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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린칼럼]오늘 우리의 설교를 말한다개신교 위기 극복은 '하늘 뜻 펴기'의 회복으로부터
조헌정 목사 | 승인 2010.09.27 16:00

1. 들어가면서 - 용어 사용에 대해 -

 글쓴이가 담고 있는 향린교회는 1993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교회갱신선언서를 발표하고 예배에 민족문화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국악찬송가를 만들었으며 우리가락에 관심 있는 교우들을 모아 국악기를 사용하는 예향이라는 찬양단도 발족하였다.(주1) 또한 예배의 형식과 용어들을 바꾸었는데 “설교”를 대신해서 “하늘뜻펴기”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잔소리하지 말라’는 의미로 “설교하지 마라”고 한다. 설교에 대한 세평이 이러하니, 땅에 떨어진 설교의 권위를 회복하고 우리말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설교 대신 ‘하늘뜻펴기’라는 용어를 제안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설교를 ‘하늘뜻펴기’라고 쓴다. 그리고 신구약성서에 대한 명칭도 제 1,2 성서(주2)로 바꾸고 신에 대한 명칭 또한 ‘하느님’(주3)으로 한다.

2. 개신교의 위기 극복은 하늘뜻펴기의 회복으로부터

 2005년 기준으로 남한의 종교인 분포는 불교 22.8% 개신교 18.3%, 가톨릭 10.9%이다. 지난 10년 동안 개신교 숫자는 줄어든 반면 불교와 가톨릭은 그 숫자가 증가하였고, 2008년 가톨릭 숫자는 공식적으로 500만을 넘어섰다. 각 종교의 신뢰도는 복수 응답의 결과 가톨릭이 66.6%, 불교가 59.8%인 반면 개신교는 26.9%에 불과했다. 가톨릭과 비교할 때 개신교인의 숫자가 두 배 가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신뢰도는 반 이하이다. 개신교의 현실을 반영하는 수치이다. 현재 개신교의 숫자는 840만이다. 이 상태로 계속 간다면 앞으로 10년 안에 개신교와 가톨릭 숫자는 거의 비슷해 질 것이고 개신교가 환골탈퇴하는 어떤 혁명적인 변혁을 꾀하지 않는다면(불가능에 가까운 기대이지만), 30년의 세월이 흐르면 그 숫자는 지금의 절반 아니 어쩌면 3분지 1의 수준에까지 도달할 것이다. 이는 글쓴이의 지나친 과장일까? 현재 대형교회 교인의 평균연령은 60세이다. 농촌교회에 가면 60세는 청년회 회원이다. 그리고 2, 30대의 오늘의 젊은이들은 개신교를 ‘개독교’로, 목사를 ‘먹사’로, 평신도를 ‘병신도’라 공공연히 부르며 지극히 혐오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결과는 분명하지 않는가? 

 

가톨릭의 지속적인 성장과 사회적 신뢰에 대해 스스로 답하기를 “인권과 민주화를 실천해온 한국 가톨릭의 역사가 신뢰의 비결이며, 여기에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적극적인 사회참여가 뒷받침하고 있어 젊은이와 지식인층을 계속 끌어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국민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함께 하는 모습이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주4)

반면 개신교 목사들은 여전히 교회성장이라는 옛 패러다임에만 매여 있다. 미국과 남한과는 처한 상황이 전혀 다르고 기독교국가라는 미국도 보수근본주의 우파 교회들이 급격히 퇴조하고 있는 현실(주5)임에도 불구하고 이전 보다 더 미국대형교회들의 성장 프로그램들을 쫓아가기에 여념이 없다. 마치 유효기간이 지난 물건들을 브랜드 효과만 생각하여 구입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작은 교회의 목사들은 대형교회 목사들이 펼쳐 놓은 ‘교회성장 세미나’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요즘 중소도시의 재래시장 상인들이 초대형 매장과 대재벌에 맞서 반기를 들고 서로 연대하는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나눔과 희생을 예수정신으로 선포하는 교회는 왜 이런 기본적인 연대조차 이루어지지 않을까? 초대형교회들을 향해 대형버스를 운영하여 작은 동네 교인까지 싹쓸이 하는 것은 예수의 나눔 정신에 위배되고 총동원주일을 설정하여 선물공세를 펼치는 것은 기독교 윤리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왜 소리 높이지 않는가? 그건 목사 자신들이 바알의 성공신화에 현혹되어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성공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전체 개신교 숫자가 아무리 줄어들어도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만은 계속 성장할 것이라는 야베스의 성공비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글쓴이는 최근에 남한 교회의 타락한 현실을 드러내는 한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한 한국인 신학도가 독일의 교회사 교수를 만나 ‘중세교회사를 공부하려 한다.’고 했더니, 교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이 ‘중세교회사를 공부하려면 지금 남한의 대형교회들을 연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깨어나야 한다. 정말 목사들이 깨어나야 할 때다. 하늘뜻펴기에서부터 그 근본 틀을 바꿔야 한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성공신화를 배격하고 복음서에 드러난 예수를 좇아 가난한 자의 편에 선 예언자적인 하늘뜻펴기에 주력해야 한다.

 

3. 하늘뜻펴기의 기본은 예언자의 사명 구현

 

복음서는 기본적으로 수난사이다. 복음서의 출발이 되는 마가복음은 예수의 생애 전체를 균형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초점은 예수의 십자가 수난이다. 이를 향해 처음부터 물량적인 시간을 넘어 급하게 달려가고 있다. ‘즉시로’ ‘그때에’ ‘곧바로’ ‘그리고’ 등 이것들이 마가복음의 이야기와 이야기 사이에 주로 등장하는 시간 부사들이며 가장 긴 부사는 ‘수일 후에’이다. 마가복음서는 예수 수난사이다. 절반 이상을 수난의 이야기에 할당하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있는 탄생이야기와 예수말씀(Q어록)이 없다. 반복되는 수난의 예언이 주음(主音)을 이룬다. 마가복음은 예수의 일생을 설명한다기보다는 예수 수난의 이유와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예언자 세례 요한이 당시의 통치자 헤롯왕을 비난하는 일로 옥에 갇히자 이에 그를 대신하여 세상에 나오신다(“요한이 잡힌 뒤에,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1장 14절 표준새번역).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정치적인 탄압을 받자 그를 대신하여 나오신 것이다. 공생애 시작 동기가 정치적이다. 그리고는 당시 사회 체제의 근간이 되는 안식일법과 정결법을 어김으로 종교지배세력과 자꾸만 부딪힌다. 가난하고 병든 갈릴리 사람들(οχλοs, 민중편)에 서는 일로 말미암아 정치지배세력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 두 세력은 예수를 죽이는 일에 손을 맞잡는다. “그러자 바리새파 사람들은 바깥으로 나가서, 곧바로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를 없앨 모의를 하였다.”(3장 6절) ‘곧바로’라니? 이미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 당원들은 그 이전부터 하나였음을 말하고 있고, 예수는 이 두 기득권 세력을 위협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오늘날도 그러하지만, 이천 년 전 종교와 정치는 불가분리의 관계였다. 그리고 이 지배세력과의 부딪힘은 성전을 숙청하는 일로 절정에 달한다. 그런데 마가복음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을 묘사한다. “성전 뜰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는 것을 금하셨다”(11장 16절) 성전 뜰을 가로지르는 물건들은 제사용 제기들과 희생 제물이었다. 그렇다면 성전 제사를 방해했다는 것인데, 이는 수많은 제사장들과 성전 일에 종사하는 레위인들 그리고 성전 경비병들을 제압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는 일이다. 실제 사건이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단순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성전을 깨끗케 하신 것뿐만이 아니라 정치사회적인 물의를 빚을 만한 중대한 사건(범죄?)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래 예수는 로마제국에 위협을 가하는 정치범들에게만 주어지는 십자가형을 받는다. 이상은 종교적인 전(前)이해없이 읽혀지는 간추린 예수 죽음 이해이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가 가장 맨 뒤에 놓고 있는 이 성전 숙청 이야기를 맨 처음에 둔다. 이는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성전 숙청을 단지 장사꾼들을 내쫓았다는 단순 해석을 넘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겠다”(2장 19절)는 성전 파괴론자로 나선다. 물론 이는 유대교에 대한 멸망을 예고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문자주의적 태도를 벗어난다면, 이는 성전 밖의 민중의 삶을 외면하는 ‘성전제일주의’ 혹은 ‘제사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요한복음은 예수를 ‘교회성장론자’가 아닌 ‘교회파괴론자’로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하늘뜻펴기는 ‘인간 구원과 해방에 관한 약속과 성취’라는 큰 구도에서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분이 걸어가신 삶의 궤적과 선포하신 말씀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선포이다. 그러나 이런 설명만으로는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님의 깊은 의도는 드러나지 않는다. 성전을 허물라함은 무슨 뜻인가? 당시 예루살렘 성전이 갖고 있는 사회적 역할은 무엇이었는가? 하느님의 법인 율법은 유대 사회법의 근간으로 주로 안식일법 정결법 할례법 등으로 백성들의 삶 전체를 옥죄이고 있었다. 특히 이런 법들은 가난한 자, 억눌린 자, 소외된 자들을 죄인으로 규정함으로 구원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있었다. 곧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의 압제세력과 하나 되어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갈릴리의 민중들을 억압하는 세상 지배세력의 본거지였다.(주6)

 

당시 성전은 ‘나는 곧 나다.’(공동번역)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새번역) 하시며 애굽 제국의 바로왕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히브리 노예들의 한숨과 고통의 소리에 반응하시며 약자의 하느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야훼 하느님에 대한 철저한 배반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 오시어 아버지의 잃어버린 명예 곧 약자와 억울한 자의 대변인의 자리를 회복하고자 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허물라고 하시는 ‘이 성전’은 솔로몬 왕 이후 수백 년 동안 존속하다가 이천년 전 로마에 의해 사라진 예루살렘 성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성전’이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민중들의 삶을 옥죄이는 모든 지배기제를 통틀어 하시는 말씀이다. 예수께서 숙청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단지 성전 안만이 아니었다. 성전 밖이었다. 그래 요한복음은 ‘성전을 허물라’고 명하는 것이다.

 

 4. 하늘뜻펴기가 펼쳐져야 할 본래의 장소

 

네 개의 복음서가 모두 동의하는 바지만 특히 요한복음에서의 성전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부활의 몸으로서 두 세 사람이라도 함께 하는 그곳이면 성전이다. 건물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 이후 초대교회는 거리에서 하늘뜻을 펼쳤다. 사도행전 2장 이후에 나오는 베드로의 하늘뜻펴기, 스데반의 하늘뜻펴기는 모두 거리에서 행해졌다. 다만 가르침과 떡을 떼는 친교가 집안(건물)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는 본래 예수님도 첫 사도들도 모두 거리에서 민중들이 거하는 그곳에서 하늘뜻을 펼쳤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향린교회는 5년 전부터 일 년에 한 두차례는 민중들의 아픔이 있는 현장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려왔다. 미군기지 확장으로 삶의 터전을 빼앗기고 아파하는 평택의 대추리와 도두리 그리고 파주의 무건리를 찾아 주민들과 함께 예배하고, 한반도운하를 반대하는 종교인 도보 순례단과 함께 예배하고 북한강을 따라 걸었으며, 올해 5월에는 용산참사 현장을 찾아 저들이 희생당했던 불탄 건물을 바라보며 따가운 태양 볕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아스팔트 위에 음식을 펴놓고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였다. 이런 현장예배가 용산과 같이 가까운 거리라면 크게 문제가 없지만, 수백 명의 교인이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평택이나 파주까지 가려면 비용이나 준비가 만만치 않다. 그러나 향린교인들은 이러한 거리예배에서 갈릴리 민중들과 함께 하셨던 참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며 이것이 예수께서 원하는 바, 보이는 성전을 허물고 보이지 않는 부활의 몸으로서의 성전을 세우는 일임을 확인한다.

 

이외 민족민중정신과 역사인식을 함양하기 위해 교회 나름의 특별주일을 정해 지켜오고 있다. 3․1절 산상예배, 4․19민주의거와 5․18광주민중항쟁기념주일, 6월민주항쟁기념주일 등이다. 특히 11월에는 전태일열사기념주일을 통해 노동자들의 고난에 찬 삶을 기억하고 그 주일 오후에는 청계천 5가 기념비 앞에서 거리기도회를 갖고 있다. 그리고 10월 첫 주일은 한신대의 자연의 숲 속에서 향린의 세 자매교회가 함께 모여 세계성만찬주일로 지켜 오고 있다. 이 밖에 전주 완주군에 있는 들녘농촌자매교회와의 정기적인 강단 교류를 통해 도농간의 벽을 허물고, 교회탐방프로그램을 통해 여러 교회들, 특히 공동체 교회들을 돌아보고 있다.

 

5. 하늘뜻펴기의 다양한 형태

 

하늘뜻은 반드시 인간의 언어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연을 통해서 때로는 예술 작품을 통해서 때로는 침묵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남한교회는 너무 일방적으로 서로마교회의 전통에만 매여 있어 하늘뜻펴기를 인간의 이성과 언어 논리에만 의존하고 있다. 글쓴이는 동로마교회의 수도원적인 침묵영성의 전통 또한 중요하게 여겨 주일 예배에서 장로님들의 목회기도 이후 2분간의 침묵기도를 하고 있고 하늘뜻펴기 또한 온전히 침묵으로만 하늘뜻펴기를 한 적이 있다. 2년 전 분당 샘물교회의 선교단 두 명이 아프카니스탄에서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 주일 글쓴이는 저들의 아픔에 동참하고 종교간의 소통과 화해를 위한 침묵 하늘뜻펴기를 25분간 진행했다. 침묵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침묵으로 진행한다는 얘기를 전혀 하지 않았고, 마치 얘기를 시작할 것 같은 몸짓을 계속하였다. 중간중간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촛불과 몇 개의 예수 십자가상을 보여주었다. 교인들에게는 충격으로 남아 있다. 말로 한 하늘뜻펴기였다면 진즉에 잊어버렸으리라!

 

또한 글쓴이는 요한계시록 하늘뜻펴기를 연속으로 하는 과정에서 한번은 계시록에 묘사되는 여러 장면들을 재현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20여명의 50개의 작품들을 (여기에는 중세시대의 성화들뿐만 아니라 피카소 그리고 이중섭을 비롯한 정신대 할머니의 작품까지) 영상으로 만들어 그림을 통한 하늘뜻펴기를 전한 적이 있다. 계시록에서 들려지는 천상의 음악들을 오늘에 재해석하는 일은 아직도 나의 꿈으로 남아 있다.

 

흔히 하늘뜻펴기는 성서본문(text, 텍스트)을 오늘의 상황(context, 컨텍스트)에 재해석해 내는 작업으로 이해한다. 글쓴이가 보기에 이런 이해는 너무나 단순하여 주관적인 잘못을 범하기 쉽다. 글쓴이에게 있어 텍스트는 성서본문 자체가 아니다. 성서본문과 성서본문이 써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의 역동적인 관계가 텍스트이다. 이 ‘관계적 텍스트’를 텍스트로 하여 오늘의 사회적 상황에 넣을 때에 ‘상황적 텍스트’가 나온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늘뜻이다. 그리하여 글쓴이는 거의 빠짐없이 오늘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얘기를 처음이든 끝이든 어디에선가 언급한다.

 

흔히 하늘뜻펴기는 전하는 방식에 따라 강해, 주석, 주제, 절기 등으로 구분한다. 글쓴이는 이 모든 방식을 골고루 도입하여 이야기형태로 전하고 있다. 올해는 ‘이 땅에 살다간 예수들’이라는 제목 아래 인물중심의 하늘뜻펴기를 진행하고 있다. 안식년 3개월과 절기들로 인해 중간에 끊어지기는 했지만, 문익환 김재준 함석헌 김교신을 거쳐 지금은 류영모선생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이러한 하늘뜻펴기를 하는 이유이다.

 

저는 이 땅의 사회 부조리와 민족분열의 위기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물음을 안고 올 1월초 이 땅을 살다간 선배들의 믿음과 삶을 되새겨 보는 하늘뜻펴기를 시작했습니다. 500년을 이어 내려온 조선의 역사를 총칼로 중단시키고 조선반도의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엽전으로 비하하고 전 국민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몰아넣어가는 일제의 불행한 역사를 살아가면서 성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이해하고 고백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조선반도와 같이 외세에 끊임없이 휘둘렸던 피식민지 유대 땅에서 갈릴리 민중의 한사람으로 태어나 서른 살 남짓의 피 끓는 젊음의 정열로 로마제국의 힘의 논리에 대항하다 십자가 처형을 당한 한 인물이 이제는 도리어 제국들을 떠받치는 정치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하여 다시금 식민지 조선의 땅에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구원의 메시야로 전해진 서구화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믿고 살았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서구 특히 미국화되어 버린 남한 교회의 자기 뿌리를 찾는 토착화 운동이자 자본과 물질 그리고 욕망이 지배하는 오늘의 성공주의 시대에서 자유케 하는 진리를 찾아가는 역사적 예수신앙의 회복운동이기도 합니다.(2009년 7월 26일 하늘뜻펴기 중)

 

6. 하늘뜻펴기는 목사들만의 전유물인가?

 

 베드로 사도는 소아시아의 흩어진 여러 교우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언한다.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벧전 2:9) 오늘날 남한교회의 가장 큰 약점은 평신도들의 주체적 권리 곧 ‘평신도 제사장직’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하늘뜻펴기 또한 목회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닌 것이다. 글쓴이는 일 년에 여러 차례 평신도 하늘뜻펴기를 실행하고 있다.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사와 교우 간에 깊은 영적 유대감을 갖게 됨은 물론이요, 평신도들 또한 직접 하늘뜻펴기를 해봄으로 목회자들이 갖는 고민과 수고를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목사는 평신도들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에서 이해하는 하늘뜻펴기를 통해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말씀의 지평을 깨닫는다. 목회의 기본이 교인의 성숙에 있다면, 백번 하늘뜻펴기를 듣게 하는 것 보다 단 한번이라도 직접 전하게 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요즘의 평신도들은 테이프, 인터넷과 TV를 통해 하늘뜻펴기를 밤낮으로 접하고 있다. 몰라서 못하는 것은 없다. 평신도들에게 목회의 구경꾼이 아니라 주인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평신도목회이다. 주일예배가 힘들다면 수요예배를 통해 할 수 있을 것이다. 해보면 목사가 더 큰 은혜를 받는다. 성전을 허물고 세상 안으로 나아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깊이를 경험하게 된다. 더불어 공동축도까지 행할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글쓴이가 섬기는 교회에서는 몇 년 전부터 이 ‘평신도 제사장’직의 정신에 따라 함께 손을 잡고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축복의 말씀으로 서로를 위한 축도를 드리고 있다. 목사들만의 전유물로 생각하고 있던 것들을 내어 놓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번 실행해 보면 뜻하지 않은 목회의 결실과 기쁨을 얻게 될 것이다. 개신교가 가톨릭과의 가장 큰 차이라면 평신도 제사장 신학이다. 지금은 처음의 개혁정신과 성서 근본으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해야 할 때이다.

 

 7. 나가면서

 

 사람들이 예수께서 몰려가자 요한의 제자들이 이를 시기하며 보고한다. 이때 요한은 말한다.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분보다 앞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다.” “그분은 흥하여야 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요한 3장 27, 30절) 과연 그러한가 깊이 성찰해야할 부분이다.

이제 악독한 일제시대에서 교사로서 꿋꿋하게 성서의 말씀에 따라 살려 애쓰며 <성서조선>을 통해 하늘뜻펴기를 펴시다가 옥고를 치루고 끝내 가난하고 병든 민중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치유하려다가 돌아가신 김교신선생의 <조선에 필요한 기독교>라는 글을 인용함으로써 오늘 남한교회에서 하늘뜻펴기의 본뜻이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기고자 한다.

 

조선에는 부도 필요하다. 힘도 필요하다. 학문도 필요하다. 위대한 작품도 필요하다. 그러나 가장 필요한 것은 기독교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히 기독교 청년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교회의 기독교가 아니다. 제도의 기독교가 아니다. 의식의 기독교가 아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이 체험한 기독교다. 바울의 기독교요 요한의 기독교다. 성서의 기독교다. 영적 기독교다. 산 기독교다. 즉 그리스도다. 그렇다. 현재의 조선에 절실한 것은 기독교요. 그 기독교는 살아계셔 역사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다. 우리는 교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청년회를 필요로 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며, 제도와 의식을 필요로 하지 않으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그를 얻으면 우리는 전부를 얻은바 되며, 그를 잃으면 우리는 전부를 잃게 된다.

(주1) 올갠과 피아노를 사용하는 서양음악 위주의 성가대도 함께 하고 있으며 예배 중에는 국악찬송가(236곡 수록)와 21세기 찬송가를 함께 사용하고 있다.

 

(주2) 필자는 구약성서는 제1성서로 신약성서는 제2성서로 칭한다. 왜냐하면 구약 신약이라는 말의 갖는 모순 때문이다. 구약성서 안에도 새롭게 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약속(新約))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신약성서 안에도 폐기되어야 할 옛날의 약속(舊約)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서구의 성서학계는 오래 전부터 제 1, 2성서로 불러오고 있다.

 

(주3) 선교 초기에는 주로 ‘하느님’이란 용어가 사용되다가 60년대 이후 세속 신 ‘하느님’과의 구별과 유일신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이란 용어가 공식화되어 공동번역을 제외한 모든 성서가 ‘하나님’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글쓴이는 향린교회가 공동번역성서를 공식적인 성서로 사용하는 이유도 있지만, 토착화 운동의 일환과 타종교와의 열린 대화, 그리고 비기독교인들의 교회에 대한 배타적 심리를 완화하기 위한 의도로 ‘하느님’을 선호하고 있다. 국문학적으로도 공간의 무한성을 뜻하는 ‘한’과 시간의 무한성을 뜻하는 ‘늘’이 만나 ‘하늘’을 이루고 여기에 계신 ‘님’ 곧 하늘님/하느님이 옳다. 부사 ‘하나’에 ‘님’을 붙이는 것 또한 모순이다. 히브리어 ‘엘로힘’이 복수임을 감안한다면 ‘하나님’보다는 ‘하느님’이 더 옳다. 그리고 모세에게 드러내신 이스라엘 부족 신,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신의 호칭을 남한 교회는 영어 ‘Jehovah'의 번역인 ‘여호와’라고 부르고 아직도 이를 고집하지만, 세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를 ‘야훼’ 혹은 ‘야웨’라고 고쳐 부른지 오래되었다. 남한교회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주4) 시사 In 100호 2009년 8월 15일 36쪽

 

(주5) “The Decline and Fall of Christian America," Newsweek 2009년 4월 10일

 

(주6) 종교와 정치에 관련된 보다 자세한 논쟁은 글쓴이의 졸저 <양심을 습격한 사람들; 예언자와 시대정신> (한얼, 2009) 1부에 실려 있는 정용섭목사의 설교비평과 글쓴이의 반론을 참조하기 바란다.

조헌정 목사  choshalom@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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