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연구소 정연복 편집위원 ⓒ 박지훈/에큐메니안

구약성경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구절은 “한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는 웅장한 신앙고백이다(창세기 1:1). 시편 기자는 “야훼, 우리의 주여! 주의 이름 온 세상에 어찌 이리 크십니까!”(시편 8:1, 9)라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리고 이 찬양은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모두 야훼의 것, 이 땅과 그 위에 사는 것이 모두 야훼의 것”(시편 24:1)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하나님을 온 세상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구약의 드넓은 시야의 신앙 전통은 신약성경에서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 6:9-10)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쳤는데, 이 ‘주의 기도’에서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은 하늘과 땅 즉, 온 세상을 아우른다.

이 뿐 만이 아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구절에서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다. 하나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라고 말한다. 바울은 로마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법정에 서서 “그분은 이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사람이 만든 신전에서는 살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7:24)라고 연설했다. 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고 세례도 하나이며 만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계시고 만물을 꿰뚫어 계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라고 선언한다.(에베소서 4:5-6)

신약성경의 말미를 장식하는 요한계시록 저자도 “그 뒤에 나는 아무도 그 수효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모든 나라와 민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자들로서 흰 두루마기를 입고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서 옥좌의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옥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이십니다’라고 외쳤습니다”(요한계시록 7:9-10)라고 자신이 본 웅장한 모습의 환상을 이야기한다. 이 모든 성경 구절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구원 활동의 영역은 교회를 훌쩍 뛰어넘어 온 세상이다. 하나님이 진정 바라시는 것은 교회나 기독교인들만의 구원이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구원 활동의 영역은 결코 교회에 제한될 수 없다. 구원은 교회 밖, 즉 세속적인 세상 한복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교회밖엔 구원이 없다’는 교회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은 교회라는 종교적 테두리나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온 세상의 구원을 지향하는 폭넓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거나 “오직 교회만이 구원의 방주”라는 식의 교회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의 교회의 본래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 이 땅의 신자들 중에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교회생활에 대한 그 뜨거운 열정이 교회 밖으로까지 고스란히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많은 신자들이 교회와 세상, 거룩과 세속, 예배와 정치, 신앙고백과 해방실천, 예수사랑과 민중사랑, 교회생활과 사회생활이 마치 서로 무관한 듯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그 엄청난 숫자에 비해 세상을 위해서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소금으로서의 교회! 그렇다. 교회는 세상 속으로 녹아 들어가야 한다. 예수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듯이, 교회는 세상의 구원을 위해 제 목숨을 잃을 각오가 되어 있는 한에서만 예수의 교회인 것을.

2. 복음과 정치 - 마가 1:14-15

마가복음은 “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때가 다 되어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마가 1:14-15)라는 짤막한 보도로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린다. 다시 말해, 마가복음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한 유대교의 형식화된 제의에 맞선 요단강에서의 세례운동 곧 민중적 제의(祭儀) 운동으로 대중의 인기를 누렸던 세례 요한이 세상 권력의 미움을 받아 체포된 다분히 정치적인 사건과 ‘갈릴리’라는 가난과 소외의 현장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의 무대로 설정한다.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의 복음’은 시공을 초월한 무시간적 진리가 아니라 세속 역사의 구체적 현장 한복판에서 선포되어야 할 역사적이며 실천적 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복음’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복음을 종교적 혹은 교리적 관점에 사로잡혀 해석하기 일쑤인 우리의 일반 통념에 제동을 건다. 적어도 마가 1:14-15를 놓고 볼 때 ‘복음’은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복음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복음’ 선포는 요한의 체포라는 숨 막히는 정치 상황과 직접 맞닿아 있다는 이 간결한 보도로써 마가복음 기자가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아마도 복음의 정치성이었을 것이다.

복음의 정치성, 정치적 복음. 이것은 기독교 복음의 순수성을 왜곡하는 너무 과격한 발언이라고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복음의 비정치성을 말해야 마음이 놓이겠는가? 하긴 지난 오십여 년 동안 부패한 정치와 정치인들을 진저리나게 보아온 이 땅의 사람들이 정치에 대한 냉소적 혐오주의나 허무주의에 빠져 있는 것은 충분히 납득이 간다. 하지만 복음의 순수성을 표방하는 이 땅의 교회와 신자들이 그동안 우리 겨레의 숨 가쁜 역사 앞에서 성실히 제 할 일을 다 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까? 사실 걸핏하면 복음의 순수성을 내세우는 교회들과 신자들은 순수성이라는 구실 아래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에 은연중에 게을렀던 것은 아닐까?

기독교의 정치 참여 여부가 아니라 참여 방식이 중요하다

신자들 역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한 싫든 좋든 어떤 형태로든 정치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몇 년마다 선거 열풍이 한바탕 이 나라 전역을 휩쓸고 지나간다. 민주 시민의 신성한 권리인 투표권을 올바로 행사하는 것도 하나의 정치 행위요, 투표에서 기권을 하는 것도 그 자체로 하나의 정치 행위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난 2000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총선연대’가 펼친 자격 미달 입후보자들에 대한 낙선 운동에 진보 진영의 기독교만이 아니라 보수 기독교에서도 적극 지지하는 입장을 취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정치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게 아니라 참여의 ‘방식’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참된 순수성은 우리의 정치 참여가 그야말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의 실현이라는 순수한 인간 사랑의 동기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에서의 순수성이지, 말할 수 없이 썩고 부패한 정치판으로 대표되는 오늘 우리 사회의 산적한 문제들을 외면하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내세우는 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다.

신자란 누구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데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기 위해 신자는 교회 안의 문제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올바른 현실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위 개인구원만이 아니라 사회구원 역시 기독교의 피할 수 없는 선교적 과제다. 사회구원 없는 개인구원이란 영육 이분법에 기초한 그릇된 신앙의 소산물일 뿐이다. 인간이 몸담아 살고 있는 사회가 말할 수 없이 썩은 마당에 어찌 개인구원인들 가능할 수 있을까. “비둘기같이 순결하고 뱀같이 지혜로운”(마태 10:16), 순수한 신앙 열정과 날카로운 정치 감각을 겸비한,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세례 요한이나 예수님 같은 목회자와 신자들이 그리운 시절이다.

3. 찬양과 정치

찬양은 교회의 예배와 신자 개개인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요소다. 설교 바로 앞에 성가대의 찬양 시간을 두는 것에서도 예배에서 찬양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한국교회 교인들은 속회든 구역예배든 집회든 모였다 하면 열심히 찬송하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내 신앙생활의 경험에 비추어 보더라도 정성을 다해 바치는 찬양에서 받는 은혜는 설교가 주는 은혜에 못지않다.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 사람 치고 찬송을 부르다가 갑자기 가슴이 미어지는 감격을 한번이라도 느껴 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찬송은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설교 시간에는 더러 졸거나 지루함을 느끼다가도 찬양을 듣고 찬송을 부를 때는 모든 교인들이 생기를 띤다는 점은 흥미롭다. 아무래도 말보다 노래가 사람들의 가슴에 더 와 닿는 모양이다. 신명나는 예배를 위해 찬양과 찬송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누가 1:46-55는 아직 처녀의 몸인 마리아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곧 메시아를 잉태할 것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천사 가브리엘에게 전해 듣고 며칠 후 사촌 엘리사벳에게 문안을 갔다가 축하를 받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부른 이른바 <마리아 찬가>(Magnificat)이다. 그러나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 볼 때, 아무래도 이 노래는 마리아 개인의 노래라기보다는 누가복음이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구전으로 떠돌던 노래를 누가복음 저자가 마리아의 입술에 담아 옮겨 놓은 듯하다. 마치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아리랑’이 한 개인의 노래가 아니듯이, 이스라엘 민족의 한과 희망의 핵심이 담겨 있는 이 노래도 어느 개인의 창작물이라기보다 오랜 고난의 세월 속에 만들어지고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집단적 창작물이었을 것이다.

찬양과 정치, 찬양과 해방의 관계

다음으로 가사를 분석해 보자.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인데도 구절마다 가시가 돋쳐 있다. 그야말로 혁명적이다. “마음이 교만한 자들”, “권세 있는 자들”, “부요한 사람”은 가혹한 벌을 받는다. 반면에 “주님을 두려워하는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 “배고픈 사람”은 주님의 은총을 입는다. 완벽한 대조법이다. 매우 정치적이고 현실 변혁적이고 해방적인 가사다. 한마디로 천지개벽의 노래다. 그리고 노래가 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틀 또한 드넓다. “당신의 종 이스라엘”, “우리 조상들”, “아브라함과 그 후손” 따위의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이스라엘 민족사 전체를 아우르는 찬양이다. 민족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찬양 속에서 연결되고 통합된다. 아직은 도래하지 않은 해방의 현실이지만, 지금까지 주님이 이스라엘을 도우셨듯이 앞으로도 영원토록 베푸실 주님의 자비로 마침내 해방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가운데 마치 이 해방이 이미 이루어진 듯이 표현한다.(50-53절 참조)

이 노래에서 우리는 하나님 찬양과 하나님이 이루시는 해방 활동에 대한 감사, 찬양과 민족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대한 폭넓은 전망, 찬양과 해방의 염원, 주님의 자비와 주님의 해방, 구원과 해방, 가진 자에 대한 심판과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된 자의 인권회복, 주님 앞에서의 겸손과 민족의 역사 앞에서의 당당한 태도, 신앙과 현실인식, 찬양과 정치적 발언, 이 둘이 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가복음이 해방의 염원으로 불타는 이 찬양을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입에 담아 보도하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에 던지는 도전은 무엇일까? 찬양과 정치, 찬양과 해방은 그리 멀지 않다.

정연복(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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