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주석과 윤재순 여사(앞줄 오른쪽 첫번째).
김일성 주석과 윤재순 여사(앞줄 오른쪽 첫번째).

▲ 문: 량세봉은 누구인가요?

답: 량세봉은 민족주의 계열의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 등의 3부가 통합하여 만든 ‘국민부’의 군 통수권자로서 국민부의 군대인 ‘조선혁명군’의 총사령관이었습니다. 1932년 량세봉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은 남만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안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직후 량세봉 사령관을 찾아서 남만으로 행군합니다. 이를 ‘남만원정’이라 합니다. 동만에서 출발하여 멀리 남만으로 다녀왔다는 뜻입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 속에서는 많은 지명이 등장합니다. 세세한 지명이야 그렇더라도 커다란 지도는 머리에 넣어두는 것이 좋습니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만주’라고 부를 때, 동만주, 북만주, 남만주로 지역을 구분합니다. 서만주는 없습니다. 여기에서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만주는 남만주와 동만주입니다. 남만주는 압록강, 동만주는 두만강의 대안(건너편)에 있습니다. 북만주는 동만주의 북쪽 지역입니다. 이들 지역을 남만, 동만, 북만이라고 부릅니다.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안도현은 두만강 건너 동만에 있습니다. 여기에서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압록강 대안의 통화현은 남만에 속합니다. ‘남만원정’은 동만의 안도현에서 남만의 통화현으로 갔다가 돌아온 원정입니다.

중국의 동북지방을 ‘간도’라고 부를 때도 있습니다. 이때는 간도를 ‘서간도’와 ‘북간도’로 구분합니다. 동간도나 남간도는 없습니다. 지역적으로 서간도는 남만과, 북간도는 동만과 일치합니다. 조중 국경은 동서로 길게 뻗어 있기에 서간도에는 평안도 사람들이 북간도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넘어가기 편했습니다. 평안도, 압록강, 서간도, 남만과 함경도, 두만강, 북간도, 동만을 한 묶음씩 머리에 넣어두시면 좋습니다.

여담이지만 공산주의 계열은 ‘만주’를, 민족주의 계열은 ‘간도’를 선호하는 듯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항일무장투쟁사를 서술하면서 동만, 남만, 북만의 지역 구분을 주로 사용합니다.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한국교회사를 서술하면서 서간도, 북간도의 지역 구분을 주로 사용합니다. 양측에서 공히 많이 다루는 곳이 ‘용정’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항일무장투쟁사에서는 ‘용정’을 ‘동만’에서 공산주의 항일무장투쟁을 가장 열렬히 지지 원호해 준 후방 거점 중 하나로 서술하고, 대한민국의 한국교회사에서는 ‘용정’을 ‘북간도’에서 그리스도교 복음에 기초한 애국적인 신앙공동체가 꽃피어 난 중심지로 기리고 있습니다. 용정에서 태어난 문익환 목사가 동만에서 활동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사건은 가히 ‘북간도’와 ‘동만’의 만남이라 하겠습니다. 필자는 이 사건을 ‘그리스도교’와 ‘주체사상’의 대화 사건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량세봉은 평안북도 철산군 태생입니다. 3.1운동 전야에 압록강을 건너 남만의 흥경현으로 들어갔습니다. 량세봉은 흥경 땅에서 김형직 선생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김형직 선생은 1894년생, 량세봉은 1896년생입니다. 두 살 터울인 이들은 의형제를 맺습니다. 이 때 같이 맺은 의형제가 1895년생 김시우입니다. 김시우가 화전현의 총관으로 있으면서 화성의숙 시절 김성주를 돌보고 육문중학교에 소개신을 마련해준 것처럼, 량세봉은 화성의숙에 김성주의 소개신을 썼고 길림 육문중학 시절에도 경제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자 김일성을 길러낸 사람들은 아버지 김형직 선생의 의형제들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량세봉은 통의부에서 검무관으로 활동하다가 정의부가 구성된 다음에는 중대장으로 임명되어 송암 오동진의 총애를 받는 중견 간부가 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중대가 주둔했던 곳이 무송이었으며, 그때 김형직 선생 또한 무송에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김성주가 량세봉을 만난 것도 무송시절이었습니다. 김형직 선생의 살아생전 필생의 사업이 민족유일당 건설과 독립군 부대들의 통합이었는데 선생의 피땀이 스미어 탄생한 통합정부 ‘국민부’와 민족유일당 ‘조선혁명당’의 정규 혁명무력인 ‘조선혁명군’의 사령관을 량세봉이 맡게 되었으니 그 형에 그 아우라 할 것입니다.

김일성이 1930년 카륜회의에서 ‘조선혁명의 진로’를 발표하고 군대 건설을 위한 맹아로서 만든 정치 및 반군사 조직의 명칭이 ‘조선혁명군’이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의 동무들 중 ‘조선혁명군’이라는 이름이 밋밋하고 고리타분하다고 투덜거린 이들이 있었습니다.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의 이름과 꼭 같았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이 때 이미 김일성은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와 합작을 이루어야 한다는 통일전선노선의 정당성과 진리성을 확신하면서 머지않아 이루어질 항일부대들의 합류를 내다보고 있었다고 추정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망은 김일성만의 것이 아니라 아버지 김형직 선생으로부터 대를 이어 계승된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김일성이 남만원정을 떠난 것은 다음 세 가지의 과업을 해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첫째로 반일인민유격대를 실천투쟁 속에서 단련시키기 위하여, 둘째로 부대를 질적 양적으로 급속히 확대강화하기 위하여, 셋째로 혁명군대가 의거할 대중적 지반을 튼튼히 축성하고 유격대의 주위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묶어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 량세봉은 남만의 통화지방에 자리 잡고 당취오의 자위군과 합작하여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성과적으로 타승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량세봉과의 합작으로 독립군 부대와의 통일전선을 어떻게 하나 성사시키려 하였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과업을 해결할 수 있는 첩경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량세봉의 묘비.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치된 량세봉의 묘비.

1932년 6월 29일 저녁 김일성이 인솔하는 반일인민유격대는 통화현성에 입성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량세봉과 면담하였으나 량세봉은 극좌 모험주의에 사로잡힌 소위 ‘공산주의자’들의 행태에 염증을 느꼈던 차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드러냅니다. 이날 밤에 열린 환영회에서 ㅌ.ㄷ 성원들과 정치공작원들의 영향을 받은 독립군 부대의 하층 병사들은 반일인민유격대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량세봉이 반공연설을 하여 좌중의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곧이어 독립군이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유격대는 통화에서 벼락같이 철수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독립군과의 담판을 결렬로 판단하고 실망하는 참모장 차광수에게 중요한 것은 상층의 표정이 아니라 환영회에서 보여준 하층 병사들의 태도이며 합작의 장래는 거기에 있다고 강조하였습니다. 량세봉이 진짜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는지의 여부는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있었습니다. 김일성 자신은 설령 량세봉이 정말 무장해제를 획책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사상의 미숙에서 비롯된 것이니만큼 독립군과의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량세봉의 사상 발전을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체험이 소모되어야 한다고 보았을 뿐입니다.

사건의 진상은 4년 후인 1936년 부대를 이끌고 조선인민혁명군에 귀순하여 온 독립군의 사령관 최윤구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의 무장을 해제할 음모를 꾸민 것은 량세봉이 아니라 량세봉 수하에 있는 참모였다는 것입니다. 원래 량세봉은 합작에 마음이 있었는데 그 참모가 반공을 강하게 주장하며 합작을 반대하였고 나중에는 자기 심복부하들과 함께 유격대의 무장해제까지 모의하였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이 이 사실을 알게 된 때는 이미 1934년 량세봉이 일제의 간계에 빠져 희생된 다음이었습니다.

량세봉은 임종 전야에 반공에서 연공(공산주의자들과 힘을 합치고 연합함)에로 방향전환을 합니다. 1934년이면 조중 두 나라 혁명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주도 세력으로 등장하였을 때입니다. 량세봉은 공산주의자인 양정우의 부대와 공동행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이 동만에 있지 않고 남만에 있었다면 반드시 합작하여 공동투쟁에 나섰을 것입니다. 중국인 공산주의자 양정우와도 합작을 하는데 조선인 공산주의자 김일성과 합작 못할 이유는 없었을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량세봉 부대가 김일성 부대와 손을 잡는 것을 제일 두려워하였습니다. 만주에서의 조선인 민족주의 부대와 공산주의 부대의 정치군사적 통일과 공동 항일은 일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싫은 사변이었을 것입니다. 이를 막기 위해 일제는 량세봉을 살해하고 독립군을 내부로부터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를 계획적으로 추진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봉천 헌병대, 조선총독부 후쿠시마 기관, ‘일본 관동군 특무기관 동변도 유격대’ 등이 관여하였습니다.

량세봉을 살해하기 위한 작전비로 10여 만 원의 돈이 투하되었으며 박창해를 비롯한 흥경의 밀정들도 이 작전에 동원되었습니다. 일제는 량세봉을 유인하기 위해 평소에 독립군을 협조해주던 배신자 왕명번을 파견하였습니다. 왕명번은 중국 항일군이 독립군을 원조하기 위해 사령관 면담을 요청했다고 속이고 량세봉을 유인하였으며 매복하고 있던 일본군의 일제 사격으로 량세봉은 희생당하였습니다. 1934년 9월 20일에 일어난 일입니다.

량세봉 사후 시신을 수습한 환인현의 조선사람들은 시신을 뺏기지 않으려고 마을 뒷산에 그의 유해를 평토장으로 안장하였습니다. 일본 군경들은 그 묘마저 파헤치고 고인의 머리를 베어 통화시가에 걸어놓았습니다. 량세봉의 유가족들도 모진 학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일만 군경들의 박해에 시달리다 못해 량가성을 김가로 고치고 철도에서 천 여 리나 떨어진 환인현의 심산벽촌에 들어가 두더지 같은 생활을 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해방 후 남만에 일군들을 파견하여 량세봉의 유가족들을 조선에 데려오게 하였습니다. 그 일군을 따라 량세봉의 부인 윤재순 여사와 아들 딸, 사위가 조선으로 나왔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량세봉의 아들 량의준을 만경대혁명학원에서 공부시켰습니다. 1948년 4월 연석회의 때 이 학원을 참관한 백범은 거기서 량세봉의 아들을 만나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만경대혁명학원은 빨치산 투사들의 자녀들만 양육하는 줄 알았는데 그곳에서 민족주의 독립군의 자제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김일성 주석은 이 학원에서는 빨치산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국내에서 노조, 농조활동을 하다가 희생된 애국자의 자녀들도 있다, 나라를 위해 싸우다 순국한 애국자라면 그가 어떤 계열이든지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다, 라고 답합니다.

량의준은 학원을 졸업하고 공군부대의 정치일군으로 복무하였으나 1957년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합니다. 량의준에게는 량철수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량철수는 소아마비의 후과로 신체에 장애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조선로동당에서는 그를 인민학교도 보내고 고등중학교에도 보내고 대학에도 보내어 14년 간 비장애인들과 꼭 같은 교육과정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그가 김일성종합대학을 다니는 4년 동안 그의 동무들은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휠체어에 태워 17층에 있는 교실까지 오르내렸습니다. 량철수는 조선작가동맹 아동문학작가가 되었습니다.

량철수에게는 2남 1녀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혈통을 따지면 그들은 량세봉의 증손자, 증손녀들입니다. 량철수가 1956년생이고 그의 자녀들 2남 1녀 중 장남이 1982년생이니 이제는 량세봉의 고손자, 고손녀들이 한창 자라고 있을 것입니다. 추석 명절이 오면 그들도 부모들을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는 고조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들이 고조할아버지의 묘소가 대한민국 서울시 동작구 국립 서울 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와 일본 제국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동군 635부대 헌병 수습사관으로 복무한 뒤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로 진급했던 박정희는 1960년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 두 해 후인 1962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량세봉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서울 현충원에 있는 량세봉의 묘는 가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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