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새 사단’ 탄생의 경과와 그 의의는 무엇인가요?
▶ 답: ‘새 사단’은 ‘남호두 회의’에서 채택한 ‘조국에 무보를 뻗치고 군호를 울리자!’라는 구호를 실천하기 위해 새롭게 편성한 사단입니다. ‘새 사단’을 만들기 위한 방침은 ‘미혼진 회의’에서 정해졌습니다. 김일성은 ‘새 사단’을 직속 부대로 편성하여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으로 삼고자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남호두 회의’ 이후 백두산을 향해 행군하면서 돈화현과 안도현의 경계인 목단령 산줄기에 있는 인민혁명군 독립1사 후방밀영기지 ‘미혼진’에 들러 ‘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남호두 회의’의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실천적인 대책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회의가 ‘미혼진 회의’입니다. 회의에는 위증민, 왕덕태를 비롯하여 김산호, 박영순, 김명팔 등 인민혁명군 중대정치지도원급 이상의 간부들이 다수 참가하였습니다.
‘남호두 회의’가 전략적 과업들을 결정한 회의였다면, ‘미혼진 회의’는 그에 따르는 일련의 전술적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회의였습니다. ‘남호두 회의’의 방침대로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 지구를 중심으로 남북 만주와 국내 깊이에까지 자유자재로 유동하면서 대부대에 의한 적극적인 군사공세와 정치활동을 전개하자면 무엇보다 세 가지 고리에서 사람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당역량’, ‘군사역량’, ‘통일전선역량’, 이 세 가지 역량을 충분히 마련하여야 조선혁명을 새로운 높이에로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미혼진 회의’에서는 우선 ‘군사역량 강화’를 위해 인민혁명군 부대들의 개편 문제를 토의하고 새로 조직되는 사단들과 여단의 활동지대를 결정하였습니다. 기존의 2개 사단에 1개 사단과 1개 독립여단을 새로 편성하기로 하고 새로 조직되는 ‘3사’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국경 연안 일대에서, ‘1사’는 무송, 안도, 림강 일대에서, ‘2사’는 간도와 북만일대에서 각각 활동하기로 하였습니다. 이 ‘3사’가 바로 김일성의 직속 부대가 되어 백두산으로 진출하게 되는 ‘새 사단’입니다.
김일성은 ‘새 사단’ 편성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었고 나름대로의 복안을 마련해놓고 있었습니다. 무송현에 소재한 ‘마안산’에 주둔하고 있는 ‘2연대’를 주축으로 ‘새 사단’을 편성하는 안이었습니다. ‘2연대’는 ‘독립연대’로 활동할 때부터 싸움을 잘하는 ‘고려홍군’이라고 소문난 순수한 조선인 부대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연대는 동만의 연길, 왕청, 화룡 등 각 현 유격구들에서 1개 중대 씩 선발하여 조직한 부대였고, 대부분의 성원들은 김일성과 연고가 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새 사단’을 중심으로 ‘당역량’, ‘군사역량’, ‘통일전선역량’을 강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자면 ‘새 사단’은 일제의 군대와 경찰들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군사활동’만을 벌이는 본래 의미의 사단만이 아니라, 백두산 일대와 국내 도처로 나가 ‘당조직망’도 확대하고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통일전선 조직’들도 영도해나가야 할 ‘정치군대’로서의 새로운 임무와 면모를 갖추어야 했습니다. ‘새 사단’을 조선인민혁명군의 주력사단으로 키워 ‘조국광복회’라는 열차차량을 끌고나갈 ‘조선혁명의 선두 기관차’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이 기대는 무참히 깨어집니다. 마안산에 도착했지만 믿었던 ‘2연대’는 교하 쪽으로 원정을 가서 없고, ‘민생단’ 혐의자 100여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2연대’가 원정에서 복귀하고 다시 백두산으로 찾아와서 합류하게 되는 것은 반년도 더 지난 이후의 일입니다. ‘2연대’는 아쉽게도 ‘새 사단’의 ‘주력부대’가 되는 영예를 놓쳤습니다. 이 영예를 잡게 되는 것은 ‘일제 간첩’으로 몰려 ‘죄인’의 처지에 내몰렸던 ‘민생단’ 혐의자들이었습니다.
마안산에서 1사 정치주임 김홍범을 통해 ‘민생단’ 혐의자들의 ‘죄행’을 보고 받은 김일성은 림강 마의하 방면으로 ‘식량공작’을 나가 있는 그들을 복귀시키라고 명령하는 한편, 그들의 ‘죄행’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는 ‘민생단 문서보따리’를 풀어놓고 검토하였습니다. ‘남호두 회의’에서 ‘국제당 결론’이 전달되었지만 교통과 통신이 불비한 만주에서 ‘반민생단 투쟁’의 마녀사냥은 현재진행형이었습니다. 극좌주의의 광란 속에서 고문으로 강요된 문서 쪼가리는 믿을 바가 못 되었습니다.
마안산 밀영으로 복귀한 ‘민생단’ 혐의자 100여명은 김일성에게 자신들의 죄행을 순순히 인정하였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그들의 거짓자백을 믿을 수 없었던 김일성은 그들의 심리를 분석하여 그들이 ‘극단적인 절망’에 빠져있으며, 그 이유는 그들이 ‘같은 목적을 위해 싸우는 동지들’에게서 받은 ‘억울한 오해와 불신’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결백’을 주장할수록 ‘고문’의 강도만 세어지고, ‘진정’은 ‘가식’으로 정죄되어 죄상만 불어나니, 명색이 공산주의자로서 ‘귀순’이라는 ‘배신’은 못하겠고 그냥 ‘처분’에 맡기는 것이 ‘상책’이라는 ‘자포자기’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이들을 ‘구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김일성이 내린 처방은 ‘믿음’이었습니다. ‘민생단’ 혐의자들에게 ‘믿음’을 주고, 그 ‘믿음’으로 그들을 ‘구원’해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믿음’에는 ‘행함’이 따라야 하는 바, 김일성은 ‘민생단 문서보따리’를 태우기로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민생단’ 혐의자들과의 허심탄회한 담화를 통해 그들로부터 민생단이 아니라는 진술을 이끌어내고, 각자의 억울한 사연들을 충분히 토설할 수 있도록 ‘간증’의 장을 마련한 다음, 집회의 마무리에 ‘민생단 문서보따리’를 ‘소각’할 채비를 마쳤습니다. 그는 ‘민생단’ 혐의자들의 혐의가 ‘모두 무효’임과 동시에 그들 모두가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의 대오에 들어섰다는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민생단’ 혐의자들 중 몇몇을 선발하여 마당 한 복판에 쌓여있는 ‘민생단 문서보따리’에 불을 달자 집회의 열기는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그들 모두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만끽하였습니다.
어제의 ‘민생단’ 혐의자들이 오늘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인 ‘새 사단’, 즉 ‘조선인민혁명군 3사’의 핵심 대원이 되었습니다. 마안산에서 ‘민생단’ 혐의자들에게 ‘구원’이 이르렀다는 ‘기쁜 소식’이 퍼지자 곳곳에서 숨어 지내던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대첨창 골짜기에 숨어 있었던 화룡출신의 반일자위대원들, 훗날 사령부 전령병이 된 ‘백학림’, ‘꾀꼬리’ 김혜순, 새 사단의 첫 여성중대장이 된 ‘박록금’도 그 무렵에 찾아왔습니다. 안도현 오동양차 부근 수림지대에서 활동하던 김주현 소부대, 처창즈 방면에서 활동하던 김택환 소부대도 달려왔습니다.
마안산에 왔을 때 10여명에 불과했던 대오가 ‘죄인’이었던 ‘민생단’ 혐의자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선포하고, 그 ‘기쁜 소식’이 전파되자 수 백 명의 대오로 불어났습니다. 김일성은 정식으로 연대들과 중대들을 편성하였습니다. 주력부대의 무장장비를 개선하기 위해 10~15명 규모로 조를 조직하고 책임자를 임명하여 한 달을 기한으로 적을 치고 무장을 마련하라고 명령을 주자, 어제의 ‘민생단’ 혐의자들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모두 무장을 완료하고 복귀하였습니다. ‘믿음’은 평범한 대원을 ‘용사’로 거듭나게 하였습니다.
마안산에서 ‘새 사단’을 탄생시킨 ‘수령’ 김일성의 경험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수령’이 영도한 ‘항일무장투쟁’의 전통이 지금도 면면히 이어져 조선의 ‘신앙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을 집단의 통일단결과 공고한 발전을 담보하는 첫째가는 ‘생명’으로 삼고, ‘믿음’과 ‘사랑’으로 ‘일심단결’을 눈동자와 같이 소중히 여기며 철통같이 유지하고 있는 ‘조선특색적 신앙세계’의 뿌리는 ‘항일무장투쟁’ 시기 ‘민생단’ 혐의자들을 ‘믿음’으로 ‘구원’하여 ‘새 사단’을 편성하던 ‘마안산’ 기슭에 닿아있다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