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반성위는 누구인가요?
답: 반성위는 1933년 4월경에 동만특위로 파견된 국제당의 순시원입니다. 남만원정에서 동만으로 돌아온 김일성은 왕청현의 소왕청 유격구에서 유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는데 동만특위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왕청 유격구로 들어왔습니다. 동만의 공산주의 운동을 총괄 지휘하는 동만특위가 자리 잡자 소왕청은 간도혁명의 중심지가 되고 수도로 되었습니다. 국제당 파견원 반성위를 데리고 김일성에게 소개하러 온 사람은 동만특위의 서기인 동장영이었습니다.
지명과 기관명이 많이 나오는데, 먼저 ‘지명’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조선의 동북단 끝에 중국 쪽으로 뾰족하게 솟은 부분에 온성군이 있습니다. 온성군은 조선의 최북단에 있는 육읍 지구(경원, 경흥, 부령, 온성, 종성, 회령) 중 한 곳입니다. 온성군에서 두만강은 동남방향으로 꺾이어 동해로 흘러듭니다. 함경북도 온성군의 대안(맞은편)인 두만강 건너에는 중국의 왕청현이 있습니다.
왕청현에는 유격근거지가 두 개 있는데, 북쪽에 요영구 유격구가 있고, 조선과 가까운 남쪽에 소왕청 유격구가 있습니다. 김일성이 소왕청 유격구에 자리 잡은 이유는 조선의 육읍 지구와 가장 가까운 유격구이기 때문입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초기부터 김일성이 ‘국내진공투쟁’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왕청현은 간도의 여러 현들 중에서도 반일독립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곳입니다. 백전노장 홍범도가 일본군 토벌대를 대패시킨 전장도 이곳에 있었고 서일, 김좌진, 리범석 등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독립군의 활동기지도 이곳에 있었습니다. 리동휘는 이 일대에서 ‘대전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 인재양성에 심혼을 바쳤습니다. 독립군의 맹활약과 독립운동자들의 출몰은 이 지방 인민들의 민족적 각성을 촉진시켰고 그들을 반일애국투쟁으로 힘차게 고무하고 추동하였습니다.
1920년대를 거치며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 운동은 조락단계에 들어서고 독립운동 지도자들도 연해주 지방과 소련 경내로 자취를 감추었지만 왕청 지방에서 그들의 빈자리는 공산주의자들이 채워나갔습니다. 민족주의 운동에서 전환된 공산주의 운동은 만주에서의 조선 민족해방투쟁을 단절 없이 이어갔습니다. 여기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민족주의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의 계승 관계입니다.
‘사상 사조’로서의 민족주의 사상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혁신’되었음이 분명하지만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민족주의 운동은 공산주의 운동으로 ‘계승’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운동의 ‘동력’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주체로 등장하였던 사람들 중에서 압도적 다수가 공산주의 운동에로 방향전환을 하였습니다. 1920년대까지 만주에서 조선인 민족주의 운동가들이 열심히 밭을 갈고 거름을 주었기 때문에 1930년대부터 만주의 공산주의 운동이 활짝 피어날 수 있었습니다. 1932년 기준으로 간도 지방의 인구 53만 중 8할과 공산당원들과 공청원들의 9할 이상이 조선사람이었습니다.
동만의 왕청 지역은 조선 민족해방운동의 ‘계승과 혁신’이 확연하게 목도된 지역입니다. 왕청의 민족주의 독립군 부대가 조국의 육읍 지구로 진출하였던 바로 그 물목에서 공산주의 유격대는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북간도’로 추적해 온 일본군을 도륙 낸 봉오동과 청산리의 민족주의 독립군을 이어 ‘동만’ 곳곳의 유격근거지들에서는 공산주의 유격대가 일본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의 연합부대를 소멸시켰습니다. 김일성이 민족주의자들이 계몽시킨 애국적 조선 인민들이 모여 있는 골짜기들을 중심으로 공산주의 유격근거지를 만든 이유는 조선 혁명의 ‘동력’을 ‘계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음으로 ‘기관명’을 설명 드리겠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역사에서는 지명들만큼이나 많은 조직기관의 이름들이 등장합니다. 이 기관들을 잘 파악하지 못하면 여러 가지 사료들을 읽어내기도 힘들거니와 제대로 해석하기는 더더욱 힘듭니다. 여기서는 반성위와 관련되어 등장하는 기관들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선 반성위는 ‘국제당’에서 파견한 순시원입니다. 국제당은 ‘국제공산당’의 줄임말입니다. 국제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한자식 표기입니다. 코민테른의 또 다른 이름은 ‘제3 인터내셔널’입니다.
제3 인터내셔널부터 보겠습니다. ‘제3’ 인터내셔널이 있다는 것은 ‘제1’, ‘제2’ 인터내셔널도 있다는 말입니다. ‘제1 인터내셔널’은 1864년 칼 맑스와 미하일 바쿠닌 등의 주도하에 설립된 최초의 국제적 좌익 노동운동 연합체인 ‘국제노동자협회’(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를 지칭합니다. ‘제2 인터내셔널’은 1889년 독일의 사회민주당과 칼 카우츠키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노동운동 지도자 및 좌익 정당들에 의해 창설된 단체인 ‘국제사회주의자회의’(International Socialist Congress)를 지칭합니다.
‘제3 인터내셔널’이란 사회주의, 공산주의 정치 세력이 역사상 세 번째로 창설한 국제적 조직체라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이름입니다. 제3 인터내셔널은 1919년 레닌과 소련 공산당(당시, 전 러시아공산당)이 창설하여 1943년 국제 정세의 변화로 스탈린이 해체할 때까지 존속하였습니다. ‘세 번째’라는 차수를 강조하면서, ‘제1’, ‘제2’ 인터내셔널과 차별성을 강조할 때 ‘제 3인터내셔널’이라는 명칭을 씁니다.
제3 인터내셔널의 이름이 ‘코민테른’입니다. 코민테른은 줄임말입니다. 코민테른의 러시아어 본디말은 ‘공산주의 인터내셔널’(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интернациона́л)이며, ‘콤무니스띠체스키 인떼르나치오날’이라고 읽습니다. 여기서 ‘콤’과 ‘인떼른’을 따서 영어식으로 ‘코민테른’이라 표기합니다. ‘코민테른’은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한 제2 인터내셔널과의 차별성을 강조하면서 제3 인터내셔널의 ‘공산주의’적 성격을 드러낼 때 선호하는 명칭입니다.
한자 문화권에서는 코민테른을 ‘국제공산당’이라고 번역하고 줄여서 ‘국제당’이라고도 합니다. 제1, 2 인터내셔널은 각 국가의 노동조합 조직이나 사회주의 정당들 간의 ‘연합체’나 ‘협의체’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그에 비해, 코민테른은 통일된 조직을 갖춘 ‘정당’을 지향하는 형태로 창설되었으며 각 국가별 공산당들의 상위에 있는 국제적 공산주의 정치 조직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이 민주집중제에 의거하여 각 국가의 공산당들을 지도하는 지위와 역할을 감당하였다는 점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명칭이 바로 ‘국제공산당’입니다.
다음으로 반성위는 ‘국제공산당’, 즉 ‘코민테른’이라 불리는 ‘제3 인터내셔널’에서 ‘동만특위’로 파견한 순시원입니다. ‘동만특위’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의 조직으로 전체 이름은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동만 특별위원회’입니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국제공산당’에 가입한 회원 당입니다. 1933년 4월 당시 동만에 온 반성위가 지녔던 사업상의 권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성위의 본명은 리기동이며, 별명은 반경유입니다. ‘반성위’는 별명의 성과 직책을 붙인 명칭입니다. ‘성이 반씨인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위원’을 줄인 호칭이 ‘반성위’인 것입니다. 그는 1891년 길림성 훈춘현 대황고의 한 조선인 가정에서 출생하였고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무창폭동과 북벌전쟁에도 참가하고 소련에 가서도 공부한 적이 있는 능력 있는 간부였습니다.
반성위는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위원으로 사업하다가 국제당의 소환을 받아 순시원의 신분으로 동만특위에 파견되었습니다. 반성위가 동만특위로 파견된 이유는 동만에서 김일성의 일부 동무들이 국제당으로 신소 편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신소 편지의 내용은 국제당의 노선으로 확정되어 동만에서 시행되고 있는 ‘소비에트 정부 노선’의 좌경적 후과에 대한 고발이었습니다.
동만에서 ‘소비에트 정부’는 1932년 10월 혁명 기념일을 기하여 왕청현 가야허에서 그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왕청 유격근거지에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것은 곧 재앙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정부의 시책이 너무도 좌경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왕청현의 소비에트 정부는 ‘즉시적인 사회주의 실현’이라는 극좌적인 구호 밑에 사유재산 철폐를 선포하고 토지, 식량, 농기구를 비롯하여 개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모든 동산, 부동산을 공동소유로 만들어 ‘재산의 공유화’를 일사천리로 시행하는 한편, 유격구역 내에 있는 모든 지주들과 부농들의 토지를 무상으로 몰수하고 마소와 양식까지도 일률적으로 수탈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뺏기고도 유격구 내에서 살게 해달라는 애국적이고 진보적인 지주들을 ‘착취계급’이라고 내쫓아 적구로 보내버린 ‘소비에트 정부’는 ‘공동식당’을 경영한다면서 늙은이들의 집을 뒤져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공출’하고 이에 항의하는 노인들을 ‘봉건숙청’의 명목으로 군중 대회장에 세워놓고 며느리들로 하여금 비판을 시키는 망동까지 저질렀습니다.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된 지 반 년도 못되는 사이에 중국 인민과 조선 인민 사이는 다시금 급격히 악화되었습니다. 타도된 지주의 절대다수가 중국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민족 감정이 악화된 중국인 반일부대들은 다시 조선인 항일유격대를 적대시하였고 유격대는 사방이 포위된 형국에서 행동의 자유를 제약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이 모든 좌경적 망동의 원인을 잘못된 ‘노선’과 그 노선을 작성한 사람들의 ‘사상적 미숙성’에서 찾았습니다. 문제는 ‘동만특위’가 ‘국제당’의 시정방침에 수정을 가할 만한 노선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였고, 감히 국제당의 권위에 도전할 배짱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의 동무들은 국제당에 신소 편지를 보냈고, 김일성 자신은 동만특위의 서기인 동장영과 ‘정권 건설 문제’를 두고 논쟁할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동장영과의 논쟁에서 ‘반제반봉건민주주의혁명과업’을 수행해야 할 동만의 실정에 전혀 맞지 않는 ‘소비에트 정부’ 노선을 폐기하고 새로운 노선을 수립할 것을 제안한 후, 리용국, 김명균, 조창덕을 비롯한 몇몇 군정간부들과의 여러 날에 걸친 토의를 통하여 노동자와 빈농, 고농만이 아닌, 각계각층의 광범한 인민대중을 포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한 통일전선적 인민혁명정부’를 세우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인민혁명정부 노선’이라고 불리는 정권건설 노선입니다.
김일성은 ‘인민혁명정부’ 건설의 시범단위를 왕청5구로 정하고 1933년 3월 18일 인민혁명정부 수립을 선포하였습니다. 정부 수립 선포 이전에 김일성은 왕청5구에서 소비에트 정부가 몰수했던 개인의 재산들을 모조리 되돌려주었으며 몰수 후 파손되었거나 소비해버린 물건들을 보상하기 위하여 목재소를 치는 전투까지 조직하였습니다. 그 전투에서 노획한 소와 말로 농민들은 1933년 봄에 분여 받은 땅에서 밭갈이를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1933년 3월 18일에 수립된 인민혁명정부의 선포식에서 ‘인민혁명정부는 참다운 인민의 정권’이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고 10개 조항에 달하는 정부정강 내용을 소개하였습니다. 이 정강 내용은 1936년 조국광복회 10대 강령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강령에도 관철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항일무장투쟁 시기 왕청의 유격근거지에서 수립된 인민혁명정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민혁명정부의 10대 정강에는 반일통일전선 노선에 의거한 정권의 형태, 토지의 무상 분배, 8시간 노동제, 남녀 평등권의 보장, 무료 교육의 실시, 무상 치료의 실시, 문화계몽운동의 전개 등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동만특위의 서기인 동장영도 왕청에서 탄생한 인민혁명정부 노선에 대하여 지지를 표명하면서 오래지 않아 국제당 파견원의 참석 하에 유격근거지 정권 건설 노선 전환문제를 토의하게 된다고 통보하며 김일성의 기본 발언을 요청하였습니다. 이렇게 파견된 순시원이 반성위였던 것입니다.
1933년 4월에 도착한 반성위는 김일성과 숙식을 같이 하며 현안을 논의하는 열흘 남짓한 기간 동안에 자신보다 21살이나 어린 김일성을 허물없이 대하면서 유격근거지의 정권 형태에 대한 의견일치에 도달하여 김일성이 제시한 ‘인민혁명정부’ 노선에 대한 지지를 표명합니다. 반성위는 김일성에게 1933년 1월에 국제당이 만주 문제에 대해 내놓은 전략인 ‘민중혁명정권 노선’을 소개하였는데, 이는 ‘소비에트 정권’ 노선을 새로운 정권 형태로 교체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농촌정권기관으로 ‘농민위원회’를 조직하고 고농과 빈농을 지도역량으로 삼되 그 주위에 중농 대중을 묶어세워야 한다는 노선이었습니다.
반성위는 ‘농민위원회’가 ‘소비에트 정권’보다 낫긴 하지만 그보다는 노동자, 농민, 학생, 지식인, 종교인 등 반일을 지향하는 모든 계층을 다 망라하는 통일전선적인 ‘인민혁명정부’ 형태가 더 좋고 발전적인만큼 정권형태에 대한 자기의 견해를 편지로 써서 국제당과 만주성위에 보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동만의 모든 유격구들에서 ‘소비에트’는 ‘인민혁명정부’나 ‘농민위원회’로 교체되었고 ‘공농유격대’는 ‘반일인민유격대’로 개칭되었으며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개편되었습니다.
반성위는 김일성과 면담하는 중에 ‘조선사람은 조선혁명의 주인이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당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김일성의 주장을 지지하고 격려합니다. 국제당이 제시한 ‘1국1당제’ 방침을 엄격히 적용하면서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오로지 중국혁명을 위해서만 싸워야 하고 조선혁명을 입에 담는 것은 민족주의의 발로로서 국제주의에 투철하지 못한 징표’라고 정죄하며 김일성 부대가 두만강을 넘어 조선의 육읍 지구로 진출할 때마다 경기를 일으키던 동만특위의 방침과는 배치되는 지지였습니다. 국제당 파견원인 반성위의 이러한 지지는 맑스주의 고전이나 국제당의 지침에 얽매이지 않고 조선혁명의 주체적인 방도를 모색하던 김일성에게 있어 노선 상, 사상 상의 커다란 고무로 되었습니다.
한편 왕청현에서 소비에트 정권 노선의 좌경적 착오를 시정한 반성위는 김일성과 작별하고 자신의 고향땅인 훈춘현으로 넘어가서 정부 건설의 노선 전환문제를 지도하던 중 불귀의 객이 되어 쓰러집니다. 1933년 7월 20일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를 살해한 흉수는 훈춘유격대의 대대정치위원이었던 박두남이었습니다. 그는 훈춘현당 확대회의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좌경적 시책 실행에 대하여 반성위의 비판받고 정치위원직에서 해임되었습니다. 박두남은 반성위에게 앙심을 품고 숙소에 난입하여 흉탄을 발사하였고 그 자리에서 반성위는 절명하였습니다.
반성위의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그와 함께 혁명을 논하고 인생을 논하던 리치백 노인네 웃방에서 하루종일 문을 닫아걸고 눈물을 흘리며 고인을 추모하였습니다. 그때로부터 반세기가 더 지나 김일성 주석은 “나에게 ‘자본론’을 안내해 준 선생이 박소심이고 ‘홍루몽’을 배워준 스승이 상월 선생이라면 반성위는 조선사람은 조선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우리의 신념을 더욱 굳게 해준 진실한 지지자, 고무자, 동정자였다”라면서, “그때 반성위가 준 영향과 동지적 고무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반 ‘민생단’ 투쟁이 스산하게 벌어지던 시기에 조선민족과 우리 혁명의 주체를 옹호고수하여 그처럼 결사적인 투쟁을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