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리제순’은 누구인가요?
▶ 답: 리제순은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장이었습니다. 백두산 근거지의 서남부인 중국쪽 지역에 속하는 장백현에서 조선인민혁명군 원호사업을 잘하였습니다. 발원지인 천지에서부터 남으로 내달리다 보천보와 혜산을 거쳐 머리를 서쪽으로 돌리고 유유히 흐르는 압록강의 중국쪽 대안에 자리잡고 있는 현이 장백현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은 작전상 편의를 위해 장백현을 상강구, 중강구, 하강구로 구분하였습니다. 장백현 경내에서 압록강을 상류, 중류, 하류로 구분하여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백두산 바로 밑인 25도구부터 19도구까지가 상강구, 18도구에서 16도구까지가 중강구, 15도구부터 7도구까지는 하강구에 속합니다. 상강구의 아랫자락인 20도구의 대안에 보천보가 있습니다.
리제순은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장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것 같습니다. 절반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리제순이라는 인물을 찾아낸 것이지만, 절반은 리제순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제 발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대목입니다.
리제순의 고향은 함경북도 남단에 위치한 길주입니다. 그는 빈농가에서 태어나 정규교육을 받지는 못했으나 독학으로 중등 정도의 지식을 소유한 성실한 노력가였습니다. 고향에서 소년회와 청년동맹에 망라되어 조직생활을 하다가 형이 체포되고 본인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자 1932년 초에 처가가 있는 갑산쪽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는 이미 그 일대에서 애국계몽운동을 벌리고 있던 박달 등의 선각자들과 함께 오풍동에서 비밀독서회를 조직하고 공산주의 사조를 연구하였습니다. 오풍동은 보천보 바로 밑의 마을이었습니다.
리제순은 공산주의 사조를 연구하면서도 현실에서 이를 구현할 똑똑한 투쟁방략을 찾지 못해 안타까워하다가 조선인민혁명군의 무장투쟁 소식에 귀를 번쩍 뜹니다. 그는 동지들에게 늘 농민조합 조직이 투쟁에서 성과를 거두려면 반드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는 통로를 개척해야 한다는 것과 혁명군의 지도가 없이는 국내투쟁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완강하게 주장하였습니다. 많은 동지들이 지지했지만 일부는 신출귀몰하는 혁명군의 줄을 어떻게 찾겠느냐고 시답지 않게 대했습니다.
1934년경에 조선인민혁명군이 장백지방으로 나온다는 풍문이 들리자 리제순은 어떻게든 혁명군에 줄을 댈 작심을 하고 압록강을 건너 장백지방으로 이주합니다. 겉보기에는 갈대꽃 같이 유약해보이나 속에는 바위가 들어차있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 인물이었습니다. 리제순은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진출하기 2년 전에 미리 백두산 근거지가 될 장백 땅에 진출하여 터를 닦고 있은 셈입니다.
리제순은 장백현 20도구에 있는 신흥촌에 정착하여 야학을 개설하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리제순은 신흥촌의 촌장이자 야학 선생으로 촌민들의 존경을 받게 됩니다. 신흥촌에서 보천보까지는 직선거리로 얼마 멀지 않습니다. 백두산을 바라볼 수 있는 화전농 마을인 신흥촌의 주민들은 함경남북도에서 이주해 온 영세농민들과 농조와 청년동맹을 비롯한 여러 갈래의 대중단체들에서 반일운동을 하다가 망명한 운동가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리제순은 ‘재만한인적색농조’ 운동과 연계를 가지고 야학을 통한 계몽운동과, 소작쟁의나 강제부역 반대와 같은 경제투쟁을 거쳐, 일제의 군용도로 건설을 반대하는 등의 반일정치투쟁도 전개하며 신흥촌에서 대중운동을 고양시켜나갔습니다.
1936년 9월의 그 아침에도 스물일곱의 젊은 촌장이자 야학 선생인 리제순은 20도구 등판에서 신흥촌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아침체조를 지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아침에 리제순은 학수고대하던 귀인과 운명적으로 조우합니다. 김일성이 파견한 ‘인재발굴단’인 조선인민혁명군 소부대의 책임자 리동학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김일성은 백두산지구에 나오자마자 밀영 건설을 다그치는 한편,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민지대들에 조국광복회 조직을 내오기 위한 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습니다. 리동학은 장백땅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조국광복회 조직 건설을 도울 수 있는 믿음직한 조력자를 찾아내라는 사령관의 명을 받고 장백땅을 한바퀴 빙 돌다가 ‘리제순’이라는 보석을 발견한 것입니다. 리동학은 시험 삼아 낸 식량마련의 과제를 넘치게 수행하고서 적극적으로 밀영까지 따라오겠다는 리제순을 데리고 와 김일성 앞에 내세웁니다.
김일성은 리제순과의 면담에서 지하활동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하고 참군을 희망하는 그에게 장백지구에서 ‘조국광복회’를 꾸릴 것을 제안합니다. 의아해하는 그에게 김일성은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역점을 찍어 설명하였습니다. 리제순이 자신의 역량부족을 우려하자 김일성은 필요한 지식은 우리가 주겠으니, 혁명할 생각을 가지고 실천투쟁 속에서 하나하나 착실히 배워가며 경험을 쌓으면 혁명가로 자라나게 된다고 격려합니다.
김일성은 리제순을 위한 단독강습을 조직하고 본인이 직접 ‘조선혁명의 노선과 성격, 전략전술’에 대한 강의를 진행하였습니다.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창립선언, 규약’에 대한 해설 강의와 ‘국제당사’ 강의는 리동백이 진행하였고, 그 외에도 여러 명의 유능한 강사들이 번갈아 출연해가며 강습을 진행하였습니다. 항일무장투쟁 전 기간 동안 한 사람만을 위한 강습 조직은 이때가 유일했습니다.
강습을 마치고 김일성은 리제순에게 장백현 상강구 지역을 맡기기로 합니다. 리제순은 김일성에게 ‘신임장’ 한 장을 써 줄 것을 요청합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의 대표로 파견한다는 보증과 함께 조국광복을 위한 공동투쟁을 사심 없이 토론해달라는 요청을 담고 있는 ‘신임장’ 끝에는 ‘경례 김일성’이라는 서명과 함께 도장까지 찍혀있었습니다. ‘신임장’을 받아들고 밀영을 떠나며 리제순은 ‘반년 안으로 상강구 지역을 우리 세상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하였고, 그 약속을 지킵니다.
리제순은 1936년 그 해 가을 김병철, 리주관, 리삼덕과 함께 조국광복회 신흥촌 지회를 조직합니다. 이 지회는 백두산 서남쪽 턱 밑에서 생겨난 최초의 조국광복회 조직이었습니다. 그는 신흥촌에 이어 주경동, 약수동, 대사동, 평강덕에서도 조국광복회 지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지회 산하에는 많은 분회를 두었으며 반일청년동맹과 부녀회, 아동단과 같은 외곽단체들을 꾸려 각계각층을 폭넓게 결속시켰습니다. 불과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리제순은 상강구 전 지역을 조밀한 지하조직망으로 뒤덮어놓았습니다.
백두산 밀영을 둘러싸고 있는 거의 모든 마을들에는 조국광복회 조직이 그물코처럼 촘촘히 들어섰습니다. 조국광복회 조직은 장백현 내의 선진적인 청년학생들과 지식인들, 종교인들 속에도 침투되었으며, 심지어 만주국의 관공서들과 경찰기관들, 정안군 부대들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조국광복회는 그 산하에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을 망라한 대중단체들을 두었습니다. 조국광복회 매개 지회는 생산유격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유사시 인민혁명군과 합세하여 거사를 치를 수 있는 강력한 밑천이 되었습니다.
장백지구에서의 조국광복회 조직들의 확산이 너무도 조속히 진행되어 1937년 초에 이르러서는 상강구 뿐만 아니라 장백현의 전 지역이 완전히 ‘우리 세상’, 즉 ‘반유격구’가 되었고, 리제순은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됩니다. 장백의 거의 모든 마을은 ‘우리 마을’,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우리 사람’이 되었으며, 장백의 거의 모든 촌락의 구장, 촌장의 직책들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였습니다.
면장 리주익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리주익은 면장의 보증 밑에 경찰기관이 발급하는 ‘거민증’과 ‘도강증’의 발급 편의를 돕는 한편, 리제순과 상의하여 백두산쪽으로 올라가는 마지막 산골인 24도구에 많은 ‘유령 민적’을 만들어내어 정치공작원들의 통행과 정착을 도왔습니다. 19도구 지양개의 구장 리훈은 안덕훈을 리제순에게 소개하여 그를 책임자로 하는 조국광복회 19도구 지회를 조직하는 한편, 지양개 뒤산에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가 자리잡고 있는 동안에는 장백현 시가지를 정찰하고 적정이 감지되면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는 방법으로 사령부에 전달하였습니다. 리주익이나 리훈 같은 애국적인 면장, 구장, 촌장들이 장백의 도처에 있었습니다.
리제순은 1937년 6월 4일 밤 10시 정각에 벌어진 보천보 전투에 앞서 현지 정찰의 임무를 다했으며, 보천보를 치기 직전에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행군 노정에서 주둔과 보급을 보장하였고, 보천보를 친 후에는 자체 판단으로 신흥촌 부녀회원들을 보천보에 보내 전투 결과를 알아내고 인민들의 여론을 수집하여 조선인민혁명군 사령부에 통보하였습니다. 보천보의 승전보에 려운형이 한달음에 현장으로 달려오고 김구가 집무실의 창을 열고 힘차게 고함을 질렀다는 사실과 보도를 통해 국내외 광범한 인민들에게 끼친 영향 등을 고려할 때 리제순의 공적을 가히 높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리제순은 보천보 전투에 대한 일제의 보복으로 자행된 ‘혜산사건’의 여파로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7년간의 옥살이를 합니다. 조국광복회 장백현 위원회의 지하조직망을 보위하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문 대가로 행해진 무수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1945년 초 아내 최채련이 막내딸을 데리고 면회를 옵니다. 면회에서 리제순은 막내딸에게 아버지는 이제 곧 집으로 간다라고 약속했지만 광복을 불과 다섯 달 앞둔 그 해 3월 10일 일제의 마지막 회유를 거부한 채 서른 여섯의 창창한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육체의 생을 마감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는 리제순에게 두 개의 생명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는 육체적 생명이고 하나는 사회정치적 생명입니다. 유한한 육체적 생명보다 영생하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더욱 소중히 여기는 주체사상의 신봉자들은 지금도 평양의 대성산 혁명열사릉에서 반신상의 겸허한 모습으로 후대들을 바라보고 있는 리제순을 기억하고, 그의 업적을 기리며, 그의 혁명정신을 이어갈 것을 다짐하면서 리제순의 영생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성산 혁명열사릉을 ‘영생의 언덕’이라 부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