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역사, 그녀들의 나라

사사기 1:11-15

정진우 목사(서울제일교회)

 
여신도주일입니다. 원래 오늘은 여성 목회자가 설교를 해야 제격인데 제가 자청해서 설교하자고 했습니다. 작년 여신도주일은 제가 니시카타마치 교회에 가 있어서 이훈삼 목사님께서 증언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사실 담임목사로서 제가 처음 여신도주일을 지내는 것이어서 오늘은 제가 증언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설교자로서 저는 여신도주일날 설교하기에 썩 적합한 사람은 아닙니다.(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이건 먼저 고백하는 것이 신상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제가 남자인데다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보면 아직도 가부장적 남성문화에 깊이 오염되어 있어서 여성들한테 비판받고 고쳐야 할 것이 많은 허물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점에서 늘 저는 자신이 없고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제가 설교를 하려고 하는 것은 그래도 담임목사로서 한번은 여신도 주일 강단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감도 있고 또 이 기회에 여성문제와 관련해서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년부터는 여신도주일에는 가능하면 여성이 설교하도록 하는 전통을 갖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그녀들의 역사, 그녀들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사사기의 한 구절을 함께 읽었습니다만 오늘 본문에는 조금 느닷없다 할까요. 조금 낯설다 할까요. 불쑥 악사라는 한 여인의 에피소드가 등장합니다. 12절에서 15절까지 짤막하게 등장하는 이야기의 내용은 갈렙의 딸 악사라는 여인이 남편 옷니엘의 아내가 되어 자기 아버지 갈렙으로부터 윗샘과 아랫샘이 딸린 땅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석가들에 의하면 사사기 1장 1절에서 21절은 사사기의 서문에 해당되는 이야기인데 왜 그 사사기 서문의 중심에 불쑥 한 여인 악사라는 사람이 등장하는 것입니까?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자면 여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세속의 역사, 영어로 말하면 히스토리(he story)라고 하는 남성 중심의 역사가 아니고 허스토리(her story), 그녀들의 역사라는 말입니다. 굳이 여성신학자들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하나님의 역사가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는 언제나 여성의 이야기, 여성의 역사가 히스토리가 아닌 허스토리가 중심에 서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늘 성경본문에서 악사라는 여인을 등장시키는 성경기록자의 의도가 매우 의도적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 없이도 그냥 그 당시의 역사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데 전혀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불쑥 악사라는 여인을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무슨 의도가 있는 것이겠지요.

오늘 남신도들에게는 매우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사실 사사기에는 전체적으로 남자들은 참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등장합니다. 사사기 마지막 부분에 역사가 그 청정한 빛을 잃고 어둠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거기 등장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멍청하고 바보 같습니다. 저도 남자라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이 좀 쑥스럽기도 합니다만 남자들은 성적 욕망의 노예가 되기도 하고, 자기들끼리 칼질하고, 함부로 서원한 것을 지키기 못해 울기나 하고, 여자들이나 납치하려고 하는 정말 바보 같은 남정네들이 수도 없이 등장합니다. 사사기의 남자들은 이렇게 바보 같은 존재들로 비춰집니다. 그런데 여인들은 참으로 당당하고 의젓합니다.

악사, 그녀는 결코 남편 잘 만나 행복해 보려는 따위의 생각을 가진 여자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오늘 본문의 행간을 읽어보면 그의 남편 옷니엘이 처가 덕을 보려고 하는 속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표준새번역은 14절에 “악사는 자기 남편 옷니엘에게 아버지에게 밭을 얻으라고 재촉하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만 이것은 아내의 바가지에 시달리는 남편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처가 덕을 보려고 아내에게 끌려 다니는 옷니엘의 나약함을 폭로하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옷니엘은 악사를 시켜 장인에게서 땅을 얻으려고 하였다고 번역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것에 비추어 악사라는 여인은 그런 남의 덕을 보려고 기웃대는 나약한 인간이 아닙니다. 15절에 보면 윗샘과 아랫샘을 아버지 갈렙으로 부터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데 주석에 의하면 이 ‘윗샘과 아랫샘을 주었다.’ 라는 표현이 히브리어 시제의 미완료형이라는 아주 독특한 시제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그녀가 받은 것은 이미 현재의 우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먼 미래 앞으로 지속될 어떤 역사적 계획, 가나안 땅에 세워질 하나의 전혀 새로운 나라를 향한 비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사기는 무슨 책입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세워질 하나님 나라의 원형,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시고 오직 하나님만이 땅의 주인인 누구도 군림하고 억압하고 지배하고 다스리지 않는 해방 공동체의 이상을 기록한 책이 아닙니까? 전혀 새로운 세상, 전혀 새로운 나라, 모두가 함께 일하고 모두가 함께 승리하는 그런 나라를 일구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바로 그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역사의 한복판에 진정으로 해방된 세상, 모노 야훼이즘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을 지배할 수 없는 나라, 더 이상 왕이 백성을 종 부리듯 하지 못하는 나라, 모두가 주인 되어 사는 그런 세상, 그 하나님의 역사 한복판에 한 여인이 우뚝 서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는 역사 개벽의 현장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외적 인간의 조건 힘이나 능력이나 지식이나 성별 같은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누가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역사 섭리를 바로 보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여인 악사가 있었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세상 나라를 뒤집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여성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다는 것은 비단 사사기의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사사기 바로 앞의 책 여호수아서의 이야기에서도 라합이라는 기생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됩니다. 라합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라합은 이방여인이었지만 그 어떤 약속의 백성보다도 더 신실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바랍니다. 사사기 바로 뒤에 나오는 룻기에서도 주인공은 여인들입니다. 나오미와 룻 그들이 구원사의 족보를 이어갑니다. 말할 수 없는 개인적 불행을 딛고 말입니다.

이어지는 사무엘서는 어떻습니까? 사무엘서에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합니다. 사무엘서 1장을 자세히 보면 남자들의 이름이 계속해서 거론된 뒤에 한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무엘서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보는 것은 남자들이 아니라 여자들입니다.

어디 구약만 그런 것입니까? 신약의 족보가 등장하는 마태와 누가의 족보는 어떻습니까? 역시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하는 남자와 천사의 말을 믿는 여인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예수 사건 속에서 등장하는 여인들의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여인들에 대해서 침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그건 성경을 아직 제대로 보지 않은 증거입니다. 성경에서 여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귀중한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때로 남자들이 바보같이 굴어 위기를 만들 때 이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여인들입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 아니, 역사를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아본 사람은 압니다. 암탉이 울면 역사의 새벽이 동터오는 것입니다. 여자가 커지면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오늘 이 대목에서 우리가 한 가지 진지하게 물어야 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왜 성경은 여인들을, 그들의 역사, 남자들의 역사, 히스토리에 비추어 그녀들의 이야기, 그녀들의 역사, 허스토리를 그렇게 소중하게 기록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물음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수많은 여성운동들이 이 점을 더 깊이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기록하는 하나님의 역사에서 여성의 역사가 주가 되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성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이 여인들의 역사 허스토리를 주목하는 것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가부장적 남성중심주의에서 사회적 약자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서가 일관되게 증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심, 하나님의 나라는 바로 이 약자들, 세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부름 받는 그들이 주인공이 되어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는 진실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루어 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성경은 100점짜리 인간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 인간이 드물기도 하겠지만 사실은 별 볼일 없는 주변인간들이 중심으로 이동하는 그런 역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도래의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처지를 생각해 보시오.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고린도 전서 1:26)

그녀들의 나라, 그녀들의 역사를 증언하는 성경의 진실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나 특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강하고 힘센 이들이 만들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진실로 새 역사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지금 울고 있는 사람, 지금 배고픈 사람, 지금 뒤쳐진 이들로부터 시작하는 나라입니다.

비록 지금 내 처지가 곤고하지만 하나님의 역사 경륜을 믿고 바라는 사람, 그 희망의 원천에서 결코 현재의 조건에 잡혀 의기소침하지 않고 새 역사를 향한 열의를 지닌 사람 그 사람이 남자건 여자건 상관없습니다. 그런데 남자들은, 기득권자들은 그런 마음 갖기 쉽지 않은 것이지요. 부자 청년이 그래서 그냥 돌아가지 않았습니까?

오늘 본문의 여인 악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는 침노하는 자의 것이라고!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너무 잘나고 너무 깨끗하고 너무 의롭고 거룩한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새 역사에 등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의에 취해서 내 잘난 맛에 취해서 이 역사가 하나님의 나라로 몰입해 오는 그 역사의 방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내 작은 기득권에 취해서 진정으로 새롭게 몰려오고 있는 새 역사의 기운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작은 안전을 위해, 그 허약한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래서 누구도 새 역사를 꿈꾸지 않고 누구도 새 하늘 새 땅, 새로운 사회, 전적 새로움에 대해 도전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한 어린이가 설날 세배하러 가다가 길에서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었습니다. 그는 새해 첫날에 생긴 대단한 행운이라 여겼고 이런 행운이 계속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혹시나 돈이 떨어져 있지 않나하고 길을 걸을 때마다 땅만 보고 다녔습니다. 학교에 가서도 복도나 운동장에 동전이 떨어져 있지 않나 하는 데만 정신을 쏟았습니다. 그게 버릇이 되어 그는 죽는 날까지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 다녔지요. 그 덕에 그는 오백 원짜리 수 천 개나 주웠습니다. 물론 임자 없는 백 원짜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요.

그 대신 그는 비가 갠 다음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무지개나 장엄한 저녁놀을 단 한 번도 쳐다보지 못하고 말았지요. 그는 새들이 푸른 창공을 나는 모습도, 붉게 타오르는 단풍도, 거리에서 스쳐 지나가는 단말머리 소녀의 활짝 핀 웃음도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실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그런 나라!  민족이 민족답게 사는 그런 해방된 나라! 더 이상 강대국의 오만에 짓눌려 살지 않아도 되는 그런  세계, 가난하다고 죽어가는 어린이들이 없는 세상, 가난하나 당당하게! 당당하나 겸손하게! 하나님의 정의와 진실이 입 맞추는 그런 나라에 대한 믿음을 우리의 작은 일상의 삶의 무게에 눌려 다 놓쳐버리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 나라가 이 역사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 역사의 주인공입니까? 누가 그 나라의 주인이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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