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제1차 북만원정’의 의의는 무엇인가요?
답: ‘제1차 북만원정’이란 1934년 10월 하순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정예 중대들이 ‘로야령’을 넘어 북만으로 진출하여 북만의 부대들과 함께 진행한 연합 작전을 일컫는 말입니다. ‘로야령’은 동만과 북만을 가르는 험산준령입니다. 로야령 이남 동만에는 함경도 출신들이, 로야령 이북 북만에는 경상도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북만에 있다가 훗날 조선인민군 초대 총참모장을 지내는 강건(본명 강신태)의 고향도 경상북도 상주입니다.
1934년 봄에 2개 사단 1개 독립연대 편제로 ‘조선인민혁명군’ 개편을 완료한 후, 그 해 여름에 인민혁명군 제1사와 독립연대는 안도현 서북부로, 제2사는 왕청현 동북부로 진출하여 유격구를 확대하였습니다. 제1사 사장 주진과 독립연대장 윤창범이 안도현 서북부의 대전자와 푸르허 일대로 진출하여 관동군의 시선이 그리로 쏠리고 있을 때, 김일성은 제2사 4,5연대의 일부와 반일부대들과 함께 왕청현 동북부 라자구 방면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라자구 진공 전투에서 승리한 조선인민혁명군은 일제가 유격구를 포위 말살하려는 ‘위공작전’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관동군이 격파되는 것을 목격한 ‘토벌대’는 이후 유격구 주위에 얼씬도 하지 못하였으며 유격구는 안전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라자구 전투에는 중국인 공산주의자 ‘주보중’도 참여하였는데, 그만 중상을 입고 말았습니다.
라자구에서 20여명의 반일부대 병사들을 데리고 북만으로 돌아가 ‘녕안반일유격대’를 만든 ‘주보중’은 라자구에서 입은 부상을 돌보면서 동만의 김일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김일성이 주보중의 요청에 응하여 부대를 이끌고 로야령을 넘어 북만으로 진출한 것이 바로 ‘제1차 북만원정’입니다. 주보중이 김일성에게 도움을 요청한 이유는 첫째는 ‘녕안반일유격대’의 전투력이 약한 조건에서 김일성 부대의 강력한 전투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김일성에게 ‘조선인민혁명군’ 개편의 경험을 따라 배워 북만에서도 유격대들을 개편하여 대부대를 만들고자 하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주보중의 요청을 심중하게 받아들이고 북만원정을 수락합니다. 그 이유는 첫째, 1902년생으로 정확히 10살 연상인 주보중과의 우정이 라자구 전투로 더욱 깊어졌기 때문이고, 둘째, 원래부터 동만 뿐 아니라 북만과 남만까지도 대부대 활동의 무대로 삼으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북만을 돕는다는 것은 곧 그 일대에서 유격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김책, 최용건, 허형식, 리학만, 리계동을 비롯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돕는 것으로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이 1934년 10월 하순 북만원정을 단행하기 직전에 일제는 ‘장기특별치안공작’이라는 ‘토벌’ 대강을 내놓았습니다. 1934년 조선인민혁명군의 라자구 전투에서 쓴맛을 본 일제가 지구전의 방법으로 기어이 위공 기도를 실현하려고 만들어낸 대강입니다. 이 대강의 요점은 1934년 9월부터 1936년 3월까지의 1년 반 사이를 3개의 시기로 나누고 처음에는 비교적 치안이 안정된 곳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조선인민혁명군의 마지막 지탱점을 소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점령지역을 걸음걸음 확대해나가는 ‘보보점령’의 전술에 ‘토벌’에 소요되는 절대시간을 늘이는 ‘지구전’의 전술까지 겹쳐 ‘위공’은 그야말로 유격구를 질식시키는 목조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제의 바로 이 ‘장기특별치안공작’이 막 시작되던 때에 김일성이 북만원정을 단행한 것은 일제의 위공 기도에 파열구를 내어 조기에 좌초시키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전투력이 강한 김일성 부대가 북만으로 가서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돌입하게 되면 일제로서는 관동군을 북만에서 뺄 수가 없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동만의 관동군을 북만으로 증원해야 합니다. ‘나의 병력을 주동적으로 원활하게 기동시킴으로써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피동에 빠지게 하는 것’은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전 기간 견지해 온 유격대의 활동 원칙이었습니다. 이것이 ‘제1차 북만원정’의 ‘군사적인 의의’ 중 하나입니다.
북만으로 간 김일성은 관동군 부대를 들이치고 병상의 주보중과 해후하게 됩니다. 김일성과 주보중의 이 상봉은 항일무장투쟁사에서 새로운 장을 상징하는 하나의 사변이었습니다. 이 상봉을 시발점으로 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은 중국인 공산주의자들이 영솔하는 유격부대들과의 전면적인 공동투쟁의 길에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도 조선로동당과 중국공산당의 공동투쟁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주보중이 붙여준 1개 소대와 함께 경박호반의 석두하자라는 곳에서 200여명의 관동군 ‘토벌대’를 소멸하고, 연이어 방신구 근방에서 관동군을 격파합니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반일부대 출신 ‘녕안반일유격대’ 대장 평남양과 조우한 김일성은 그의 원대로 ‘동경성’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정안군’을 치기로 합니다. ‘정안군’은 관동군 소속 일본군인이 지휘하고, 부대원들은 만주국의 상층부 자제들로 구성된 악질적인 토벌 부대입니다. 평남양은 일전에 정안군에게 패전한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김일성 부대는 신안진 부근에서 평남양 부대와 함께 다께우찌 중좌가 이끄는 2개 대대의 정안군을 요정내고 뒤이어 중양이라는 반일부대와의 협동작전으로 대해랑하 강변에서 다른 정안군 부대를 소멸하고 팔도하자골의 로전가라는 곳에서 정안군 기병중대와 보병 6중대를 타격하였습니다. 팔도하자의 산막에서 주보중을 잠시 만난 후 12월 하순에는 대평, 사계호, 점중화, 인의협 등 반일부대들의 요청에 따라 또다시 목단강을 건너 신안진 부근에서 정안군을 들이치고 위만경찰서를 습격하였습니다. 적극적이고 주동적인 군사활동에 참가하여 적들을 연속으로 타격하는 과정을 통하여 녕안유격대는 반일부대들과 지방의 참군요망자들로 대오를 부단히 확대하였습니다.
이것이 김일성 부대가 다른 부대를 돕는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첫째, 연합작전의 승리로 함께 한 부대의 사기를 올립니다. 둘째, 작전 승리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격대 활동의 요령과 군사기술을 다른 부대원들에게 전수합니다. 셋째, 전투 승리의 소식이 반일부대들과 인민대중들 사이에 파문을 일으켜서 노련한 반일부대 및 젊고 씩씩한 참전 희망자들로 유격대오를 끊임없이 보충할 수 있게 합니다. 동만의 김일성이 로야령을 넘어 북만으로 오기를 주보중이 간절히 대망했던 이유입니다.
‘제1차 북만원정’이 끝나고 동만으로 돌아간 김일성은 북만에서 주보중이 ‘녕안반일인민유격대’를 기간으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였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북만원정 기간 김일성 부대와 더불어 북만의 설한 속을 누비며 전투적 우의를 두터이 하던 대부분의 반일부대들이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산하에 들어갔습니다. ‘김일성’이 ‘동만’에서 반일인민유격대들을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한 경험이 전파되어 ‘주보중’이 ‘북만’에서 반일인민유격대와 반일부대들을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으로 개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 소식을 듣고 멀리 로야령 너머에서 녕안땅을 그려보며 주보중을 축복하였다’고 회고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 본 ‘동북혁명’과 ‘김일성’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중국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동북지방’이란 ‘너무나도 먼 곳’입니다. 김일성이 북만원정 단행을 준비하던 1934년 10월 16일에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의 전략 의견에 따라 장개석의 포위를 돌파하고 북상 항일의 기치 밑에 2만5천리 대장정을 개시하였습니다. 관내에서 장개석과의 싸움에 전념해야 했던 중국공산당 중앙이 ‘동북혁명’을 지도하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중국의 ‘동북’, 즉 만주 중에서도 동만의 주민 구성은 조선인들의 수가 압도적이었으며, 공산주의 운동 또한 일찌기 조선인들이 시작하였습니다. ‘동북혁명’은 관내의 ‘중국공산당’보다는 소련 경내에 있던 ‘국제당 동양국’이 직접 지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국제당 동양국’에 자리 잡은 ‘왕명’이 기안한 온갖 좌경적인 정책은 관내의 ‘모택동’과 동북의 ‘김일성’의 활동을 제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국제당 동양국’이 극좌적인 정책으로 ‘동북혁명’을 나락으로 내몰고 있을 때, 이를 강력히 저지하고 시정한 인물이 ‘김일성’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중차대한 정치적 역할을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혁명무력을 앞세워 감당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군대’를 앞세워 ‘정치’를 풀어나가는 방식을 ‘선군정치’라고 하며, ‘선군정치 사상’의 창시자를 ‘김일성’이라고 고백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 ‘선군정치 사상’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핵무력 관련 법령의 채택’과 ‘헌법의 핵보유국 조항 명기’ 등으로 결정화되어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은 모택동이 당의 주도권을 잡은 후 ‘국제당 동양국’의 부당한 정책과 간섭을 배제하게 되며, ‘동북혁명’이 파행적으로 전개된 데 대해서도 ‘동병상련’의 ‘유감’을 가지게 됩니다. ‘중국공산당’은 1946년 6월 다시 한 번 ‘동북지역’에서 장개석과 일전을 치르게 됩니다. 이를 ‘제2차 국공내전’, 혹은 ‘해방전쟁’이라 합니다. 미국의 전적인 지원을 받는 국민당 장개석 군대에 비해 중국공산당의 ‘동북민주련군’은 군대의 이동과 보급, 양면으로 압박을 받아 열세에 처하게 되지만, 압록강과 두만강을 면하고 있는 신생 국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도움으로 공세로 전환하고 동북을 해방하게 됩니다.
‘해방전쟁’에서 ‘동북’을 해방한 영웅으로 추앙받은 인물은 ‘동북민주련군’의 사령관 ‘임표’였습니다. 관내에만 있다가 산 설고 물 설은 ‘만주’로 부임한 임표가 제일 먼저 처한 조치는 ‘만주’를 잘 아는 ‘북만’의 터줏대감 ‘주보중’을 ‘부사령관’으로 앉히는 일이었습니다. ‘주보중’은 ‘임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절체절명의 순간에 ‘김일성’에게 요청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지원을 이끌어냅니다.
‘동북지역’의 금새를 제일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은 장개석이었습니다. 당시 동북은 중국에서 가장 발달한 지역이었으며 중국 전체 공장의 80%를 보유한 공업지구였습니다. 장개석은 ‘동북을 차지하는 자가 대륙을 차지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동북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며 대만으로 밀려났습니다. 만약에 임표가 동북에서 패했다면 반대로 모택동이 대륙에서 발붙일 곳을 찾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장개석이 자신을 패망시킨 임표를 원망하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임표는 황포군관학교 출신인데 당시 교장이 장개석이었습니다. 국공합작의 전 기간 장개석은 자신의 학생이었던 임표를 높이 평가하고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장개석이 자랑으로 여겼던 군사 천재 임표도 김일성의 도움을 이끌어 낸 부사령관 주보중의 역할이 없었다면 동북해방의 영웅이 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주보중이 ‘제1차 북만원정’ 기간 맺었던 김일성과의 전투적 우정이 ‘중국공산당의 동북해방’으로 열매 맺게 된 것입니다.
조선의 인민들은 두 번에 걸쳐 중국 인민들을 도왔습니다. 한 번은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중화의 아들 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일제를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항일원화’(일제에 맞서 중화를 돕다)라고 합니다. 또 한 번은 역시 중화의 아들 딸들과 함께 힘을 모아 장개석을 물리친 것입니다. 이를 ‘항장원화’(장개석에 맞서 중화를 돕다)라고 합니다.
‘항일원화’와 ‘항장원화’ 모두의 중심에 ‘주보중’이 있습니다. 주보중은 김일성으로부터 두 번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항일원화’의 과정에서는 ‘동북인민혁명군 제5군’ 개편의 전 과정을 지원받았으며, ‘항장원화’의 과정에서는 관내 팔로군의 동북지역 수송과 각종 무기 및 피복류 보급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이 시작된 김일성과 주보중의 운명적인 상봉이 이루어 진 삶의 자리가 바로 1934년 10월 하순 단행된 ‘조선인민혁명군’의 ‘제1차 북만원정’이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