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조국광복회’와 그 의의는 무엇인가요?
▶ 답: ‘조국광복회’는 1936년 5월 5일에 창립된 상설적인 반일민족통일전선체입니다. 한국에서는 5월 5일이 어린이날이지만, 조선에서는 5월 5일을 조국광복회 창립일로 기념합니다. 5월 5일은 공산주의운동의 창시자 칼 맑스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김일성은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ㅌ.ㄷ)을 결성하던 때로부터 조선이 자주독립을 이룩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길은 민족대단결을 바탕으로 하는 전민항쟁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민족대단결을 위해서는 각이한 계급 계층에 속한 전 민족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조직이 필요했습니다. 그 조직이 ‘통일전선조직’이고, 통일전선조직을 만들어 전 민족을 묶어세우는 운동이 ‘통일전선운동’입니다. 통일전선운동을 위해 김일성이 만든 통일전선조직이 바로 ‘조국광복회’입니다.
김일성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창립에 대한 결정을 채택한 1936년 2월의 ‘남호두 회의’ 이후 줄곧 ‘조국광복회’ 창립에 대한 구상을 무르익혔습니다. 1936년은 1935년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채택된 ‘인민전선노선’이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시기입니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이웃 독일의 나치 집권에 충격을 받고 반파쇼 통일전선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1934년에는 사회당과 공산당이 ‘반전반파쇼통일행동협정’을 체결하였고, 1935년에는 사회당, 공산당의 연합에 소부르주아정당인 급진사회당이 가담하여 ‘인민집합’을 결성하였으며, 마침내 1936년 5월 총선에서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레옹 블룸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전선내각을 탄생시켰습니다.
프랑스의 사례에서 좋은 시사를 받은 국제공산당은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 앞에 ‘인민전선 결성’을 중요한 투쟁목표로 제기하였습니다. 급변하는 세계정세를 재빨리 포착하고 각국 노동계급을 반전반파쇼 투쟁으로 묶어세워 ‘전쟁방지, 평화수호, 파쇼반대, 민주수호’를 당면 전략과업으로 제시한 것은 반파쇼인민전선운동과 관련한 국제공산당의 역사적 공적입니다. 또한 프랑스가 전면적으로 나치화 되지 않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운동을 벌여 비시 괴뢰정부와 맞선 것은 인민전선운동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 파시즘은 새로운 적이 아니었고, 통일전선운동노선도 새로운 노선이 아니었으나, 국제적인 환경의 변화는 반일민족통일전선노선에 따른 범민족적 통일전선체를 만드는데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었습니다. 국제당의 새로운 노선과 그 노선에 따른 결론, 즉 조선혁명의 주인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로 인정하며, 조선혁명을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의 신성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확인한 결론이 전해진 남호두 회의 이후 김일성은 ‘조국광복회’ 창립 준비를 다그쳤습니다.
‘조국광복회’의 강령과 규약, 창립선언문을 최종 검토한 준비위원회 회의는 1936년 4월 말 무송현 만강부락 허락여 촌장의 집에서 개최되었습니다. 최종 준비가 완료되자 창립대회 장소를 동강수림으로 내정하고 자리를 옮겼습니다. 남만의 리동광과 전광(오성륜)은 참여 의사를 밝혔으나 사정이 생겨 불참하였으며 국내에서는 벽동에서 천도교 대표와 농민 대표, 온성에서 노동자 대표와 교원 대표가 참여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 창립대회는 1936년 5월 1일 시작되어 15일간이나 진행되었습니다. 이를 ‘동강회의’라고 합니다. 동강회의 첫날에 진행된 ‘조선인민혁명군 군정간부회의’에서 한 김일성의 보고가 ‘반일민족통일전선운동을 더욱 확대발전시켜 전반적 조선혁명을 새로운 앙양에로 이끌어올리자’입니다. 이 보고에서 김일성은 ‘조국광복회’를 창립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김일성이 설명하고 있는 ‘조국광복회’를 만든 이유는 첫째, 각계각층의 광범한 애국역량을 전국적인 규모에서 하나로 결속하고 그들을 반일혁명투쟁에 통일성 있게 조직하고 동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항일무장투쟁과 대중을 밀접히 결합시켜 조선인민혁명군과 광범한 반일대중과의 연계를 결정적으로 강화하기 위함입니다. 셋째,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거점으로 당 창건 준비사업을 더욱 줄기차게 밀고나가기 위함입니다.
‘조국광복회’ 창립대회에서는 1936년 5월 5일 ‘조국광복회 10대강령’과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을 채택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은 1930년대의 혁명정세와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건, 계급관계 등을 분석한데 기초하여 조선혁명의 성격과 임무, 전략전술적 원칙을 규정하였으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대중의 이익과 각 계층 애국적 인민의 공통된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조선혁명의 전도를 밝혔습니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은 ‘조국광복회 10대강령’에 기초하여 전 조선민족의 일치단결로 일제를 몰아내고 진정한 조선인민정부를 수립할 것을 비롯한 5개조의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조국광복회’ 창립을 준비하면서 김일성은 리동백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리동백은 함경남도 단천 출신으로 ‘군비단’에서 통신사무국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동향 출신의 리동휘를 찾아가 고려공산당에 가입하고 여기저기를 거치며 공산주의 운동을 하다가 종파주의에 환멸을 느끼고 화룡현 벽촌에 은둔하던 인사였습니다. 리동백은 제 발로 김일성을 찾아와 입대를 청원하고 입대 후 사령부 비서처에 배속되어 ‘조국광복회’ 창립을 도왔고 창립 이후에는 ‘조국광복회’의 기관지 ‘3.1월간’의 주필로 출판소 책임자 사업을 겸하여 보았습니다.
‘조국광복회’ 창립대회에서 창립선언이 채택되자, 이 창립선언의 발기인을 누구로 하느냐가 논의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조국광복회’는 전체 조선인민의 반일역량을 총집결하여야 하는 것만큼 민족적 형식을 띠어야 하며, 발기인으로는 과거 의병운동이나 3.1운동시기부터 조선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투신한 명망이 높고 나이가 지숙한 애국지사로 하는 것이 좋겠다며 리동백과 려운형을 공동발기인으로 추천하였습니다. 아직 국내에 ‘김일성’이라는 이름 석 자가 잘 알려지지 않은 조건에서 내놓은 제안이었습니다.
리동백의 반대와 수정제안으로 김일성은 ‘김동명’이라는 가명을 쓰는 조건으로 공동발기인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김동명’이라는 가명은 리동백이 지어 준 이름으로, ‘동녘 동’에 ‘밝을 명’자를 썼습니다. 이리하여 5월 5일에 발표된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에는 김동명, 리동백, 려운형 세 사람의 이름이 공동발기인으로 기재되었습니다.
려운형이 ‘조국광복회’ 창립선언에 공동발기인으로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는지는 불분명합니다. 김일성이 보낸 연락원이 려운형에게 가닿지 못한 것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창립 이후에는 당연히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회 창립선언문과 10대강령이 사방으로 퍼져나갔기 때문입니다.
‘조국광복회’ 창립 이후로 언론도 김일성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 부대의 움직임과 투쟁이 국내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된 것은 ‘조국광복회’ 창립 넉 달 뒤인 1936년 9월 어느 날이었으며 매체는 ‘매일신보’였습니다. ‘매일신보’는 ‘장백현에 150~160명으로 구성된 부대가 진출하였는데 부대의 수령은 김일성이라고 한다’라고 짧게 언급하였습니다. 이 보도를 시발로 국내의 출판물들은 김일성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조국광복회’의 공동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게 된 려운형은 그 뒤로 김일성과 각별한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조국광복회’ 창립 이듬해인 1937년 김일성이 보천보를 치자 그 다음 날로 려운형은 택시를 대절해서 보천보의 전투 현장을 돌아보고 자신이 운영하던 ‘조선중앙일보’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해방 직후에는 서울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준비위원회’를 결성하여 홍명희, 허헌과 함께 공동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려운형은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처자식을 김일성에게 의탁합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처자식을 맡길 수 있는 믿음은 보통 믿음이 아닙니다. 김일성은 려운형이 맡기고 간 자식들을 훌륭히 키우는 것으로 죽은 자와의 의리를 지킵니다.
려운형의 둘째 딸인 려연구는 1981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서기국 부국장 국장을 거처 1982년부터 최고인민위원회 제7기, 8기 대의원 및 상설회의 부의장을 역임하였고 1986년 조국전선 중앙위 의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87년 김일성 훈장을 받았고 1989년 범민족대회 부위원장 1990년 조평통 부위원장을 역임하였습니다. 1991년 여맹 중앙위 상무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에 관한 토론회’ 북측대표단장으로 서울에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고 몽양 려운형 선생을 추모하여 김일성’이란 추모 글귀가 담긴 화환을 들고 수유리에 묻혀 있는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화제가 되었습니다.
동생 려원구는 김책공업대학 교원, 교육성 부상, 최고인민위원회 제10,11,12기 대의원, 최고인민위원회 부의장, 1998년 범민련 북측본부 부의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의장 등을 역임하며 1999년 10월 ‘단군 및 고조선에 관한 학술토론회’ 참석,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 시 공항 영접, 환영만찬, 공식면담, 여성계인사 좌담회, 공항 환송 행사 등에 참석, 2001년 2월 천도교 청우당 창립 55주년 기념 보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2002년 8월 8.15민족통일대회 참석차 서울을 방문하여 아버지 려운형의 묘소에 헌화하였습니다.
막내 아들이자 일곱째인 려붕구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서기국장으로 일하였으며, 1990년 조국통일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조국해방 45돌을 기념하여 1990년 려운형에게 조국통일상을 수여하고 김일성 주석은 1991년 11월 려운형의 자녀들을 직접 만났으며, 1997년에는 려운형의 서거 50돌을 계기로 평양시추모회를 엄숙히 거행하였습니다.
평양의 신미리에 소재한 ‘애국렬사릉’에는 려운형의 두 딸 려연구와 려원구 그리고 아들 려붕구가 안장되어 있습니다. 려붕구의 아들이자 려운형의 손자인 려승혁도 조선의 하늘 아래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조국광복회’에서 맺어진 김일성과 려운형의 인연이 대를 이어 지속되는 것은 조선의 ‘통일전선노선’이 일시적인 것도, 전술적인 것도 아닌 대를 이어 지속되는 노선이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