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조선인민혁명군’이 만들어진 이유와 의의는 무엇인가요?
답: ‘조선인민혁명군’은 ‘반일인민유격대’를 개편하여 만들어진 군대입니다. 규모를 보면, ‘반일인민유격대’는 중대, 대대의 소규모인 반면, ‘조선인민혁명군’은 연대, 사단의 체계를 갖춘 대부대입니다. 유격대를 일단은 대대 규모로 조직하여 일정 기간 질적 양적으로 발전시키다가 때가 되면 대부대 혁명군으로 개편하자고 결의한 것은 1931년 겨울 명월구회의의 결론이었습니다.
김일성은 1934년 3월에 지난 1931년 겨울 명월구회의의 결의를 재확인하고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방침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방침에 따른 개편 작업은 1934년 3월부터 5월 사이의 극히 짧은 기간에 진행되었습니다. 개편 작업이 빠르게 진행된 것은 개편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유격대 내에 넓게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33년 하반기부터 동만에서는 유격대 역량을 통합하고 그 지휘체계를 단일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중요한 논점으로 상정되었습니다. 적들의 동기 토벌을 막아내는 왕청 유격구 방위전에서 중대들이 따로 놀다보니 역량의 허비가 많았습니다. 이를 통해 수시로 변화되는 전투정황에 맞게 중대 상호간의 협동을 원만히 조직하자면 그를 총괄할만한 지휘, 참모기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하자면 지휘체계를 단일화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었습니다.
유격구들 사이의 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들은 화룡현, 왕청현, 연길현, 훈춘현을 돌아가면서 차례로 공격하는데, 각 현에 소속된 유격구의 유격대들은 다른 유격구가 공격받을 때에 즉시 협조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방위전에 돌입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왜 우리가 공격할 때는 여러 유격구의 중대들이 연합하여 공격하는데, 방어할 때는 제각각으로 막아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유격대 지휘관들의 머리에 자리 잡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여 유격운동은 그 내용과 규모에 맞는 새로운 그릇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현과 구(현 아래 구가 있음)들에 널려있는 무장부대들을 한 체계에 묶어세울 수 있는 전환적인 대책이 필요하였습니다. 이 요구를 가장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는 길이 바로 ‘반일인민유격대’를 통합하여 대부대 혁명군인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것이었습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한 것에는 이상에서 말씀드린 ‘군사적인 이유’도 있지만, 별도의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보기에 따라서 이 ‘정치적인 이유’가 ‘군사적인 이유’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동만의 유격구를 짓누르고 있던 좌경의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광적으로 진행되던 ‘반민생단 투쟁’과 관련이 있습니다.
‘민생단’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결론적으로 일제가 조작해 낸 ‘조선인 간첩조직’입니다. ‘반민생단 투쟁’은 이 유령조직에 가입한 간첩들을 잡겠다고 멀쩡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두드려 잡아 죽인 희대의 비극이었습니다.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로 아무나 일제의 간첩으로 몰아가 죽여버리는 참혹한 광기의 진원지는 코민테른 동양국에 자리를 차고 앉은 왕명과 강생이었으며, 이 광풍을 증폭시킨 것은 국제당의 권위에 맹종맹동했던 만주성위와 동만특위 지도부의 좌경분자들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반민생단 투쟁’의 좌경 바람이 ‘반일인민유격대’에도 불어와서 애꿎은 유격대 지휘관들을 죽이고 유격대의 활동을 제약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동만에서 ‘반민생단 투쟁’으로 죽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수는 대략 2,000명입니다. 그 2,000명은 대부분 뛰어난 지도력을 가지고 각급 당, 단체나 유격대의 지휘부에서 사업하던 사람들입니다.
‘반민생단 투쟁’으로 동만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씨가 말랐습니다. ‘반일인민유격대’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제때에 개편되지 않았으면 동만 조선인 무장부대의 씨가 마를 뻔했습니다. 나아가 동만에서 선제적인 조치를 통해 유격대로 불어오는 ‘반민생단 투쟁’의 불길을 진화하지 못했다면 이 미친 불길은 북만과 남만으로 옮겨 붙어 전체 만주의 모든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김일성은 ‘조선인민혁명군’ 개편 문제를 두고 주진, 량성룡과 자주 협의하였습니다. 량성룡은 반일인민유격대 대대장이었다가 ‘민생단’으로 몰려 구금되었다 풀려나왔지만 복직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대부대 혁명군 조직 안에 대해 열의를 보이면서도 ‘반민생단 투쟁’에 열을 올리고 있는 민족배타주의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개편안은 대놓고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무력을 건설하겠다는 안이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의 개편안에 대해서는 주진도 찬성하였습니다. 그는 원래 성격이 괄괄하고 대범하여 대부대를 만들어 큼직큼직하게 싸우자는 제안을 마음에 들어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사람들이 부대들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혁명군을 만들게 되면 ‘조선연장주의’ 감투를 쓸 수도 있지만 그런 감투 따위에는 신경을 쓰지 말고 하루속히 일을 내밀자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동만 좌경 바람의 진원지인 ‘동만특위’에서 ‘서기’를 맡고 있는 ‘동장영’의 입장입니다. 놀랍게도 그는 김일성의 구상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동만에 조직되어 있는 ‘반일인민유격대’는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무장력이며 그 구성에서도 조선사람들이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중국 땅에서 조직된 것이기는 하지만 종국적으로는 조선혁명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의 혁명적 무장력’으로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동장영의 이 평가는 ‘조선혁명’을 운운하는 것 그 자체가 ‘민족주의’로 범죄시되던 당시의 실정에서 아주 공정하고 진보적인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국제당에서 파견된 순시원인 반성위 또한 김일성의 구상을 지지하면서 ‘반일인민유격대’를 ‘대부대 혁명군’으로 통합개편하는 문제는 ‘국제당 노선’에 부합하는 정당한 방침이라고 적극 지지하며 보증하였습니다. ‘동만특위’의 ‘서기’ 동장영에 이어 ‘국제당’의 ‘파견원’ 반성위까지 김일성의 구상에 동조해버리니 ‘반민생단 투쟁’에 앞장서던 민족배타주의자들도 나서기가 애매해졌습니다. 일이 이렇게 풀려버리자 ‘만주성위’나 ‘동만특위’에 박혀있던 좌경분자들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반일인민유격대’의 ‘조선인민혁명군’으로의 개편 과정을 하릴 없이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사전 논의과정을 거쳐서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 개편 과정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1934년 3월부터 5월까지 불과 2달 만에 전광석화처럼 단행됩니다. 개편 과정은 총 2단계로 진행되었습니다. 1단계는 각 현에 있는 대대를 연대로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제2단계는 사단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개편 과정은 성공적으로 진행되어 최종적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은 2개 사단과 1개 독립연대의 편제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앞서 말씀드린 ‘조선인민혁명군’ 개편의 ‘정치적 이유’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극좌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을 잠재우고 그 잘못을 시정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등장은 결과적으로 ‘반민생단 투쟁’의 극좌적 편향을 바로잡는 정치적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필자는 당시 김일성이 이 정치적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이 결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목적의식적으로 주도면밀히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고 봅니다.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는 과정에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라는 새로운 당 지도기관이 출현하였습니다. 필자는 이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출현이야말로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 속에서 망나니 칼춤을 추고 있는 극좌적인 좌경망동분자들을 제압하고, 그들의 칼날로부터 무고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생명과 운명을 지켜주기 위해 김일성이 둔 ‘신의 한수’라고 평가합니다. 실제로 이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를 통해 동만에 불었던 ‘반민생단 투쟁’의 광풍은 잦아들고, 각 급의 당 위원회도 자신들의 잘못을 시정하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복기해보겠습니다. ‘반일인민유격대’ 안에는 당조직이 있습니다. 공산당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당원들은 유격대 내에서 핵심적인 지위에 있습니다. ‘당’은 ‘당조직’을 통하여 ‘당원’들에게 지침과 분공을 주는 방식으로 ‘유격대’를 통제하고 지휘합니다. 그리하여 ‘유격대’는 ‘당’의 무력이 됩니다.
‘당’이 ‘군대’를 지도하는 관계는 공산주의 이론에 의하면 상식적인 것이고 보편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당시 ‘반일인민유격대’의 당조직을 지도하던 주체가 ‘현당위원회’였다는 것입니다. ‘현’의 ‘당위원회’가 ‘유격대’의 ‘당조직’을 지도하게 된 것은 ‘유격대’가 ‘현’ 단위로 만들어져 ‘현’에 배속된 형태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당위원회’는 ‘현’의 행정을 지도하는 동시에 ‘현당’의 ‘당무’의 일환으로 ‘유격대’의 ‘당조직’까지 지도하며 ‘군무’를 좌지우지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스스로가 ‘권력기관’이 되어 ‘반민생단 투쟁’을 극좌적으로 밀고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각 현별로 만들어진 ‘반일인민유격대’는 군사적으로 적들의 각 현별 ‘각개격파’에도 취약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각 현별로 진행되는 ‘좌경분자’들의 ‘반민생단 투쟁’ 공세에 취약하였습니다. 각 현별로 ‘현당위원회’의 지도를 받던 ‘반일인민유격대’를 개편하여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지도를 받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만든 것은 혁명무력의 군사적, 정치적 취약성을 일거에 보강하는 일거양득의 조치였습니다.
김일성이 둔 ‘신의 한수’로 등장한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출현으로 동만의 각 ‘현당위원회’는 ‘군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박탈당해 더 이상 유격대원들을 ‘민생단’으로 몰아 지위를 해제하거나 구금하거나 처형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현에 거주하고 있는 민간인에 대해서도 ‘민생단’으로 몰아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졌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현당위원회’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현당위원회’가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된 것은 당시 정세의 지극히 당연한 반영이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혁명무력의 담보가 없이는 각 현의 지방 당조직들이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는 각 현의 조선인 유격대원들이 바깥에서 죽어라 싸우면서 유격구를 지키고 있으면 그 안에서는 현당의 좌경 지도부가 유격구 내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똑똑한 순, 입바른 순, 용감한 순대로 잡아다가 족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군대가 대부대로 편제되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군대가 없어지고 새로 생긴 큰 부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하니 자연스레 꼬리를 말고 망나니짓을 삼가하는 척이라도 하게 되었습니다.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를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고,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로 ‘현당위원회’를 지도하도록 눌러놓은 것은 동만의 좌경적인 ‘반민생단 투쟁’ 문제 해결을 위한 결정적인 사전 포석이었습니다. 결국 ‘반민생단 투쟁’의 좌경적 편향 문제는 ‘동만특위’나 ‘만주성위’, 나아가 ‘국제당’의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정치 사안인데, ‘현당위원회’ 차원의 문제로 방치해버리면 동만 전역의 광범한 지역에서 조선인민대중들의 운명이 승냥이떼 같은 좌경분자들과 민족배타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하는 참극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일인민유격대’의 ‘조선인민혁명군’에로의 개편과, ‘조선인민혁명군’의 당조직을 지도하는 당위원회인 ‘조선인민혁명군당위원회’가 출현하게 된 것은, 항일유격대의 지휘체계를 개선하고 대오를 질적 양적으로 강화하여 유격구에 국한된 방어전에서 벗어나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전으로 넘어갈 수 있게 하는 군사적인 의미와 함께, 극좌적인 ‘반민생단 투쟁’으로 유격구의 조선인민들이 겪고 있는 참극을 멈추게 하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