합니다. 그래서 엉뚱하게 허황한 희망만을 심어주었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인간들의 보편적인 욕망을 너무 잘 이해했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해 왔다고 역설합니다. 재물과 권력과 기적에 초연할 인간은 없으며, 인간의 그 욕망을 잘 아는 교회는 응당 그에 걸맞게 인간들을 대우해 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내쫓는 것으로 극시는 구성되어 있습니다.

과연 오늘 우리 현실에서 사람들과 교회는 어떨까요? 아마도 대심문관의 주장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문제를 일깨우고 대안을 찾고자 하는 대열은 소수이고, 성공과 출세, 재물의 부유함을 보장한다고 현혹하는 대열은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의 현실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습니다. 학교의 교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의 길은 과연 인간에게 허황한 꿈을 역설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회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유혹을 넘어설 수 있었기에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근거는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이 온통 사탄의 유혹에 빠지고 만 것 같지만, 그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운 참 인간의 길이 가능하다고 믿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믿음입니다. 사순절을 맞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삶의 의미를 깊이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공동체가 그 유혹을 넘어서 진정한 희망을 보여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어린 세대들, 우리의 젊은 세대들에게 그 유혹을 넘어서 오히려 더 풍요롭고 자유로운 삶의 길을 경험할 수 있도록 이끄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최형묵 목사(천안살림교회)  chm1893@cho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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