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 상상화
1933년 9월 동녕현성 전투 상상화

▲ 문: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요?

답: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란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매개 군인이 상하가 없이 똑같은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의주장을 말합니다. 군사행동의 모든 면에서 획일적이고 기계적인 평균주의를 추구하며 그것을 절대화하는 사상입니다. ‘소비에트 노선’이 정권 건설 분야에서의 좌경이었다면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는 군대의 지휘와 관리에서 발로된 좌경적 사상경향이었습니다.

1930년대 초반 동만을 덮친 극단주의의 광풍은 좌경과 결합하여 극좌주의의 형태를 띠면서 수많은 불행과 재난과 재앙을 초래하였습니다. 정권 건설 분야의 ‘소비에트 노선’도 문제였지만 군사 분야의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는 용맹무쌍한 어제의 영웅들을 한심하기 그지없는 개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1933년에 일어난 일입니다.

1933년에 김일성은 극좌적으로 진행된 ‘소비에트 노선’의 후과로 교전 직전의 상태로 치달은 항일유격대와 구국군과의 관계를 풀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왕덕림이 간도 땅을 떠난 후 구국군의 실권은 오의성과 채세영이 쥐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오의성과 채세영을 찾아가 담판을 벌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시 김일성과 함께 있던 반성위는 펄펄 뛰며 반대하였습니다. 구국군의 배후에서 모사 노릇을 하는 조선인 리청천이 골수 반공분자였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아버지 김형직 선생과 친분이 있었던 리청천이 길림시절의 구면이기도 한 자신을 어쩌지는 못할 것이라고 고집을 부리며 기어이 오의성을 찾아갔습니다. 김일성은 오의성과 합작을 성사시켜 ‘반일부대련합판사처’라는 조직을 만들고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의 일상적인 연계를 보장하기로 하였으나, 리청천의 방해로 채세영과는 합작하지 못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말로서가 아닌 실천으로서 합작을 이끌어내기 위하여 구국군의 숙원이었던 동녕현성 전투를 벌이기로 하고 채세영도 끌어들입니다.

구국군은 일전의 동녕현성 공격에서 참패한 후 이를 갈고 있었는데, 김일성은 이 지점을 잘 파고들어 체면을 만회하려는 구국군을 공동항일의 전선으로 이끌어낸 것입니다. 동녕현성 전투는 1933년 9월 6일 밤에 시작되어 9월 7일 낮에 끝났습니다. 전투가 1박 2일 지속된 이유는 동녕현성의 서산포대 점령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겨우 포대를 파괴한 유격대는 위만군과 일본군 수비대를 성 밖으로 유인하여 섬멸하고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동녕현성 전투 이후 김일성은 구국군에게는 ‘김사령’, 항일유격대와 유격근거지에서는 ‘김대장’으로 불리게 됩니다. 동녕현성을 치고 무적황군의 위용을 자랑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위만군을 섬멸한 혁혁한 군공은 일제의 만주침략으로 울분에 차 있던 중화민족의 가슴을 통쾌하게 뚫어주었고 만주 땅에서 곁방살이하던 조선민족의 자존심을 한껏 세워주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거룩한 이야기, 신화인 ‘전설적인 항일 명장 김일성 장군’을 노래하는 각종 전설과 설화, 민담의 발화점이 바로 1933년 9월의 동녕현성 전투인 셈입니다.

1933년 9월의 동녕현성 전투는 만주의 민족주의 독립군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전투입니다. 만주에서 활약한 마지막 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참전한 전투이기 때문입니다. 채세영에게 붙어서 반공 선전을 일삼던 막후의 모사 리청천이 바로 지청천입니다. 그는 채세영을 따라 동녕현성 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펴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 판에서는 ‘동녕현성 전투’를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 장군이 중국 의용군과 중국 공산당 계열의 혼춘(琿春) · 왕청(汪淸) 유격대 등과 연합, 동만주 동녕현성에 주둔한 일본군과 만주군을 공략한 전투’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청천은 동녕현성 전투를 끝으로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 하남성 낙양에 장개석이 설립한 낙양군관학교의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갑니다. 지청천이 ‘리청천’이란 이름을 쓴 까닭은 만주에서 ‘지’가 성이 벽씨라 신분 위장을 위해 상대적으로 흔한 어머니의 성인 ‘리’가 성을 썼기 때문입니다. 지청천은 1933년 동녕현성에서 함께 싸운 ‘김일성 사령’이 생전에 자신과 친분을 가졌던 김형직 선생의 맏아들이며 자신이 길림에서 자주 만났던 김성주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만 대한민국의 제헌의원, 초대 무임소 장관을 거치고서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 자택에서 1957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동녕현성 전투’는 말하면서 ‘김일성 사령’에 대해서는 침묵하였습니다.

다시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로 돌아가겠습니다. 동녕현성 전투에서 왕청 유격대는 전방 공격을 맡았고, 훈춘 유격대는 후방 수비대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동녕현성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던 이 훈춘 유격대의 용사들 중 13명이 전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한꺼번에 몰살을 당하는 비극이 일어나서 전 동만 인민들의 비분을 자아냈습니다.

동녕현성 전투가 끝나고 유격구에 돌아온 훈춘 유격대원들은 어떤 외딴집에서 잠시 노독을 풀며 추석 명절을 쇠었습니다. 추석 이틀 후 그들이 휴식하고 있는 것을 내탐한 일본 수비대가 그 외딴집을 밤중에 덮쳤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신속하게 포위를 뚫고 벗어나야 할 중대원들은 갑자기 둘러 앉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회의 안건은 ‘지금 당장 어떻게 할 것인가?’였습니다.

회의 자리에는 중대장도 있었지만 중대장에게는 결론권이 없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훈춘현당 군사책의 경력을 가진 오빈도 있었지만 좌경바람에 일개 대원으로 강등된 그는 더더욱 발언권이 약했습니다. 당시 동만의 상급당 지도부에 앉아있던 좌경분자들은 지휘관들에게 군사문제에 대한 결론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군사작전과 관련된 모든 문제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반드시 회의에서 토의되어야 하며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집단적으로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습니다.

일본 수비대가 포위환을 조여 오는 절체절명의 그 순간에도 그들은 현 위치를 사수하며 교전할 것인가, 포위를 뚫고 탈출할 것인가를 두고 터무니없는 논의만 거듭했습니다. 창발적인 사고능력을 가진 일부 대원들이 공론만 하다가는 다 망할 수 있으니 일단 싸움부터 시작해놓고 보자고 제기하였으나 ‘극단적 군사민주주의’에 물젖은 사람들은 “회의 결정도 없이 어떻게 전투를 하는가”라면서 그 제의를 일축해버렸습니다. 토론이 공전을 거듭하는 사이 일본 수비대는 습격을 개시하였고 그 순간에야 유격대원들은 회의를 중지하고 비로소 싸움을 시작하였지만 이미 빗발처럼 날아든 적탄에 13명의 유격대원들이 목숨을 잃은 뒤였습니다.

김일성이 이 일을 알게 된 것은 오빈이 죽어가면서 생존자 한 사람에게 사건의 전말을 김일성에게 꼭 보고해주도록 부탁하였기 때문입니다. 13명의 대원들 중에서도 오빈은 김일성의 잊지 못할 전우이자 동지였습니다. 두만강을 건너 육읍지구를 개척할 당시 채수항의 소개로 친교를 맺게 된 사람이 오빈입니다. 채수항과 오빈은 용정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채수항이 대성중학교를 다닐 때 오빈은 동흥중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둘은 용정에서 학생운동을 같이 했습니다.

오빈은 채수항과 함께 겨울 명월구 회의에도 참석하여 무장투쟁의 방침을 세우기 위한 토의에 참여하였습니다. 오빈의 아버지 오의선은 육읍지구 중 종성의 반제동맹 책임자로 일하는 애국자였으며 김일성은 육읍지구로 나갈 때마다 오의선의 집에 들러 아들 오빈의 소식을 전해주곤 하였습니다. 오빈은 동녕현성 전투만 치르면 훈춘의 좌경바람을 피해 왕청의 김일성 부대로 옮겨가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그만 속절없이 돌아올 수 없는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결국 좌경 중에서도 극좌적인 ‘극단적 군사민주주의’가 오빈을 앗아 가버린 것입니다.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는 맹목적인 평등사상을 설파합니다. ‘모든 사람, 모든 군인은 인격상 평등하다’라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명제를 대전제로 세워놓고, 여기에서 ‘혁명군대 안에서는 직급에 따른 상하관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기가 막힌 극단적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이런 극단주의적 요설에 넘어가서 동만의 유격대는 일정기간 그 지휘체계가 마비되는 시련을 겪게 되었습니다.

동만의 항일유격대 뿐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군대는 군인들에게 그가 수행하는 임무에 따라 서로 다른 분공을 주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중대장의 분공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소대장의 모자를 씌우며 또 어떤 사람에게는 분대장의 일을 시킵니다. 수행하는 임무와 분공에 따라 군대 안에는 상하관계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좌경기회주의자들은 항일유격대의 복무조례에 규정되어 있는 상하관계를 무시하는 데로 나아갔습니다. 하급이 상급이 내린 명령을 놓고 왈가왈부한다면 그것은 벌써 군대가 아닙니다. 중대장이 불시에 조성된 정황에서 돌격 구령조차 치지 못하는 군대는 오합지졸의 무리일 따름입니다.

항일무장투쟁의 초기에 유능한 군사 지휘관들이 많이 희생되었습니다. 이것도 ‘극단적 군사민주주의’ 때문입니다.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는 전투 시에 지휘관들이 대원들과 꼭 같은 행동을 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원래 있어야 할 지휘 장소에 있는 지휘관은 비겁의 대명사로 불렸고, 지휘 장소를 이탈하여 최전방에서 일반 대원과 함께 돌격한 지휘관은 용감함의 화신으로 상찬되었습니다. 이런 풍조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소대장, 중대장 등 기본단위 군사지휘관들이 많이 희생된 것입니다.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는 그 표현형태가 어떻든지 간에 소부르주아 사상에 바탕을 둔 기회주의적인 사상경향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정부주의적인 경향으로서 노동계급의 혁명사상과는 인연이 없습니다. 소부르주아 사상의 반영으로서의 무정부주의는 일반적으로는 권력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 특수적으로는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권력에 대한 반발에 그 이념적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무정부주의는 모든 종류의 정치권력에 극단적인 증오를 표출하며 폭주하다가 결국 노동계급의 정권도 타도 대상으로 삼으며 극좌에서 극우로 화려한 변신을 하기도 합니다. 중국의 가면놀이인 ‘변검’처럼 극단주의는 극좌와 극우를 순식간에 넘나들지만 일관되게 ‘반혁명’을 지향합니다. 극좌와 극우는 한 몸입니다.

오빈을 비롯한 13용사의 죽음이라는 뼈아픈 손실을 겪은 김일성은 1933년 가을 십리평에서 소집된, ‘유격구 창설 후 1년 반의 사업을 총화하고 적의 대토벌에 대처한 유격구 방위 대책을 세우기 위한 동만 유격대 지휘관들과 정치위원들의 회의’에 참가하여 ‘극단적 군사민주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문제를 토의하였습니다. 그는 유격대오 안에서 부대지휘의 기본은 지휘관의 결심이고, 엄정한 중앙집권적 규율과 질서를 확립하는 것이며, 부대지휘 관리방법은 정치사업을 앞세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지휘관은 언제나 주동적으로 지휘를 하며 복잡하고 어려운 정황 앞에서 동요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결단성 있게 행동해야 하지만, 지휘에서 주관주의와 독단을 부리지 말고 대중의 힘과 지혜에 의거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휘관은 명령 하나만으로 부대를 지휘하지 말고 정치사업을 앞세워 대원들의 자각적 열의를 불러일으켜야 한다는 김일성의 이 주장은 지금도 조선인민군의 각급 부대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로동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각급 기관과 부서에서도 통용되는 주체의 사업방법의 대강을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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