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다홍왜 회의’와 그 의의는 무엇인가요?
▶ 답: ‘다홍왜 회의’는 1935년 2월 22일부터 3월 3일까지 왕청현 제8구 농민위원회 사무소 소재지인 다홍왜에서 열린 ‘동만당단특위 연석대회’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다홍왜 회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동만당단특위 연석대회’라고 부릅니다. ‘동만당단특위’는 중국공산당 만주성당위원회 산하의 동만당과 공청단, 동만특위를 함께 부르는 명칭입니다.
‘다홍왜 회의’는 ‘제1차 북만원정’을 다녀온 김일성이 소집을 요구한 회의입니다. 김일성이 ‘다홍왜 회의’ 소집을 요구한 이유는 1935년 2월 현재 동만지역의 유격구들에서 ‘반민생단 투쟁’의 극좌적 행태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의 소집의 동기가 된 것은 만주성위 순시원의 자격으로 간도지방의 사업을 요해하러 내려왔던 종자운이 동만지방 조선사람들의 70%가 ‘민생단’이라는 허황된 보고서를 성당조직에 제출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도 동만당 지도부에 회의소집을 요구하였고, 동시에 종자운의 보고를 받은 만주성위로서도 사태파악과 수습을 위해 대표를 급파하면서 회의의 규모가 커졌습니다. 약 10일가량 진행된 이 회의 참가자의 대부분은 만주성당 파견원 위증민, 동만당단특위의 간부들인 왕윤성, 주수동, 조아범, 왕덕태, 왕중산 등을 위시한 중국인들이었고, 조선인은 김일성을 비롯한 몇몇 뿐이었습니다. 그나마 김일성을 제외한 조선인 참가자들은 ‘민생단’으로 몰릴까봐 제대로 발언하지도 못했습니다.
‘다홍왜 회의’는 ‘조선인민혁명군’을 이끄는 김일성과 ‘반민생단 투쟁’을 이끄는 중국공산당 ‘동만당단특위’의 지도부가 정면충돌한 회의입니다. 이 정면충돌의 결과 중국공산당 만주성위는 ‘반민생단 투쟁’ 과정에서 드러난 몇 가지 문제들을 국제당에 제소하기로 하고 그에 대한 결론을 받기 위해 만주성당 파견원 위증민과 공청동만특위 간부인 윤병도를 모스크바로 보내게 됩니다. 1년 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위증민은 김일성의 주장이 정당하다는 국제당의 결론을 전달합니다.
국제당의 결론이 전해지면서 3년간 동만의 유격구를 피로 물들였던 ‘반민생단 투쟁’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다홍왜 회의’는 극좌적으로 진행된 ‘반민생단 투쟁’의 편향을 바로잡는데 결정적이었던 국제당의 결론을 이끌어내는 징검다리가 된 회의입니다. ‘다홍왜 회의’가 없었다면 동만의 ‘반민생단 투쟁’은 브레이크 없는 질주를 이어갔을 것이고 동만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모조리 씨가 말랐을 것이며 그 불길은 북만과 남만도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다홍왜 회의’를 분기점으로 전체 만주가 ‘김일성 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1934년 제1차 북만 원정에서의 동녕현성 전투를 통해 군사가 ‘김일성 대장’을 알게 되었다면 1935년 ‘다홍왜 회의’를 통해서는 정치가 ‘김일성 대장’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홍왜 회의’ 이후 전체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 대장’을 ‘조선혁명을 건져낸 구원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들 모두가 죽다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김일성과 동만당 지도부의 정면충돌은 1935년 2월 ‘다홍왜 회의’ 이전인 1932년 10월부터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한 후 북만진출을 위하여 왕청에 체류하며 1구(요영구) 당사업을 지도하면서 현당과 구당 일부 일군들이 ‘반민생단 투쟁’을 극좌적으로 진행하는 현장을 목도하였습니다. 현당에서 리종진을 잡아다 구당 사무실에서 문초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적구 공작에서 며칠 늦게 귀환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리종진은 1구 소속의 지부 당서기로 공작하였고 군중들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그는 중국인 지주 집에서 10년 이상이나 머슴살이를 한 고농 출신이었으며 적의 ‘토벌’에 아내를 잃고 혁명을 하기 위해 어린 두 자식을 남에게 맡기고 유격구로 들어왔습니다. 김일성은 리종진이 ‘민생단’에 가담할 리가 없다고 보고 사업상의 불찰을 민생단 혐의의 근거로 삼는 것에 대한 부당함을 지적하며 심문을 중지시켰습니다.
심문은 일단 중지되었으나 현당 사람들은 김일성이 요영구를 떠나자마자 리종진을 학살하였습니다. 그 대신 안도에서 온 김일성 대장이 요영구 구당 사무실에 나타나 현당에서 내려간 모모한 간부들의 ‘민생단’ 심문을 정지시키고 그들을 탄핵했다는 소문이 왕청현당과 동만특위 간부들의 귀에까지 들어갔습니다. 그 소문은 왕청 지경을 넘어 연길, 화룡, 훈춘 지방에도 퍼져갔습니다.
1932년 10월 김일성이 1구당 사무실에서 보여준 언행은 사실상 ‘민생단’ 문제와 관련된 좌경분자들과의 논쟁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1933년에 들어서면서 더 심화되었습니다. 김일성 자신도 자칫 ‘민생단’의 올가미에 걸려들 뻔 했습니다. ‘민생단’ 혐의자들을 변호하거나, 구금된 혐의자들을 석방하는 것 자체가 ‘민생단’으로 몰리는 빌미가 되는 엄혹한 시절에 앞장서서 좌경분자들과 논쟁을 하게 되다보니 남의 목숨을 한 번 구할 때마다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했습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민생단’으로 몰려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던 참혹한 때에 ‘민생단’ 혐의자들을 변호하고 보호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이러한 모험을 감행한 이유를 ‘사랑’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인간애와 동지애, 민중애의 무기를 가지고 이 세상을 개조하고 변혁하기 위해 일어난 투사들인 공산주의자들에게 ‘사랑’의 무기가 없다면 부르주아지들이나 마적과 다를 바가 없다고 역설하며 중국인 간부들에게 인간을 인간답게 동지들을 동지답게 민중을 민중답게 대하라고 강권하였다는 것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구성하는 요소 중에는 ‘인덕정치’가 있습니다. ‘인덕정치’는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고 동지를 동지로 대하며 인민을 인민으로 섬기는 ‘믿음’의 정치, ‘사랑’의 정치를 말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표방하는 ‘인덕정치’의 현실이 처음으로 구현된 삶의 자리는 극좌적인 ‘반민생단 투쟁’이 진행되던 동만의 유격구였습니다.
원래 ‘민생단’은 일제가 조작해낸 조직이었습니다. 1931년의 9.18사변 이후 만주지방에서 급격히 발전하는 혁명정세를 가로막기 위해 사이또 총독이 동만으로 파견한 ‘간도 시찰반’ 성원인 친일인사 박석윤, 연변자치촉진회 전성호, 연길주재 만주국군 군사고문 박두영, 반공특무 김동한 등을 중심으로 1932년 2월 연길에서 발족한 ‘민생단’은 별 성과 없이 신임총독 우가끼의 의사에 따라 두 달 만인 1932년 4월 해산됩니다. 1934년 봄 연길 헌병대장 가또 하꾸지로와 독립수비보병 제7대대장 다까모리 요시는 ‘민생단’을 다시 부활시켰고, 동년 9월에는 ‘간도협조회’를 만들고 여기에 ‘민생단’을 통합하였습니다.
일제의 관헌자료에 따르면 동만에서 ‘민생단’으로 가입시킨 사람의 수는 7~8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일제는 ‘민생단’ 공작을 만주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작 중 하나로 평가합니다. ‘민생단’에 가입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거짓선전이 먹혀들어가 손도 안대고 조선인 공산주의자 2,000명을 제거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제의 입장에서 보면 성공적인 ‘이이제이’ 전략의 표본이라 할 만합니다.
일제의 모략 공작과는 별도로 ‘민생단’ 공작으로 인한 희생자가 많이 발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만주성위나 동만특위, 각급 현당과 구장 조직의 책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형형색색의 일부 좌경기회주의자들과 종파사대주의자들의 불순한 정치적 야망에 따라 ‘반민생단 투쟁’이 극좌적으로 진행된데 있습니다. 중국인 좌경기회주의자들은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동만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탐을 냈으며 조선인 종파사대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야합하여 견실한 공산주의자들인 제 동족을 밀어내고 자파를 확대하려 획책하였습니다. 지배주의와 사대주의가 야합하여 자신들의 본진을 폭파시킨 것입니다. 자살골도 이런 자살골이 없습니다.
결국 적인 일제의 ‘민생단 조작’과 아의 ‘반민생단 투쟁’이 ‘합작’하고, 아 내부에서는 교조주의와 사대주의가 ‘합세’하여 동만 유격구의 인민들을 도륙한 기이하고도 괴기스러운 참사였습니다. 이 참사의 진행을 방치하게 되면 ‘조선혁명’ 전체를 말아먹게 되고 조선인 공산주의자 전원이 몰살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 명약관화했습니다. 유격구의 민심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1935년 2월 북만에서 돌아온 김일성이 서둘러 동만당에 회의 소집을 요구한 이유였습니다.
‘다홍왜 회의’가 진행되는 열흘 동안 김일성은 단신으로 중국인 공산당 지도부들과 맞서야 했습니다. 회의가 길어지니 상대편 참가자들은 돌아가면서 들고나며 회의에 참가했지만 김일성은 열흘 내내 새벽부터 밤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단신으로 맞서다보니 결석이나 지각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북만에서 얻은 촉한이 낫기도 전에 하루 콩죽 세 사발만 먹으면서 진종일을 열흘 간 시달리느라 육신은 한계치에 다다랐지만 ‘조선혁명을 구원해야 한다’라는 일념으로 버텼습니다.
‘다홍왜 회의’ 개최의 계기가 된 보고서를 제출했던 종자운은 회의 석상에서도 동만에 있는 조선사람들의 70%, 조선혁명가들의 80~90%가 ‘민생단’이나 그 혐의자들이며 유격구는 ‘민생단’의 양성소라는 종래의 주장을 되풀이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현재 이 회의장을 호위하고 있는 조선인민혁명군 1중대의 80~90%도 ‘민생단’인가, 80~90%는 고사하고 8~9%만 ‘민생단’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여기에서 마음 놓고 회의할 수 없을 것이라고 반박하였습니다. 만주성당 파견원인 위증민은 김일성의 주장에 동조하여 부분과 전체는 구별해서 보아야 하며 조선사람 중 일부 ‘민생단’이 있다고 조선사람 전체를 ‘민생단’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표명하였습니다.
회의 주제는 ‘간부문제’로 옮겨갔습니다. 만주성당은 동만당 지도부의 간부선발과 배치에서 종래의 조선인 중심주의로부터 중국인 중심주의로 전환할 데 대한 비밀지령을 하달한 상태였습니다. 이 지령은 당시 2만 5천리 장정 중이던 중국공산당 중앙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왕명과 강생이 주관하고 있던 국제당 동양부의 지령을 그대로 받아 내린 것입니다. 국제당 동양부에서 왕명은 극좌, 강생은 음모의 대명사였습니다. ‘반민생단 투쟁’이 노선에서는 극좌적으로 방법에서는 음모적으로 진행된 이유입니다.
회의 참가자들은 ‘소수민족은 간부로 될 수 없고 다수민족만이 간부로 될 수 있으며 소수민족이 다수민족을 지도하는 것은 부당하고 불합리하다’, ‘조선혁명가들은 종파적 습성과 동요성이 많고 반동화되기 쉽기 때문에 간부로 될 수 없다’는 등의 주장을 들고 나왔습니다. 김일성은 간부의 선발과 배치는 혁명에 대한 충실성과 능력을 위주로 해야 하며 국적이나 소속, 인구의 다수가 간부선발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소수민족이건 다수민족이건 간부의 표징을 갖추었으면 간부로 되는 것이고 갖추지 못했으면 간부로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원칙을 제시하였습니다.
간부의 출신 민족을 거론하다가 마침내 회의는 ‘민족주의’의 문제를 다루게 되었습니다. 교조적인 인사들은 ‘민족주의’의 아버지는 ‘일본제국주의’라는 궤변을 들고 나와 민족주의자들을 포섭하고 있는 조선 공산주의 운동 대열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원래 민족주의의 이념적 기초는 애국애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만큼 그것을 반동시하는 것은 곧 애국주의를 반동시하는 것으로 된다, 민족주의라고 하여 덮어놓고 이단시 하지 말라, 민족주의가 부르주아지의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지 않는 한 그것을 무턱대고 배척할 필요는 없다, 민족주의가 역사의 반동으로 되는 것은 다만 온 민족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만의 이해관계를 대변할 때뿐이다’라고 반박하였습니다. 중국인 배타주의자들이 ‘민족주의’를 시비한 이유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민족해방’을 가로막기 위함이었습니다.
회의의 말미에 김일성은 ‘당신들은 배타주의적 입장에서 출발하여 이미 동만의 군정관계 간부들 중에서 당신들과 함께 싸워온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을 수십 수백명 제거하거나 ‘민생단’으로 몰아 학살하였다, 수많은 지도핵심들이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자기 자리를 내놓았는데 아직도 더 제거해야겠는가, 당신들이 만일 지금과 같이 조선사람들을 배척하고 학대하는 길로 집요하게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러한 곁방살이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폭탄선언을 하였습니다. 위증민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못했지만 김일성의 주장에 이해를 표시하였습니다. 어쨌든 이 회의의 의장 격인 만주성위 파견원 위증민의 이성적 판단과 태도는 김일성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다홍왜 회의’의 논쟁은 곧 이어서 개최된 ‘요영구 회의’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회의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은 김일성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도 의견 차이는 완전히 해소되지 못하고 미결로 남게 되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선혁명과 조선민족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국제당의 방침인 1국1당제에 위배되는 것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포함하여 몇 가지 문제들을 국제당에 제소하고 결론을 받아오기 위해 위증민과 윤병도를 모스크바로 파견한 것입니다.
‘다홍왜 회의’에서 김일성이 그 어떤 압력에도 굽어들지 않고 자기의 신념에 따라 끝까지 정정당당하게 처신할 수 있은 것은 백지장처럼 깨끗한 경력, 유격대 지휘관으로서의 전투성과, 이론적 뒷받침의 덕이었습니다. 김일성은 학생시절부터 공산주의 운동으로 운동의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만약 김일성이 민족주의 운동에 관여한 경력이 있었다면 민족배타주의자들은 그것을 빌미로 김일성에게 ‘민생단’의 낙인을 찍었을 것입니다.
한편 김일성이 동만 최초로 안도현에서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고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개편하였으며 동만 유격구 방어전과 북만원정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둔 군사지휘관이 아니었거나, 길림시절부터 학생운동을 지도하며 수많은 이론서적들을 탐독하여 맑스-레닌주의 고전에 정통한 이론가가 아니었다면 ‘다홍왜 회의’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다홍왜 회의’에서 논의된 많은 안건들은 당시 혁명정세에서 첨예한 문제들이었기에, 이론적인 뒷받침이 없이는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거나 상대의 허점을 지적하며 새로운 견해를 제시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김일성의 ‘말’을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무력’이 뒷받침하지 않았다면 상대에 대한 설득은 고사하고 자신의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다홍왜 회의장인 왕청현 제8구 농민위원회 사무소를 호위하였던 조선인민혁명군 1중대의 혁명무력은 김일성의 목숨을 외부의 일제 관동군과 내부의 배타주의자들로부터 2중으로 보호한 것입니다.
‘다홍왜 회의’를 통하여 김일성은 자주성은 민족의 첫째가는 생명이라는 것과 이 자주성을 고수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족을 이루는 모든 구성원들, 특히는 그 선각자들의 희생적인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심장깊이 절감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의 과정에서 김일성이 절감한 ‘자주성’이 사람의 첫째가는 속성이자 민족의 생존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원천이라는 깨우침은 ‘주체사상’으로 정식화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 첫째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