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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문자적으로 믿어야 하나: 오리게네스채수일의 ‘기고만장’(基古萬張)(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 7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 승인 2024.03.25 02:53

이 원고와 영상은 ‘사이너머’ 연구소에 진행하고 있는 채수일 교수의 ‘기고만장: 기독교 고전 만장 읽기’입니다. 기독교 고전을 독자들과 함께 읽고 우리 시대의 문제와 씨름하는 것입니다. 영상과 원고의 게재를 허락해 주신 채수일 교수님과 사이너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 편집자 주

안녕하세요,

▲ Andre Thevet, 「Imaginative portrayal of Origen」 (Les Vrais Portraits Et Vies Des Hommes Illustres) ⓒWikipedia

채수일의 ‘기고만장’입니다.

여러분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으시나요? 저는 고등학교 2학년 시절에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요, 제가 나가던 교회는 신학적으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장로교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매우 근본주의적인 신학적 배경을 가지고 계신 분이어서,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곧바로 심각한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하였다. 네 오른 눈이 너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거든, 빼서 내버려라. 신체의 한 부분을 잃는 것이,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더 낫다.’(마 5,28-29)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매일 새벽기도 시간에 눈을 잡고, 이것을 빼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과연 인간의 성적 충동 자체가 피할 수 없는 원죄인지 고민한 것이지요. 물론 말씀대로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두 눈이 멀쩡하긴 합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1800여 년 전에, 저와 같은 고민을 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었고, 또 그 믿음대로 실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의복 한 벌만을 가지고 살았고, 신을 신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맨 땅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저런, 어쩌지요? 하루는 마태복음서의 이런 말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늘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가 된 사람도 있다’(마 19:12). 그는 이 말씀을 글자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고 믿어 그 즉시 스스로 거세를 했습니다.

그는 주후 2세기 말부터 3세기 중엽까지 로마 제국 치하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를 대표하는 교부, 오리게네스(Origenes, 185년경-253년경)였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로마 제국의 세베루스 황제의 박해기에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수사학자였던 부친 레오니데스의 일곱 아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순교를 당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자, 오리게네스는 10대 후반의 나이에 온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처럼 순교자가 되려는 열망에 가득 찬 오리게네스는 기회만 되면 체포되려고 달려 나갔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옷을 감추어야 했습니다.(1)

그러나 오리게네스는 뛰어난 헬라어 문학과 철학 실력을 갖추어 이미 18살의 나이에 수사학자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데메트리우스(Demetrius)는 오리게네스에게 세례교육과 신학교의 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어쩌면 고대 교회사에서 오리게네스는 최초의 최연소 신학대학장이 된 인물이라고 하겠습니다.

오리게네스의 명성은 하늘을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강의와 강연은 청중들로 넘쳤고, 그의 책들은 방대한 대중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는 성경의 다양한 판들을 비교한 ‘헥사플라’(Hexapla: 6개국어 대역본)를 만들어, 성경의 차이점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하나의 본문을 재건하려고 시도했습니다. 이른바 성경 텍스트 비판을 위한 최초의 체계적인 노력을 한 신학자였던 셈이지요.(2)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오리게네스의 명성을 시기한 데메트리우스 주교는 자기 교회 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한 평신도 신학자가 자기와 경쟁적인 위치에 올라오는 것에 대노했던 것입니다. 그는 곧바로 서방의 주교들에게 오리게네스의 사제직 길을 막는 조치를 취했고, 오리게네스가 이끌어 왔던 신학교 ‘디다스켈레이온’(Didaskaleion)에서 가르치는 것을 금지시켰습니다.(3) 이로써 오리게네스는 교회의 역사에서 최초로 가르치는 것을 금지당한 신학자로 남게 되었습니다.

마흔 여섯 살의 나이에 오리게네스는 갑자기 자신의 모든 세계가 단숨에 무너지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팔레스타인으로 갔는데, 다행히 팔레스타인의 주교들이 오리게네스를 환대하고 그에게 생활하고 일하는 데 필요한 얼마간의 존경과 우의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케자레아에서 머문 기간에 오리게네스는 가장 활발한 지적 활동을 했습니다. 성 제롬(히에로니무스)의 말에 따르면 2천 권을 헤아린다는 오리게네스의 저술들 가운데, 거의 800권의 책이 우리에게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을 보면,(4) 오리게네스의 지적 활동이 어떤 것이었을지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술과 가르치는 일 외에도 오리게네스는 여러 가지 일을 병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250년, 그의 나이 65세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인 대박해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면서 4년을 더 살다가 마침내 예순여덟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평생을 연구와 표현의 자유를 위해 고난을 받았던 신학자, 신학교에서 쫓겨난 ‘방외의 신학자’, 성경을 문자적으로 믿어 스스로를 거세했다가, 후에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린다.’(고후 3:6)는 성경 말씀을 읽고 후회하면서, 성경에 대한 영적 해석, 이른바 알레고리칼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성경해석학의 일대 전환점을 만든 오리게네스는 ‘우리가 인간으로서 정의를 위한 투쟁을 견딜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평화 속에 거하게 된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거나 믿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자칫 기독교인을 위선자나 정신이상자로 만들 수 있고, 성경의 가르침 자체에도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자신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고 하지 않는’(눅 11:46) 율법 교사들을 비판하셨습니다.

제가 ‘말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사는 것이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 산다는 것임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성경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도움이 되었습니다. 신학 공부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길’(롬 7:6)로 저를 인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학 없는 신앙’은 맹신으로 흐르고, ‘신앙 없는 신학’은 무능에 빠집니다.

미주

(1) 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이오갑 역 (천안: 한국신학연구소, 1994), 171.
(2) 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173.
(3) 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171.
(4) 미셸 끌레브노, 『그리스도인과 국가권력』, 177.

채수일(전 한신대 총장)  sooilcha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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