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거 55돐에 즈음하여 무송에 세운 장울화 열사 기념비. 1992년 10월 27일 제막
서거 55돐에 즈음하여 무송에 세운 장울화 열사 기념비. 1992년 10월 27일 제막

▲ 문: ‘혁명전우 장울화’는 누구인가요?

▶ 답: 장울화는 김일성과 ‘무송제1우급소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중국인 친구입니다. ‘우급’은 ‘고급’이란 뜻입니다. 둘이 만나게 된 것은 1925년 아버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압록강을 건너온 김성주가 아버지가 계신 무송에 정착하여 장울화와 같은 학급에 편입되었기 때문입니다.

김성주의 아버지 김형직 선생은 국내공작을 위해 건너간 포평에서 손세심이라는 밀정의 고발로 일경에게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되던 중 후창에서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여 압록강을 건너왔습니다. 일경의 눈을 피해 무송 부근의 대영으로 몸을 숨긴 김형직 선생은 무송에 정착하기 위해 무송현 당국의 승인을 받으려 무던히 애썼습니다. 이때 김형직 선생의 무송현 정착을 도와준 대부호인 장만정의 아들이 장울화였습니다.

장만정은 병에 걸려 명의를 물색하다가 김형직 선생의 치료를 받았는데, 선생의 붓글씨를 보고 반하여 친구가 되었습니다. 장만정은 대부호였지만 애국자였습니다. 아들이 둘 있었는데 이름을 울중, 울화로 지었습니다. 뒷 글자를 합치면 ‘중화’가 됩니다. 장만정은 조선의 독립운동자인 김형직 선생을 동정하고 방조하였습니다.

장만정의 도움으로 현장의 허가를 얻어 무송에 정착한 김형직 선생은 장만정과의 교유가 잦았고 그때마다 김성주와 장울화는 어울렸습니다. 장울화가 집에 오면 조선음식을 해주었고 김성주가 장울화네 가서는 교즈를 먹었습니다. 원래 장만정은 교즈를 잘 빚는 산동 태생이었습니다.
 
1926년 6월 김형직 선생이 서거하고 김성주는 화성의숙에 입학하여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를 결성합니다. 김성주는 무송에도 당조직을 대신할 수 있는 공산주의 비밀소조를 만들고 어머니와 박차석, 정학해, 채주선, 장울화를 인입하였습니다.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정학해로 인해 장울화는 죽게 됩니다.

10년이 지난 1936년 봄 마안산에서 민생단 혐의자들로 새 사단을 편성하고, 민생단 혐의자들의 유자녀들인 아동단까지 맡게 된 김일성은 무송현성에 사람을 보내 장울화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옷을 해 입히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은 어머니가 남긴 유산 20원을 다 털어 천을 구했지만 아이들을 다 입히기에는 부족하였습니다.

장울화는 무송 근처 묘령동굴에서 김일성을 만나 회포를 풀고 3,000원이라는 거금을 마련하여 원호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이 돈으로 아동단원들과 주력부대 부대원들에게 새 옷도 한 벌씩 해 입히고 여러 가지 후방물자들도 해결하였습니다. 이 외에도 장울화는 솜, 신발, 양말, 내의, 약품, 식량, 사진기재들을 비롯한 막대한 양의 원호물자들을 보내왔습니다. 그해 가을 장울화는 갑자기 헌병대에 체포되어 감옥으로 끌려갔습니다.

일제 헌병대에 장울화를 밀고한 자가 앞서 언급한 소학 동창 정학해입니다. 정학해는 한때 백산청년동맹 무송현 지회장으로 활동하다가 이내 변절하여 림강 헌병대의 조종을 받는 선무공작반에 들어갔습니다. 선무공작은 귀순공작을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알 리 없던 장울화는 김일성의 행처를 탐문하는 정학해에게 접촉 사실을 말했습니다. 사람을 너무 믿은 잘못으로 장울화는 포로가 되었습니다.

갖은 악형에도 김일성의 행방을 토설하지 않던 장울화는 고문으로 인해 비몽사몽 간에 비밀을 누설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자결을 결심합니다. 대부호인 아버지를 움직여 병보석으로 잠시 풀려난 장울화는 1937년 음력 10월 2일 사진현상약으로 쓰는 승홍을 먹고 자결하였습니다. 25살이 채 되지 않은 나이였습니다. 아들 장금천은 네 살이었고 딸 장금록은 갓 태어났을 때입니다. 아내 편에 김일성에게 남긴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령부를 특무들이 찾고 있다. 사령부를 빨리 옮기기 바란다’는 편지가 그대로 유서로 되었습니다.

장울화는 조선혁명을 위해 자신의 한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렸습니다. 혁명동지 김일성과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천금보다 소중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오늘 장울화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두가 다 아는 조중친선의 상징으로 불리우고 있으며 국제주의자의 세계적 전형으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는 죽은 자와 산 자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유지를 산 자가 잘 지키는 것이 최고의 의리이며, 이를 통해 죽은 자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사회집단’이 ‘생명’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사회정치적 생명’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사회정치적 생명’은 ‘사회집단’과 더불어 ‘영생’합니다. 개별적인 사람도 ‘사회집단’을 모체로 하여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독특한 ‘영생관’이 조선의 신앙세계를 특징짓고 있습니다. 이 ‘영생관’을 이해하지 못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2024년 벽두에 조선은 ‘연방제 통일방안’을 폐기하였음을 내외에 엄숙히 선포하였습니다. 이로써 남북 간에 ‘동족관계’는 없어지고 ‘최대의 교전국 관계’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제 한반도 평화를 위해 택할 수 있는 길은 한국과 조선 사이에 국교를 수립하여 평화를 정착시키는 길만이 남아 있습니다. ‘동족관계’가 없어진 ‘남북관계’에서 ‘전쟁’을 막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교전국 관계’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한조수교’입니다.

‘한조수교’를 위해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수교 상대국의 주되는 신념체계, 사상을 파악하는 것은 상대국의 국민들을 이해하는 첩경이며 수교를 위한 필수적인 공정입니다. 특히나 조선은 ‘사상의 나라’입니다. 스스로 ‘사상강국’임을 자처하는 조선에서 ‘사상’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와 역할은 한국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습니다.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조선의 ‘신앙세계’와 만날 수 있어야 ‘조선사람’을 만날 수 있고, ‘우호, 친선, 호혜’의 관계를 맺을 수 있으며, ‘수교’할 수 있습니다. ‘조선’과의 ‘전쟁’을 획책하며 ‘외환유치’를 기도하는 ‘내란세력’을 분쇄 근절하기 위하여서도 반드시 ‘한조수교’의 길을 개척해야 합니다. ‘전쟁’의 싹을 자르는 것은 ‘한조 평화조약’의 체결로 가능합니다. 물론 ‘한조 평화조약 체결’을 위해서는 ‘조미 평화조약 체결’이 선행되어야 하며 미국이 강점하고 있는 군사주권을 대한민국이 반환받아야 가능합니다.

김일성 주석은 장울화를 잊지 않았습니다. 일제 패망 이후 동북지역에서 국공내전이 일어났을 때 장울화의 부모처자를 제일 많이 생각했습니다. 대부호였던 장만정 일가가 독재대상으로 판정되어 ‘타도’의 대상이 되지 않을까 걱정한 것입니다. 그들의 소식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59년 만주행을 한 ‘항일무장투쟁전적지답사단’을 통해서였습니다.

답사단장 박영순은 장만정이 1954년 서거하였다는 것과 장울화의 부인이 아들 장금천과 딸 장금록을 데리고 무송의 옛집에서 검박하게 생활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인사를 전해 받은 부인은 답례로 장울화와 동생 김철주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왔습니다. 아버지가 자결할 때보다 두 살이나 위가 된 장금천은 장문의 편지를 김일성 주석에게 보내왔습니다.

장금천의 편지가 당도하고도 20년이 더 지난 1984년 김일성 주석은 소련과 동구라파를 역방하는 기회에 기차 편으로 도문-목단강-하얼빈-치치할-만주리-소련의 노정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특별열차가 도문을 떠나 돈화쪽으로 달릴 때 김일성 주석은 무송에 있는 장울화의 처자들을 생각하고 수행원들을 시켜 선물을 보냈습니다. 구라파에서 돌아온 김일성 주석은 장금천이 보낸 두 번째 편지를 받고 그를 평양에 초청합니다. 호요방 총서기에게 장금천의 조선 방문을 잘 도와줄 것을 따로 부탁하였습니다.

1985년 4월 마침내 장금천은 동생 장금록과 맏아들 장기를 데리고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초면에 이들을 끌어안고 ‘너희들을 환영한다’는 말을 중국말로 했습니다. 그들과의 오찬석상에서 축배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아니라 한 집안 식구로 대한 것입니다. 환영연은 3시간동안이나 진행되었습니다. 이 모두가 관례에는 없던 일이었습니다. 만날 때마다 관례가 깨져나갔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너의 할아버지는 조선의 독립운동을 도와주고 너의 아버지는 조선공산주의운동을 도와주었다’라는 한마디로 장씨 가문의 공적을 평가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자손들이 대대손손 의리를 귀중히 여기는 참된 인간이 되고 절개가 강한 혁명가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당부성 평가였습니다. 장금천 일행이 귀로에 오를 때 김일성 주석은 국경도시 신의주 초대소까지 나가 또 다시 오찬을 마련하고 3시간에 걸친 담화를 하였습니다. 작별할 때 일행들에게 사진기를 한 대씩 선물하였습니다. ‘형제사진관’을 운영했던 아버지 장울화를 기억하라는 의미였습니다. 장금천도 무송에서 아버지처럼 사진업에 종사하고 있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헤어지면서 이들에게 ‘나는 내일 신의주를 떠나 평양으로 가게 된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일을 잘하고 우수한 공산당원이 되어라, 지위를 탐내지 말고 잘못을 범하지 말거라, 너희들은 어려서부터 아버지 없이 자랐는데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장금천은 1987년에도 처 왕봉란과 둘째아들 장요, 손녀 장맹맹을 데리고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5살 난 장맹맹은 ‘4월의 봄 친선예술축전’에 참여한 외국손님 중에서 ‘제일 연소한 벗’이었습니다. 장맹맹은 장씨 가문의 다섯 번째 세대를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했습니다.
 
1992년 장울화의 자제들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 80돐을 축하하기 위해 또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습니다. 장금천 부부와 장기 부부, 장유, 장맹맹, 베이징에서 살고 있는 장금록과 그의 남편 악옥빈, 딸 악지운, 아들 악지상 등 12명에 달하는 일행이 평양에 모였습니다. 장금천은 세 번째 방문 기념으로 자신이 집필한 수기 ‘흘러온 옛정’을 선물하였습니다. 김형직 선생과 장만정의 교분으로부터 시작된 두 가정의 우의에 대해 보태지도 가공하지도 않고 소박하게 서술한 책이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답례로 ‘세기와 더불어’ 중문판 1,2권을 선물하였습니다.

장금천은 그 자리에서 자기 아버지의 서거 55돐을 계기로 묘비를 세우려는데 거기에 새길 비문을 하나 써주었으면 하는 의향을 표시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아예 기념비를 보내주겠다고 역제안을 하였습니다. 장울화의 서거일인 음력 10월 2일이 1992년에는 양력 10월 27일인 관계로 그 날짜에 맞추어 기념비 제막식을 진행할 수 있도록 중국의 해당기관에도 협조를 요청하였습니다.

조선의 당역사연구소 일군들이 기념비를 평양으로부터 무송까지 날라 갔습니다. 중국의 당과 정부에서는 림강 교두에까지 사람들을 보내어 조선의 대표들을 열렬히 맞이하였고 10월 27일에는 무송 시내에 있는 장울화의 묘지에서 기념비 건립 행사를 성대히 치르도록 해주었습니다. 중국의 방송 보도기관들에서는 행사에 큰 의의를 부여하여 널리 보도하였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자필로 된 기념비에는 중문으로 ‘장울화 열사의 혁명업적은 조중인민의 친선의 빛나는 상징이다. 열사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업적은 인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김일성. 1992년 10월 27일’이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도 우정이 계속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조선의 신앙세계는 긍정으로 답합니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잊지 않을 때 그 우정은 공고하고 진실하고 영원한 것으로 될 수 있으며, 죽은 사람을 자주 추억하고 그들의 업적을 널리 소개하며 그들이 남기고 간 후대들을 잘 돌보고 그들이 남긴 유지를 잘 지키는 것이 선대들과 선열들, 먼저 간 혁명동지들에 대한 산 사람의 의리이며, 이러한 의리를 통하여 역사와 전통의 진정한 계승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근거로 하여 죽은 자와 산 자 사이에 영원한 우정이 가능하며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로 뭉쳐진 사회집단의 영생을 모체로 하여 사회의 개별적인 성원들도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를 특징짓고 있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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