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반일인민유격대는 어떻게 탄생하였나요?
답: 반일인민유격대는 1932년 4월 25일 안도현 토기점골 등판에서 창건식을 가지고 탄생하였습니다. 주로 학생 출신과 농민 출신으로 이루어진 100여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중대 단위의 무장력이었으며 대장은 김일성(카륜회의 이후부터 김성주는 김일성으로 불립니다)이었습니다. 이후 연길, 왕청, 훈춘, 화룡을 비롯한 동만의 다른 지방들에서도 유격대들이 연이어 조직되었습니다. 북만과 남만에서도 김책, 최용건, 리홍광, 리동광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유격부대들이 잇따라 태어났습니다.
1932년 만주에서 항일유격부대들이 대거 등장한 이유는 바로 그 전 해인 1931년에 엄청난 급변사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하여 전쟁을 도발한 9.18사변이 그것입니다. 9.18사변은 그렇지 않아도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에게 가해진 채찍질과도 같았으며, 유격대를 건설하여 항일무장투쟁을 본격적인 궤도에 올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1932년의 반일인민유격대 창건 과정을 해설하기 위해서는 9.18사변이 있었던 1931년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김일성은 1931년 연길현(당시, 현재는 안도현) 명월구에서 5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이를 각각 ‘봄 명월구 회의’, ‘겨울 명월구 회의’라고 합니다. 이 두 회의의 가운데인 9월 가을에 9.18사변이 벌어집니다. 9.18사변 전에 개최된 ‘봄 명월구 회의’는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위해 대중을 전취하자는 결론을 낸 회의이며, 9.18사변 이후 개최된 ‘겨울 명월구 회의’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자는 결론을 낸 회의입니다.
김일성은 1931년 5월 중순 명월구에 있는 리청산의 집에서 당 및 공청 간부회의를 열었습니다. 이것이 ‘봄 명월구 회의’입니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배격하고 혁명적 조직노선을 관철하자’는 제목의 연설을 합니다. 김일성은 이 회의를 통하여 첫째, 리립삼 노선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는 조건에서 5.30폭동을 총화하여 종파 사대주의자들의 출세주의와 공명주의, 소부르주아적 영웅주의에 경종을 울리고, 둘째, 광범한 군중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묶어세울 수 있는 올바른 조직노선, 즉 ‘반일통일전선노선’을 제기하고자 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5.30폭동의 본질을 심각하게 분석총화하였으며 기본군중을 튼튼히 결속하고 그 주위에 각계각층 반일역량을 굳게 단결시켜 전체 민족을 하나의 정치적 역량으로 단합시킬 데 대한 혁명적 조직노선, ‘반일통일전선노선’을 제기하였습니다. 회의에서는 반일통일전선노선을 관철하기 위한 과업으로 지도핵심을 튼튼히 꾸리고 그들의 자립적 역할을 높일 데 대한 문제, 파괴된 대중단체들을 복구정비하고 거기에 각계각층의 군중을 받아들일 데 대한 문제, 실천투쟁 속에서 대중을 단련시킬 데 대한 문제, 조중 인민들 사이의 공동투쟁과 친선단결을 강화할 데 대한 문제가 논의되었습니다. 또한 작은 규모의 투쟁으로부터 큰 규모의 투쟁으로, 경제투쟁에서 점차 정치투쟁으로 발전시켜나가며 합법적 투쟁과 비합법적 투쟁을 능숙하게 연결시켜나갈 데 대한 전술적 원칙들을 규정하면서 좌경모험주의적 경향을 철저히 극복할 데 대한 문제가 특별히 강조되었습니다.
1931년 5월의 ‘봄 명월구 회의’는 한마디로 말하여 ‘대중 전취를 위한 회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김일성이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때린 이유는 그 노선이 비과학적이기도 하였지만 무엇보다도 인민대중을 전취하는 데서 제일 큰 장애물이 되는 노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동만에서 활동하던 종파 사대주의자들은 ‘계급혁명론’을 부르짖으면서 빈고농들과 노동자들만을 조직에 받아들이고 그 밖의 계층에 대해서는 다 혁명과 인연이 없는 대상으로 단정하고 배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습니다. 이런 풍토 속에서는 항일무장투쟁의 기본 전제인 인민대중의 바다를 만들어 낼 수도 없었고, 그 바다 속에서 활동할 항일유격대를 탄생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봄 명월구 회의’는 무장투쟁의 방도를 의제로 삼지는 않았지만, 항일무장투쟁의 대전제가 되는 인민대중의 바다를 만드는 ‘반일통일전선노선’을 제시하였기에 항일무장투쟁사 전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봄 명월구 회의’에서 좌경 노선의 폐쇄적 경향을 타파하고 각계각층의 애국역량을 하나로 묶어세우자면 기존 고전의 명제나 다른 큰 나라들의 경험에만 매달리려는 사대주의, 교조주의적 경향을 극복하고 그 모든 애국역량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포섭하고 수용하여 혁명의 주인인 인민대중의 창조적 힘을 최대한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반일통일전선노선’을 제시한 것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표방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 형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일성은 1931년 여름과 초가을에 걸쳐 ‘봄 명월구 회의’의 결론에 따라 화룡, 연길, 왕청 일대의 자방 조직들에 나가서 5.30폭동 이후 흩어졌던 대중을 묶어세우는 사업을 하고 있다가 9.18사변의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9월 19일 이른 아침에 김일성에게 관동군이 봉천을 공격한 9.18사변의 소식을 전해준 이는 중국인 공산주의자 진한장이었습니다. 평소 일제의 침략에 수난을 겪고 있는 전체 조선민족과 조선인 공산주의자 김일성을 동정하던 진한장은 졸지에 수난의 당사자가 되었습니다.
9.18사변은 일제의 자작극입니다. 일제의 특수부대인 관동군 특무기관이 장학량 군대의 군복을 입고 1931년 9월 18일 밤 심양 북대영 서쪽 류조구에서 일본 만철회사 소유의 철도를 폭파하고서 장학량 군대가 일본 수비대를 공격했다고 뒤집어씌우고 심양, 안동, 영구, 장춘, 봉성, 길림, 돈화와 같은 동북지방의 대도시들을 연달아 점령하고 마침내 만주 전역을 침공하여 점령하였습니다. 상대방의 군복을 입고 아군을 공격하여 전쟁을 유도하는 패턴은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세력의 나쁜 버릇입니다.
당시 만주에서 장학량이 통솔하던 동북군은 30만이었습니다. 30만의 동북군은 만주에서 총 한 방 쏘지 않고 모조리 중국 관내로 철군하였습니다. ‘일본군 침공 시 백방으로 충돌을 피하라’는 장개석의 명령서 때문입니다. 장개석은 중국의 동북지방을 일제에게 내어주더라도 관내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반공병자였습니다. 비록 제1차 국공합작이 깨어지긴 했지만 손문의 제자를 자처했던 장개석과 그 장개석 군대의 제2인자인 장학량에게 일말의 민족적 양심을 기대했던 중화민족의 아들이자 애국적 공산주의자 진한장의 소망은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9.18사변 직후 만주에는 일시적인 무정부 상태가 형성됩니다. 일제 침략군은 전과를 확대하기 위해 관내 방향의 전선으로 전진하고 있었고, 만주를 통치하던 군벌들은 그 이전에 관내로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무주공산이지만 곧 일본군이 진주하여 식민지로 전락할 만주의 형세를 목도하면서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발빠른 분해과정을 겪게 됩니다. 친 장개석 성향의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전 날의 활동거점들을 버리고 관내로 퇴각하는 장학량 군의 뒤를 따라 금주로, 장사로, 서안으로 달아났고, 민족주의 독립군들은 만주도 왜놈들이 먹은 마당에 죽더라도 집에 가서 죽자며 낙담하여 무기를 땅에 묻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편, 민족개량주의자들은 때를 만난 듯이 친일을 부르짖었습니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작금의 정세를 ‘혁명의 퇴조기’라고 규정한 지난날의 좌경 모험주의자들은 하루아침에 우경의 끝에 서서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를 외쳐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일성은 9.18 직후의 정세를 ‘혁명의 고조기’로 판단합니다. 전쟁 승리를 위하여 일제가 미쳐 날뛰게 되면 민족적 모순과 계급적 모순이 극에 달할 것이고 조선민족의 반일 기운은 고조될 것이다, 우리가 무장대오를 조직하고 항일전쟁을 시작하면 인민대중이 물심양면으로 우리를 적극 지지성원해 줄 것이다, 이제 만주가 침공 당했으니 중국의 수억만 인민대중도 거족적인 반일항전에 나설 것이다, 중국의 공산주의자들과 애국자들은 어제의 동정자에서 내일의 동맹자가 되어 조선인 공산주의자들과 한 전호에서 같은 과녁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익측에는 언제나 중국인민이라는 위대한 동맹자, 동맹군이 있게 될 것이다, 라는 등이 그러한 정세 판단의 이유였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이나 교조적 공산주의자들이 ‘군대’를 중심으로 정세를 판단할 때, 김일성을 비롯한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은 ‘인민대중’을 중심으로 정세를 판단한 것입니다.
김일성은 혁명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1932년 가을 ‘추수투쟁’을 전개합니다. 간도지방의 추수투쟁은 초기에 소작료를 낮추기 위한 합법투쟁으로 시작하였으며, 폭력을 기본수단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폭력이 발동된 것은 투쟁위원회의 소작료 감면 요구를 완강히 거부해나서는 악질 지주들과 농민들의 투쟁을 총검으로 탄압하는 군경들에 한해서였습니다. 10여만의 간도 농민들은 1931년 9월부터 그 해 말까지 피어린 투쟁을 이어가 결국 승리하였습니다. 추수투쟁 승리의 경험으로 동만 지방의 인민대중들은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신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931년 가을의 추수투쟁 과정에서 배출된 수많은 청년 혁명가들이 다음 해 동만의 각 현들에서 조직된 유격대의 골간들이 되었습니다. 1931년의 추수투쟁은 1932년에 결성되는 유격대오의 골간들을 양성하는 사전 준비 작업이었던 셈입니다. 김일성은 추수투쟁이 진행되던 1931년 10월에 함경북도 종성 지방에 나가 광명촌 청년회 회장으로 사업하는 최성훈의 집에서 국내정치공작원들과 지하조직책임자들의 회의를 열고 무장투쟁과 관련한 국내혁명조직들의 과업에 대해 토의하였습니다. 새세대 공산주의자들이 전개하려는 무장투쟁의 최종 목적은 조선의 해방이었기에 만주의 무장투쟁은 국내 인민대중들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보조를 맞추어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됩니다.
김일성은 1931년 12월 중순 경에 명월구에서 당 및 공청 간부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무장투쟁 준비사업을 총화하고 무장투쟁의 구체적인 방도와 전략전술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이 회의를 ‘겨울 명월구 회의’라고 부릅니다. 만주에서의 무장력 창건을 위해서는 중국 공산주의자들과의 협조가 필수적이었기에 동만특위의 서기인 동장영도 초대한 이 회의에는 차광수, 리광, 채수항, 김일환, 량성룡, 오빈, 오중화, 오중성, 구봉운, 김철, 김중권, 리청산, 김일룡, 김정룡, 한일광, 김해산을 비롯한 40여명의 청년 투사들이 참가하였습니다. 회의 안건과 회의 참가자, 회의 순서 문제를 토의하는 예비회의 이후 진행된 본회의는 10여 일간 지속되었습니다.
김일성은 회의를 통해 항일무장투쟁의 주도적인 투쟁형태를 ‘유격전’으로 할 것을 제안하였습니다. 전쟁의 형태에서 정규전이 주도적인 것이고 유격전은 보조적인 것이라는 당시의 상식을 벗어난 주장이었습니다. 국가가 없는 실정에서 정규전으로 일제와 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변화무쌍한 유격전이야말로 항일전쟁의 기본 무장투쟁 형식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강대한 일본 침략군과 싸워 이기자면 소부대와 대부대의 영활한 배합작전, 기습전, 매복전, 정치활동, 정치공작, 생산활동 등 군사, 정치, 경제활동을 다 벌려야 하며 그러자면 자유자재로 분산과 집중을 거듭하면서 전쟁을 할 수 있는 유격대를 조직해야 한다고 설명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유격전을 ‘인민전쟁’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유격전의 후방은 국가가 아니라 ‘인민’이며, 대원의 충원도 ‘인민’ 속에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민을 믿고 항일전쟁을 하려고 결심하였다, 인민이 국가이고 인민이 후방이며 인민이 정규군이다, 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인민대중을 믿고 항일전쟁을 결심하였으며, 항일전쟁에서 이기는 모든 힘도 인민대중에게서 나온다는 김일성의 이 고백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 기둥이 되는 ‘이민위천’, ‘자력갱생’의 사상과 맞닿아 있습니다.
회의에서는 유격대를 단계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문제, 유격대의 근거지를 정하는 문제, 근거지를 운영하고 유지하는 문제, 무장투쟁을 위한 대중적 지반을 축성하는 문제, 조중 인민의 반일공동전선을 형성할 데 대한 문제, 당 조직사업과 공청사업을 강화할 데 대한 문제 등도 토의되었습니다. 회의에는 동장영을 비롯한 중국인 공산주의자들도 여러 명 참여하여 조중 인민들의 공동무장투쟁의 토대를 닦았습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결성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넘어야 할 산은 ‘구국군’이었습니다. 구국군은 구 동북군 소속으로 장학량이 관내 도주 시 퇴각하지 않고 반변하여 항일의 기치를 들고 나온 중국의 반일부대입니다. 문제는 이 구국군이 장개석과 국민당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기에 덮어놓고 공산주의자들을 적대하는 반공병자들인데다가 9.18사변 이후 조선인들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만주를 뺏으려 한다는 일제 발 유언비어까지 돌아서 보이는 족족 조선인 유격대원들을 잡아다 학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소사하에 있는 김정룡의 집에서 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국군 우사령의 부대로 찾아가 유격대의 별동대 편입을 제안하기로 하였습니다. 동만에서 제일 큰 구국군은 왕덕림 부대였고, 그 부하들 중 하나인 오의성의 휘하에 있으면서 안도에 자리 잡은 것이 우사령의 부대였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우사령을 찾아간 김일성은 뜻밖에도 우사령의 참모장으로 있던 길림 육문학교 시절 한문 교사 류본초 선생과 조우하여 우사령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타결하고 반일인민유격대를 우사령 부대의 조선인 별동대로 삼는다는 것을 인정받게 됩니다. 이로써 반일인민유격대는 합법화되어 더 이상 구국군을 피해 다닐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의 담판으로 행동의 자유를 쟁취한 반일인민유격대는 1932년 4월 25일 토기점 등판에서 창건식을 가지는 한편, 며칠 뒤인 5월 1일에는 노동절을 맞아 붉은 기를 앞세우고 구국군이 점령하고 있는 안도현성에 입성하여 나팔을 불고 북을 두드리면서 보무도 당당하게 열병행진을 거행하며 다가오는 항일대전을 준비하게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