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카륜회의는 어떤 회의인가요?
답: 카륜회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형성하는 데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는 회의입니다. 조선혁명의 지도노선을 두고 길림감옥에서부터 사색을 이어오던 김성주는 교통이 편리한 카륜에 자리잡은 진명학교에서 공청과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이 회의를 개최지의 지명을 따서 ‘카륜회의’라고 합니다.
1930년 6월 30일 카륜회의에서 김성주는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표합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군 건설 문제, 당 창건 문제, 반일민족통일전선 문제 등 조선혁명의 지도노선에 대한 김성주의 사색을 집대성한 보고서이며 주체사상을 핵으로 삼고 있습니다. 김일성 주석이 창시한 주체사상은 ‘조선혁명의 진로’라는 보고서의 형태로 이 세상에 그 맹아를 드러낸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카륜회의’를 ‘주체사상이 창시된 회의’로 인정합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것처럼 주체사상은 카륜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생년월일은 미상이지만 주체사상의 창시일은 1930년 6월 30일입니다.
‘조선혁명의 진로’에 담긴 모든 노선들은 자주적인 입장과 창조적인 입장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김성주의 사색은 맑스-레닌주의 이론에 조선혁명이라는 현실을 끼워 맞추는 방향이 아니라 조선혁명을 주인으로 삼고 그 현실에 맑스-레닌주의 이론을 창조적으로 적용시키는 방향을 향했습니다. 그 결과 보고서의 내용은 기존의 맑스-레닌주의 이론들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습니다.
카륜회의가 개최된 1930년 6월 30일은 동만지역을 참혹하게 파괴한 5.30폭동이 일어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5.30폭동은 1925년 상해폭동 5주년을 기념한다며 중국 공산당이 리립삼의 노선을 따라 일으킨 폭동입니다. 리립삼이 주창한 소위 ‘소비에트 홍군노선’은 노동자들의 무장폭동으로 대도시를 점령하겠다는 좌경모험주의노선이었습니다.
‘리립삼 노선’이라는 잘못된 지도노선의 후과는 너무도 컸습니다. 특히 동만에서 5.30폭동은 일본제국주의자들과 중국의 반동군벌들로 하여금 만주지방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반일애국투쟁을 탄압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을 주었습니다.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은 가혹한 백색테러에 노출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공산주의자들이 희생을 당했고 그들 중 대다수는 조선인들이었습니다. 주민 구성의 대다수도 조선인인데다가 애초에 만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시작한 선구자들이 조선인들이었기에 공산주의자들의 절대다수가 조선인들이었습니다. 만주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들은 방향을 전환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만주에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는 연속적인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일제는 조중인민들 사이를 이간하기 위해 조선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킨 것은 중국인들로부터 만주 땅을 빼앗기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였습니다. 봉천군벌은 일제의 간계에 넘어가서 폭동군중을 잔인하게 탄압하였습니다. 군벌의 우두머리들은 일제의 악선전을 사실로 믿고서 조선사람은 공산당이며 공산당은 일제 놈의 앞잡이기 때문에 모두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닥치는 대로 폭동군중을 살해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라는 죄로 길림감옥에 투옥된 김성주가 1930년 5월 초에 출옥하지 못하고 감옥에서 5.30폭동을 맞았다면 중형을 피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이 있기 때문에 김일성 주석이 손정도 목사를 굳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회고한 것입니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손정도 목사가 김성주를 감옥에서 빼주려고 힘을 좀 써준 것이 그렇게도 대수인가?’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손정도 목사가 봉천군벌에게 백방으로 손을 쓰고 뇌물도 주고 압력도 넣어서 김성주를 1930년 5월 초에 길림감옥에서 빼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지구상에 등장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길림감옥에서 갓 나온 김성주는 채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리립삼 노선’에 의해 참혹하게 전개되는 5.30폭동의 후과를 목도하면서 사도황구로 피신하여 조선혁명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할 새로운 지도노선을 구상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합니다. 이 사도황구 회의의 결과를 발전시켜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지도노선을 제시한 보고서가 ‘조선혁명의 진로’입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 조선혁명군을 조직하고 2천만 인민대중의 힘을 하나로 묶어 무장투쟁을 전개할 데 대한 전민항전 노선, 2천만 인민대중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한 반일민족통일전선 노선, 반일민족통일전선을 지도하고 이끌어 갈 당을 기층으로부터 창건할 데 대한 당 건설 노선 등을 담고 있으며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조선혁명의 진로’에 담겨있는 모든 내용은 주체사상으로 관철되어 있습니다. 주체사상의 ‘인민대중제일주의’는 ‘조선혁명의 진로’의 알파이자 오메가입니다. ‘조선혁명의 진로’가 담고 있는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인이며 혁명을 추동하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 철학으로 정식화되어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리로 정립되었습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주체사상의 사상적 알맹이를 담고 있는 종자입니다.
주체사상은 철두철미하게 조선혁명의 실천과정에서 피땀으로 점철되어 역사 속으로 걸어 나온 사상이기에 항일무장투쟁사의 실천과 경험을 염두에 두어야 온전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역으로 항일무장투쟁사는 주체사상을 지도사상으로 삼고 주체사상이 제시하는 노선에 따라 조선혁명의 진로를 개척한 역사이기에 주체사상을 깊이 이해하여야 역사의 갈피들을 올바로 꿰어낼 수 있습니다. 주체사상과 항일무장투쟁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주의 조선이 지금도 사상교양과 혁명전통교양을 강조하는 이유입니다.
김성주는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였기에 조선혁명의 방도를 일제에 반대하는 2천만의 총동원으로 이루어지는 거족적인 항전에서 찾았습니다. 거족적인 항전을 위해서는 무장투쟁을 담당할 혁명적 무장력인 군대가 필요하며, 그 군대를 거족적으로 지지 지원할 인민대중의 단합된 통일전선이 있어야 하고, 그 통일전선을 지도할 혁명의 참모부인 혁명적 당을 창건해야 합니다. ‘조선혁명의 진로’는 이러한 과제들과 함께 그 해결 방도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조선혁명의 진로’가 말하는 거족적인 ‘전민항전’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전민항전’의 개념을 염두에 두느냐의 여부에 따라 전체 항일무장투쟁사는 전혀 다르게 드러납니다. ‘전민항전’으로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사에 있어 전투의 주체는 ‘군대’이지만, 전쟁의 주체는 ‘인민대중’입니다.
‘인민대중’이라는 바다 속에서 ‘군대’라는 물고기가 활약할 수 있었습니다. 바다인 ‘인민대중’에서 물고기인 ‘군대’를 분리시켜서 군사에만 초점을 맞춰 항일무장투쟁사를 연구하는 것은 물에서 건져내어 죽어버린 물고기의 사체를 해부하면서 물고기의 생리를 이해하겠다는 시도만큼이나 허망한 시도입니다. 항일무장투쟁사 연구는 반드시 ‘군대’와 ‘인민대중’을 혼연일체로 파악하는 ‘군민일치’의 관점에서 진행해야 역사의 바다에서 ‘진리’라는 물고기를 건져 올릴 수 있습니다.
김성주는 카륜회의 직후 ‘조선혁명군’을 결성합니다. ‘조선혁명군’은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의 핵심들로 구성된 무장조직이며, 상비적인 혁명무력 창건 이전에 그 토대를 닦기 위한 과도적인 정치 및 반군사조직이었습니다. 정치군사활동을 통해 무장투쟁의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고 무장투쟁을 전개하는데 필요한 경험을 축적하기 위한 조직이었던 것입니다. 조선혁명군 결성식은 1930년 7월 6일 삼광학교 운동장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조선혁명군에는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 방향을 전환했던 독립군 출신 대원들도 다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항일무장투쟁의 대중 지반 축성을 위해 애국적인 인민대중들을 찾아 만주 일대와 국내로 파견되었습니다. 국내로 파견된 국내공작소조에는 김형직 선생의 동생이자 김성주의 삼촌인 김형권 선생도 있었습니다. 김형권 선생은 투쟁과정에서 밀정의 밀고로 1930년 9월 초에 체포되어 징역 15년형을 언도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6년 초에 옥사하였습니다.
한편, 혁명적 무장력인 ‘군대’가 ‘인민대중’의 바다 속을 유영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치적인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군대를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주체는 ‘당’입니다. 김성주는 조선혁명군을 결성하기 직전인 1930년 7월 3일 새로운 형태의 당 조직을 결성합니다. 그것이 조선로동당의 첫 당 조직인 ‘건설동지사’입니다.
당시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에서는 ‘1국 1당제’의 원칙을 내걸고 있었기에 만주에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독자적인 당 건설은 불가능했습니다. 1928년 조선공산당 해체 이후 만주의 많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공산당으로 전당하기 위해 줄을 섰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투쟁경력을 위주로 하여 전당을 받겠다고 하자, 조선 공산주의 운동의 각 파벌들은 자 파의 투쟁경력을 치장하기 위해 중국 공산당의 지도노선인 ‘리립삼 노선’에 맹종맹동하며 준비도 채 되지 않은 인민대중들을 폭동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어 무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이것이 1930년 만주 5.30폭동의 진상입니다.
김성주가 지도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의 행보와 단호히 결별하였습니다.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이 당시 중국 공산당의 지도노선인 ‘리립삼 노선’을 내세울 때,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을 위한 새로운 노선을 구상하여 ‘조선혁명의 진로’를 내놓았습니다.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공산당으로 전당하기 위해 줄을 서고 있을 때,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혁명을 지도할 공산주의자들의 첫 당 조직인 ‘건설동지사’를 결성하였습니다. 요컨대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국제당이나 큰 나라의 당의 지시에 맹종하는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의 ‘사대주의’와 과감히 결별하고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자주’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김성주와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국제공산당 코민테른의 ‘1국 1당제’의 원칙을 존중하면서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혁명의 주인이며 자신들의 당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신념을 관철시켜, 첫 당 조직 ‘건설동지사’를 당 중앙을 선포하지 않고 기층 당을 먼저 내오는 방식으로 건설하였습니다. ‘건설동지사’의 결성으로 이제 김성주와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본격적으로 민족해방을 위한 항일무장투쟁에 나서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갖추게 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