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밀영’의 사령부 귀틀집. ‘백두산 1호 밀영’, ‘소백수골 밀영’으로도 불렸다. 백두산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소백수골에 위치하고 있다.
‘백두산 밀영’의 사령부 귀틀집. ‘백두산 1호 밀영’, ‘소백수골 밀영’으로도 불렸다. 백두산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소백수골에 위치하고 있다.

▲ 문: ‘백두산 밀영’과 그 의의는 무엇인가요?

▶ 답: ‘백두산 밀영’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 일대에 건설한 밀영들을 말합니다. ‘밀영’이란 ‘비밀 병영’의 줄임말로 적들에게 노출되지 않는 병영이라는 뜻입니다. ‘백두산 밀영’을 중심으로 ‘백두산 근거지’가 형성됩니다.

‘백두산 근거지’는 ‘반유격구’의 형태로 ‘백두산 밀영’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원호 활동’에 나서는 주민지대까지 포괄하여 일컫는 말입니다. ‘백두산 근거지’는 ‘백두산 밀영’을 포함하여 백두산 일대와 송화강 상류와 압록강 북쪽 연안에 전개되어 있는 서간도 여러 현들과 국내의 광활한 영역을 포괄하는 대 근거지입니다. ‘백두산 근거지’는 군대와 인민을 포괄하면서 군민일치가 실현된 장이며 항일무장투쟁이 전체 인민이 나서는 ‘인민전쟁’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백두산 밀영’은 백두산의 수림지대 여러 곳에 건설되었습니다. 백두산 자체가 조선과 중국 양 국에 걸쳐있기에 ‘백두산 밀영’도 조선과 중국 양쪽에 건설되었습니다. 사자봉 밀영, 곰산 밀영, 선오산 밀영, 간백산 밀영, 무두봉 밀영, 소연지봉 밀영 등은 조선쪽에 꾸려놓은 밀영들이었으며, 곰의골 밀영, 지양개 밀영, 이도강 밀영, 횡산 밀영, 리명수 밀영, 부후물 밀영, 청봉 밀영은 중국쪽에 꾸려놓은 밀영들이었습니다.

‘백두산 밀영’의 심장부는 ‘소백수골 밀영’이었습니다. ‘백두산 1호 밀영’이라고 불린 ‘소백수골 밀영’은 백두산에서 동남쪽으로 40리 떨어진 소백수골에 건설된 조선쪽 밀영이었습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말하는 ‘백두산 밀영’은 바로 이 ‘소백수골 밀영’입니다. ‘소백수골 밀영’의 사령부 귀틀집에서 훗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탄생하였으니 ‘백두산 1호 밀영’은 김 위원장의 고향집이기도 합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혁명의 근거지로 ‘백두산’을 지목하고 밀영을 건설한 이유는 우선, 백두산이 군사지형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일부당관 천부막개’한 천험의 요새였기 때문입니다. ‘일부당관 천부막개’란 한 사람이 지키고 있는 관문을 천 사람이 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백두산이야말로 조선인민혁명군이 의거해야 할 지상제일의 보루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혁명의 근거지로 ‘백두산’을 지목하고 밀영을 건설한 이유는 다음으로, 백두산이 조선민족에게 특유한 정신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은 조선민족에게 ‘조종의 산’으로 인정되는 조선의 상징이며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가 시작된 민족사의 발상지로 숭상 받고 있었습니다. 백두산에 대한 숭상은 곧 조선에 대한 숭상이었고 조국에 대한 사랑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광복거사’의 상징으로도 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혁명의 근거지로 ‘백두산’을 지목하고 밀영을 건설한 이유는 다음으로, 백두산 주변 압록강 연안의 서간도에 애국적인 조선인민들이 포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 주변 서간도에서 화전을 일구고 살아가던 부락들 그 어디에나 그전 날의 독립군 운동에 투신하던 사람들과 그들의 시중을 들어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비록 총을 내려놓았지만 어제 날의 ‘독립군’이었던 그들은 이제부터 ‘혁명군’들을 돕게 됩니다. 조선혁명에 있어 민족주의 운동자들과 공산주의 운동자들이 친 혈육의 유대 속에서 하나로 힘을 합치게 됩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혁명의 근거지로 ‘백두산’을 지목하고 밀영을 건설한 이유는 끝으로, 백두산의 지리적 위치가 조선혁명을 전개하기에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백두산은 조선의 대문이며 서간도와 국내와 북간도를 연결하는 삼각 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 거점입니다. 백두산을 타고 앉는다는 것은 곧 국내 인민들과 서간도의 애국지사들, 북간도의 공산주의자들을 하나의 유대로 이어준다는 것을 의미하였으며 국내 혁명운동과 서간도의 독립운동, 북간도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지도에서 일원화를 보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백두산 근거지’에 속하는 서간도를 동만에서와 같이 ‘완전유격구’로 꾸리지 않고 처음부터 ‘반유격구’로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동만의 ‘유격근거지’와 ‘백두산 근거지’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동만 시절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유격근거지’에 주둔하면서 근거지의 주민들과 함께 생활하였습니다. ‘백두산 근거지’에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철저하게 숨겨진 ‘백두산 밀영’에 주둔하면서 밀영 주변의 ‘반유격구’ 주민들의 ‘원호’를 받으며 생활하였습니다.

‘반유격구’란 ‘낮에는 적의 세상이지만 밤이면 우리의 세상이 되는 곳’을 말합니다. 서간도 일대의 십가장, 구장, 면장 자리는 모두 ‘조국광복회’ 회원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 군경들과 만주국 관헌들의 심부름을 해주는 척 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하고 혁명군에 보낼 후방물자 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반유격구’의 실상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리제순, 리주익, 리훈, 최병락, 정동철, 리용술, 렴인환 등이 있습니다.

렴인환 노인은 서간도 장백현 덕수골에서 의원으로 있었습니다. 덕수골은 강진건이 지도한 독립군의 본거지였으며, 김형직 선생도 팔도구 시절 여러 번 다녀갔던 고장입니다. 김형직 선생의 동생인 김형권 선생도 덕수골을 거점으로 ‘백산청년동맹’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 조직 출신인 부대원을 통해 덕수골을 요해한 후 김일성은 렴인환 노인의 집에 들려 면담을 한 후 그 집에서 감자보리밥을 대접받고 하루 밤을 잤습니다.

렴인환 노인은 김일성에게 밥과 잠자리를 제공한 ‘죄’로 훗날 이도강 경찰서에 끌려가 학살당합니다. 요컨대 서간도 인민들의 혁명군 원호는 목숨을 내걸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엄혹한 혁명군 원호의 길에 합류한 인민들은 압록강의 흐름만큼이나 도도하였습니다. 그들 중에는 중국인 지주도, 일본 주재소의 순사도, 일제가 세운 학교의 교사도 있었습니다. ‘조국광복회’라는 ‘반일민족통일전선체’가 아니고서는 설명될 수 없는 현상이었습니다. ‘계급과 계층을 떠나 전 민족이 대단결하자’라는 기치의 생활력이 인민들의 애국심으로 분출된 현상입니다.

덕수골을 처음 만든 강진건의 사촌 제수가 ‘렴보배 어머니’입니다. 렴인환은 렴보배 내외가 강진건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반일사상이 강하고 대가 바르다고 보증하였습니다. 렴보배와 그 남편 강인홍은 혁명군을 지성으로 원호하였고 김일성도 대덕수에 나갈 때 그 집을 들리곤 했습니다. 이 일로 대덕수 마을은 하루아침에 불바다가 되고 렴보배네는 신창동 장마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지만 거기서도 렴보배는 원호미를 찧기 위한 물방아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도강 경찰들은 장마자에도 달려들어 렴보배의 물방아를 부수고 마을 사람들을 경찰서로 압송하여 사흘 간 모질게 고문하였습니다. 반주검이 되어 집에 실려 돌아온 렴보배 부부는 김일성이 보내준 웅담을 약으로 써서 겨우 몸을 추스립니다. 김일성은 강인홍의 부탁으로 아들 강종근을 혁명군에 받아들이고 보살펴주었지만 아깝게도 전사하였습니다.

렴보배의 남편 강인홍도 고문으로 생긴 어혈의 후유증으로 피를 토하고 절명하였습니다. 렴보배는 남은 자식들을 키우다가 해방이 되자 솔가하여 조선 땅인 혜산으로 건너와 살았습니다. 조선혁명에 아들과 남편을 바친 렴보배는 조선에서 10여년을 살면서도 김일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량세봉 사령관의 부인은 자신이 알던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김일성에게 연락을 못한 것이었지만, 렴보배는 조선인민혁명군 사령관 ‘김일성’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상 ‘김일성’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1958년 량강도에 현지지도 차 내려갔다가 렴보배의 행처를 알게 되어 조우한 김일성에게 렴보배는 만나보고는 싶었지만 이렇게 다 찾아가면 장군이 정사를 바로 보지 못할 것 같아 참고 살았다고 말하며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렴보배 뿐만 아니라 장백현 사람들 중에 해방되고 내가 이런 사람이요 하고 얼굴을 내민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백두산 근거지’의 주민들이 ‘백두산 밀영’을 도운 ‘혁명군 원호’는 깨끗한 양심과 불타는 애국심에서 발로된 것으로 보상을 바라지 않는 참된 사랑이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 ‘백두산’은 혁명의 성산으로, ‘백두산 밀영’은 조선인민혁명군과 애국적인 인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조선혁명의 승리를 안아 온 ‘전체 조선인민의 운명 구원’의 상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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