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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2007 생명-평화-역사 기행-1
고상균 | 승인 2007.06.01 00:00

[이 글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과 기독청년아카데미가 공동 주최하는 한·일 2007 생명-평화-역사기행(2007년 8월19일~25일)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안내를 위한 기행문입니다.]

김재일 목사

한국와 일본 사이의 현해탄은 검은 물의 해류의 속도가 빠른 바다입니다. 이 바다는 한-일 간의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사연과 아픔이 많은 바다입니다.

한-일 간의 갈등과 전쟁이 있을 때 마다, 현해탄은 그 갈등의 크기보다 더욱 크게 출렁거렸습니다. 고대로부터 왜구가 넘어와서 노략질을 할 때 그랬고, 신라의 왕자들이 인질로 잡혀 갈 때도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 바다는 그 왕자들을 구하러 간 박제상이 왕자는 무사히 돌려 보냈지만, 자신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 바다이자, 박제상의 아내가 그 남편을 하염없이 기다리다 망부석이 된 바다입니다.  

또한 이 바다는 왕인박사와 일본의 세계문화유산인 법륭사 금당에 그림을 그린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선진문물을 전해 주려고 건넌 바다이자. 백제 유민과 고구려 유민이 망국의 한을 품고 건넌 바다이기도 합니다.

 이 길은 몽고에 나라를 빼앗겨서 강제로 징병된 고려의 민중들이 최초의 용병으로 일본을 치려 건넜다가 바다에 수장되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길이기도 하며, 반대로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러 건너 왔다가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은 대부분 무사히 돌아갔건만 수많은 일본의 민중들이 다시 건너지 못한 그런 바다이기도 합니다.

승리를 해도 아무 이득이 없는 조선과 일본의 민중들이 숱하게 죽어간 바다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도공과 조선의 포로들이 끌려간 바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통신사들이 문화 교류를 위해 건넌 바다이고,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목사가 복음을 들고 건넌 바다입니다.

근대에는 러-일 전쟁이 일어난 바다이자, 일제가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으며 조선과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침략할 때 그 첫걸음으로 내디딘 바다입니다. 그리하여 나라를 빼앗긴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징병과 징용으로 그리고 종군위안부로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바다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최초의 여성 성악가였던 윤심덕과 그의 애인 김우진이 여기에서 자살하여 ‘사의 찬미’의 무대가 된 바다입니다. 그리고 근세에는 대부분 농민과 노동자의 아들들인 우리의 청룡부대, 맹호부대, 백마부대 요사들이 미국의 용병으로 월남으로 파병될 때 이 현해탄의 남쪽을 따라 월남까지 갈 때 출발한 바다입니다.  

조선 기술과 어업 기술이 발달 하기 전에는 아무 관심도 없던 일본이 지금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그러나 우익 세력을 제외한 일반 일본 민중은 거의 관심이 없는, 한반도의 동족 끝 외로운 섬 독도가 있는 바다이기도 합니다.

속을 모를 정도로 검고 물살이 빠른 현해탄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역사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아픈 사연이 많은 바다입니다. 그 바다를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증오와 선진 문물에 대한 부러움이 아닌 사랑과 평화와 생명을 위해 건너려고 합니다.

그리고 해외에 있는 한민족 중에서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국적을 가장 많이 가진 해외 동포들인 조총련과 민단의 동포들을 만나서 그들의 한 많은 세월을 위로하고 함께 통일과 미래를 노래하기 위해 갑니다.

그리고 동양에서 가장 순교자가 많이 나온 그리고 가장 박해가 엄혹했던 엔도 슈샤쿠의 침묵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순교자의 발걸음을 뒤따르기 위해 이 바다를 건넙니다. 

그들이 첫 발걸음을 내딛는 곳은 윤동주 시인이 옥사한 후쿠오카입니다. 그러나 그 후쿠오카는 신앙의 선배인 윤동주 시인을 기리면서 마지막 날에 머물 예정입니다.

우리는 바로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이 가장 많이 끌려와 강제노동을 한 당시의 기타큐슈 공업지대이자 큐슈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고쿠라(기타큐슈)로 발걸음을 옮길 예정입니다.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제 1 목표지점은 원래 고꾸라였습니다.

그 이유는 고쿠라가 당시에는 그만큼 중요한 일본의 공업 지대이었고, 제국주의 전쟁의 병참기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었는지, 고꾸라에는 당일 구름이 너무 많이 끼어 2차에 걸친 원폭 투하 시도가 실패로 끝나자 원폭을 탑재한 비행기는 일본 기독교의 고향인 나가사키 우라까미에 원폭을 떨어뜨렸습니다.  

고꾸라는 혼슈와 큐슈를 잇는 관문이자 당시의 한-일 뱃길의 관문인 시모노세키 항구 바로 건너편에 있기 때문에 가미가제 특공대를 비롯해 탄광과 훈련소가 많던 큐슈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귀환 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곳이기에 검문도 삼엄했던 지역이 고쿠라이고, 그만큼 일제하 민족의 고난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지금은 근대 건축물 문화재가 많아 관광지가 된 모지 지역은 당시에는 야하다 제철소 등 조선과 제철의 중심지였습니다. 1901년에 세워진 당시 동양 최대 규모의 야하다 제철소(신일본 제철소의 전신) 유적지는 당시의 강제 징용 조선인들의 피눈물과 땀의 흔적이 여기 저기 배여 있는 곳입니다.

마치 바로 압제에 시달리던 히브리인들의 호소처럼 고쿠라에는 일제하 조선인들의 절규가 사무친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후쿠오카와 벳푸와 아소산 등 큐슈의 유명 관광지를 향하는 하루에도 몇백명이 넘는 한국 관광객들이 스쳐 지나가기만 할 뿐 고쿠라의 한 많은 역사를 알고 돌아보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 낮선 지역입니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고쿠라에는 고쿠라 교회가 있습니다. 고쿠라 교회는 재일 한국인을 죄인 취급하는 지문 날인 거부 운동의 봉화를 처음 드시고 재일 한국인 인권 운동에 평생을 바치신 최창화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교회이고 지금은 그 선배 목사님의 뒤를 이어 계속적인 재일 한국인 인권 운동을 하고 계신 주문홍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를 찾기 힘들고 그 교회들도 작은 규모에 불과한 일본이지만 고쿠라 교회는 그 외형적 크기에 관계없이 그 지역 한인과 양심적인 일본인들의 마음의 고향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주문홍 목사님의 일제하와 민족 고난의 역사와 아직도 계속되는, 특히 조총련계 학생들에게 계속되는 차별과 불이익에 대한 강의를 듣고 고쿠라 교회의 신앙의 동지들과 기타큐슈 (조총련계) 민족학교 관계자들 그리고 일본 NGO 관계자들과 함께 점심을 같이하며 마음을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일제하 고난의 현장을 방문합니다. 첫 발걸음은 당시에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던 야하다 제철소 유적지입니다. 우리 외할아버님도 징용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시지 않으셨습니다. 외할머니와 어머님 형제들은 외할아버지가 어디로 끌려 가셨는지도 모르고 체념하며 살았 왔습니다.

혹시나 여기로 끌려 오셨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야하다 제철소로 가는 길에 있는 모지항은 고쿠라의 유명한 관광지입니다. 100년이 넘은 건물들이 많아서 레토로지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모지항역의 건물은 유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의 흔적은 있습니다. 개찰구 오른 쪽에는 모지항과 시모노세키를 연결하는 연락선을 타는 부두와의 연락도로가 있습니다. 일제 시대 강제 연행되어 와 탄광에서 일하다 도망친 조선인들은 오리오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모지항까지 왔다가 연락선을 타고 관문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오리오역과 모지항은 감시와 검문이 가장 심했던 곳이라고 합니다.

   
이 사진은 탄광에서 도망친 조선인들을 잡으려고 감시하던 구멍입니다.  

야하다 제철소 유적지가 있는 유적지에서 가까운 곳에 영생원이라는 납골당이 있습니다. 이 납골당은 영생원은 재일대한기독교회 고쿠라 교회의 고 최창화목사님께서 중심이 되어 건설한 납골당입니다.

영생원은 1973년에 세워졌는데 여러 지역에 방치된 재일조선인탄광희생자, 강제연행에 의하여 일본에 끌려와 돌아가신 조선인노동자들의 연고 없는 유골 157기가 안치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최창화 목사님 부부를 비롯한 고쿠라 교회 출신 재일교포들의 유골도 안치되어 있습니다. 제가 한번도 만난 적이 없이 기사와 글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최창화 목사님이지만, 저는 이분을 생각하면 마찬가지로 한번도 만나지 못했고 성경을 통해서만 알고 있는 아리마대 요셉이 연상됩니다. 

   
   
징용되어 돌아가신 분, 이름 모르는 유골, 고쿠라교회 신자들의 유골이 안치된 영생원 

1945년 9월 17일은 강제 징용과 징병으로부터 해방되어 시모노세키에서 작은 배를 타고 꿈에도 그리던 부모형제, 처자식이 고향으로 향하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태풍을 만나 현해탄에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그리고 일본 해안에 떠내려 온 그 분들의 시신을 수습해 만든 무덤이 오다야마 묘지입니다.

오다야마 묘지는 얼마 전 뉴스앤조이에도 소개된 ‘스톤워크 코리아 2007‘의 사전 답사 성격의 일본 일정의 종점이기도 합니다. 이번 기행에서의 첫날 일정도 여기서 마칠 예정입니다.

물론 이들 장소 외에도 고쿠라와 시모노세키 그리고 일본 곳곳에는 수많은 한민족의 한과 슬픔과 고뇌가 여기 저기 묻혀 있습니다. 장소를 방문하고 답사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땅에서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전 기행에 참가하든, 안하든 한-일 간의 생명과 평화 운동에 관심을 가진 여러분은 ’스톤워크 코리아  2007‘(http://cafe.daum.net/stonewalk)에 관심을 가지는 것으로부터 한-일 생명-평화-통일 기행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상균  greatksk@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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