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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오히려 심판대에 오른 것을 아는가이동환 목사 출교 처분에 붙여
최형묵 목사(NCCK인권센터 이사) | 승인 2024.03.13 04:24
▲ 감리교 총회 재판위원회의 이동환 목사에 대한 출교 확정은 또 다시 교회의 폐쇄성을 알린 꼴이 되었다. ⓒ임석규
이 칼럼은 NCCK(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센터가 발행한 것이다. 게재를 허락해 주신 황인근 소장님과 최형묵 이사님께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동시에 이번 감리교 총회 재판위원회의 이동환 목사에 대한 출교 결정이 몰고 올 교회적 사회적 파장을 가늠해 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 편집자 주

 

1.

지난 3월 4일 기독교대한감리회는 이동환 목사의 출교 처분을 확정하였다. 성소수자를 축복했다는 이유에서다.

애초 이동환 목사는 2019년 인천 퀴어문화축제에서 성소수자를 축복한 것에 대해 고발 당해 재판을 받고 2년 정직을 선고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성소수자를 축복하여 ‘동성애를 찬성하거나 동조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3조 8항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12월 감리회 경기연회로부터 출교를 선고받았다. 이에 대한 상소심에서 감리회 총회 재판위원회는 상소를 기각함으로써 출교를 최종 확정한 것이다.

어떤 사안을 두고 법적 절차가 시작되면 그 당사자들에게는 절차적 정당성을 따지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아까운 지면에 지루할 뿐 아니라 때로는 궤변으로 범벅된 재판 과정을 복기할 생각은 없다. 그저 한국 감리회가 성소수자를 축복한 일을 두고 교회법상 최고의 형벌인 ‘출교’ 처분을 내린 사실을 확인하며, 그것이 도대체 어떤 사태를 뜻하는 것인지 헤아려 보고 싶을 따름이다.

2.

대번에 떠오르는 물음은 이것이다. 도대체 교회법의 유용성과 한계는 무엇인가? 중세기의 막강한 위력을 지닌 가톨릭의 교회법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적어도 종교개혁 이후 신앙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조건 안에서의 교회법에 관한 물음이다.

아주 기본적인 개신교의 신학적 입장에서 보더라도 교회법의 위상에 대해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교회법이 신앙고백이나 교리보다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아니, 교회법이 복음의 정신보다 윗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신앙고백 또는 교리가 형성되고, 다시 그에 비추어 교회법이 성립한다는 것은 상식에 해당한다. 여기서 교회법은 공적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공동체성을 보호하는 역할로 한정되는 것이지, 신앙고백이나 교리 자체를 판별하거나 나아가 근원적인 복음의 정신 자체를 판별하는 지위에 있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선포되었을 때부터 이 문제는 이미 쟁점이 되어 왔다. 예수께서는 이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선포하였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한 사람의 영혼이 법에 의해 속박될 수 없다는 선언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유용성과 동시에 그 무용성을 동시에 역설했지만 그 초점은 율법의 폐해, 곧 그 무용성에 두었다. 법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루는 수단이 된다면 그 유용성이 인정될 수 있지만, 사람을 속박하는 역할을 한다면 폐기되어야 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나아가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모든 차별이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명백히 선언하였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갈라 3:28)

바로 그 복음의 정신에 비추어 볼 때 교회법에 의거하여 신앙 양심을 재단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

성소수자를 축복한 것을 신앙 양심의 발로로 볼 수 있느냐는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다. 특정한 성적 지향을 거부하는 것이 신앙 양심에 따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특정한 성적 지향을 문제 삼지 않는 것 또한 신앙 양심에 따른 것이라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특정한 성적 지향을 거부하는 이들은 성서에서 그 근거를 찾고 있으나, 오늘날 통용되는 의미로서 특정한 성적 지향을 정죄하는 구절은 없다.

해석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구절이 있을 뿐이다. 더욱이 오늘날 의학은 특정한 성적 지향이 질병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정한 성적 지향에 따른 행위로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한 그 자체로 범죄시 될 수 없음은 물론 그 특정한 성적 지향을 지닌 이들을 축복하는 행위는 더더욱 범죄시 될 수 없다.

또 이런 물음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단이나 잘못된 신앙에 대해 법에 의거하지 않고 어떻게 판단하느냐고 말이다. 이 경우 잘 헤아려야 한다. 한국교회가 이단 심판을 빈번하게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 판단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이뤄지지 않는 점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나마 양식을 지닌 경우라면 별도 위원회의 논의 또는 일정한 신학적 검토 과정을 거친다.

신앙의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사법적 절차에 의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반증이다. 신앙상 서로 다른 견해는 신학적 대화 또는 토론의 대상이지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명백히 견해가 충돌하는 사안에 대해 법조문에 명문화하여 일방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신앙의 표준을 확립했다고 자랑할 일이 아니라 신학적 대화의 역량이 결여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사태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감리교의 교리적 선언도 말하지 않는가? “우리 교회의 회원이 되어 우리와 단합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무 교리적 시험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의 중요한 요구는 예수 그리스도께 충성함과 그를 따르려고 결심하는 것이다.”

세계 인권선언은 말할 것 없거니와 각 나라들이 채택하고 있는 일종의 사회계약으로서 헌법 또한 신앙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모든 나라의 헌법은 이 점에서 예외가 없다. 또한 나아가 오늘 대한민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양심적 병역거부까지 인정하고 있다.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짊어져야 하는 병역의무에 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양심에 따른 선택을 존중하려는 취지이다. 오늘 문명사회는 그것이 인간 존엄을 실현하는 길이라 믿고 있다.

최근 가톨릭교회조차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이 허용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것은 교회의 인기를 위한 영합 행위가 아니다. 오늘의 문명사회가 지향하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공감의 표현이며, 동시에 그것이 복음과 괴리되어 있지 않다는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전통적인 결의론적 윤리관에 기초한 그 입장은 여전히 여러 단서를 달고 있기는 하지만, 가톨릭교회로서 매우 전향적인 입장을 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물며 신앙 양심의 자유 정신에 기초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그에도 미치지 못하는 태도로 어찌 오늘의 세계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3.

도대체 법에 의존하여 견해가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교회의 태도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것도 동료에게 극형을 내리는 사태를 어찌 이해해야 한단 말인가? 교회법에서 ‘출교’는 공동체에서 완전히 쫓아내는 것으로, 사회법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극형이다. 동료에게 그와 같은 극형을 내려놓고도 신앙을 수호하고 교회를 지킨다고 자처하는 이들의 태도를 어찌 이해할 것인가? 도대체 그 저의가 무엇일까?

누누이 이야기해 왔거니와, 성소수자에 대한 한국교회의 평균적 인식은 그와 같이 극단적이지는 않다. 일반 사회의 인식에 비해 보수적인 경향을 띠고 있거나 유보적인 태도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일관되게 포용적인 입장이 우세한 경향을 띠고 있다(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등 인식조사 보고서 참조). 일반 사회적 인식과 크게 괴리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 흥미로운 경향이 나타난다. 젊고 신앙 연륜이 짧은 평신도인 경우 개방적 입장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 반면, 고령에 신앙 연륜이 길고 교회 직분을 맡은 경우 보수적 입장이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경향이다. 특정 교단(기장)의 경우 목회자가 평신도보다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율이 훨씬 높은 것을 예외로 한다면(한국기독교장로회 전국여교역자회, 「한국기독교장로회여성인권실태조사보고서」, 2023, 125 참조), 대체로 한국교회의 경향은 그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실제 평균적인 인식과 달리 한국교회가 성소수자 또는 차별금지법에 대해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의 비밀이 숨겨져 있다. 한국교회의 대표성 내지는 대의기구의 문제이다. 한국교회에서 평신도의 대표권은 전혀 인정되지 않는다. 일부 에큐메니칼 기관에서 아주 제한적으로 그 대표권이 보장되어 있을 뿐 일반적인 교단에서 그 대표권이 인정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부분 고연령층의 목사와 장로들이 사실상 대표권을 독점하는 왜곡된 대의구조를 갖추고 있다.

그러니 공적 교회의 입장이 보수 편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과잉대표에 따른 왜곡된 현상일 뿐이다. 여기에 길거리까지 나서 동성애와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열성 신자들의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그 왜곡 현상이 강화되고 있다. 요컨대 단지 하나의 입장일 뿐인 견해가 왜곡된 교권구조 안에서 단일한 견해인 것처럼 곡해된 착시 현상일 뿐이다. 문제는 그것이 이동환 목사 재판의 경우에서처럼 교회 권력의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자를 정죄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해 온 것은 한국교회의 오랜 병폐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냉전 시대 반공주의를 신앙의 논리로 정당화해 온 데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동안 평화체제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다가 다시 남북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여전히 냉전 시대의 논리가 먹혀들 사회적 조건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적대의 논리가 냉전 시대의 유물이기만 한 것일까? 다시 긴장이 고조되고 있기는 해도, 사회적 민주화가 진전되고 경제적으로 이른바 선진국 대열에 진입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적대의 논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정확하게 말해 자본주의가 발전했지만 오히려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한 사회 현실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 현실에서 차별과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으며, 그에 편승한 혐오의 정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른바 신자유주의로 일컬어지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모든 종류의 평등의 요구를 무력화하는 가운데 끊임없이 안팎으로 적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그 전략을 실행하는 데 가장 유력한 도구 가운데 하나가 법치이다. 권력을 제한하고자 하는 사회계약으로서 법치 이념이 아니라 시민권을 제한하고 사람들을 순치시키기 위한 법치 행위이다.

오늘 한국사회는 ‘검찰독재’라고 일컬어질 만큼 그 법치의 극단적 폐해를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체의 정치행위는 억압당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사법적 처분에 맡겨지고 있다. 대화와 합의는 시끄럽고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오로지 명징한 법적 판결이 유일한 해법인 것처럼 되어버렸다.

교권구조를 강화하는 교회의 모습이 그와 겹치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권을 유지하기에 이로운 입장을 유일한 공적 견해로 둔갑시켜 상대를 쳐내는 수법이 똑같지 않은가? 대화와 합의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안을 두고 법적 판결을 우선시하는 태도는 오늘 차별과 불평등을 강화하는 권력의 논리를 그대로 빼다 박았다. 교권을 장악한 이들이 태연스럽게 그와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되는 것은 불행하게도 그만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기 때문이다. 반공주의 적대의 논리가 신앙으로 승화된 것이 냉전체제에 편승한 것과 같은 현상이다.

4.

교회가 오늘의 자본과 정치권력의 행태를 그대로 빼어 닮아간다면 과연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있을까? 교회 스스로 하나의 권력구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오직 사랑을 이뤘을 뿐인 예수를 법정에 세운 가야바와 빌라도의 교회, 대심문관(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교회일지언정 결코 예수의 교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골로 2:15) 사도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 사건의 의미이다. 권력을 쥔 이들에게 재판을 받고 극형에 처해졌지만 오히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권력자들을 개선 행진의 포로로 삼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만들었다는 이야기이다. 오직 사랑을 실천하였을 뿐인 예수 그리스도를 극형에 처한 것은 그 권력자들의 무모함과 어리석음을 드러낸다.

사람을 축복한 행위를 범죄시하고 극형을 선고하는 교권이 예수 그리스도를 극형에 처한 권력자들과 과연 다르다고 할 것인가? 사랑의 축복 행위를 범죄시하는 교회가 스스로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어버린 사실을 알기나 할까? 교회는 지엄한 심판관의 노릇을 하였지만 이제 거꾸로 세상의 부끄러운 심판대에 올랐다는 사실을 알기나 할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 변선환 목사를 출교 처분하였던 교회가 오늘 다시 이동환 목사를 출교 처분하였다. 그런 교회에 과연 구원이 있을까?

그래도 이동환 목사는 복직을 위해 싸우겠다고 한다. 정말 착하고 신실한 사람이다. 그 뭉그러진 교회에 대한 애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가 그를 두고 교회를 비방하는 자라고 비난하는가? 그렇게 수모를 당하고도 ‘어머니 교회’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은 그의 믿음이 놀랍다. 그를 출교한 교회는 이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감사해야 할 일이다.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기회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최형묵 목사(NCCK인권센터 이사)  ncckhr@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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