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 ‘박달’은 누구인가요?
▶ 답: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진공작전인 ‘보천보 전투’를 국내에서 사전준비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전권대표’의 역할을 감당한 인물입니다.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쪽 신흥촌에 ‘리제순’이 있었다면, 조선쪽 ‘보천면’에는 ‘박달’이 있었습니다. ‘항일무장투쟁과 국내혁명운동의 일원화’를 위해 애타게 ‘견실한 혁명가’를 찾고 있던 김일성에게 리제순이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박달’입니다.
조선인민혁명군이 남호두 회의에서 결의된 조선혁명의 주체 노선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내에 강력한 정치적 역량을 꾸려야 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국내에 조국광복회망을 확대하고, 강력한 당조직망을 꾸리고, 준군사조직을 건설해야 했습니다. 박달은 조선인민혁명군의 ‘국내전권대표’로서 통일전선, 당, 군대 건설이라는 3중의 막중한 과제를 맡아 성과적으로 수행하였습니다.
박달은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태생으로 본명은 박문상입니다. 성격이 박달나무 같다고 주변 사람들이 ‘박달’이라 불러 그것이 이름이 되었습니다. 박달은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이 창건되기까지 공산주의 운동을 지속하려한 견실하고도 겸손한 공산주의자였습니다. ‘갑산공작위원회’라는 명칭은 ‘갑산’은 단체의 포괄 범위가 지역이라는 점을, ‘공작위원회’는 단체의 성격이 잠정적이라는 점을 드러낸 것입니다.
‘갑산공작위원회’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박달이 간절히 기다린 것은 조선공산당의 창건과 당 중앙의 출현, 그리고 그를 통한 ‘지도’였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를 국내에로 확장시키려는 김일성의 의도를 잘 알고 있는 리제순의 눈이 당 창건을 간절히 바라는 박달을 놓칠 리가 없었습니다. 리제순은 신흥촌으로 건너오기 전 박달과 함께 비밀독서회 활동을 하였기에 박달에 대한 깊은 파악이 있었습니다.
리제순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사령부로 찾아온 박달에게 김일성은 ‘동무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백두산으로 나온 후 우리를 찾아온 첫 국내대표’라고 치하합니다. 박달은 김일성에게 국내 형편과 갑산지방의 운동상황을 소개하면서 가장 큰 문제가 옳은 ‘영도’와 ‘노선’이 없는 것이며, 이로 인해 분파들이 난립하여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전합니다. 이어서 박달은 김일성에게 여러 가지 의문점에 대해 기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워낙 박달은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박달은 우선, ‘조선인민혁명군의 사명과 성격’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국내혁명가들 중에는 김일성 장군이 조선사람이기는 하지만 중국혁명을 하고 있고 김일성 부대도 조선사람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동북항일련군에 소속된 부대라는 말이 돌아가는데 이에 대해 해명을 부탁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동북항일련군은 글자 그대로 중국의 동북지방에서 활동하는 각종 항일유격부대들의 연합군이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지휘하는 조선인항일유격대도 망라되어 있는 일종의 국제적인 연합군이라고 설명하면서, 조선인민혁명군은 연합군의 간판을 가지고 중국혁명을 도와주면서도 조국해방을 근본사명으로 하는 민족군대로서의 면모를 완전히 갖추고 조선혁명에 주력하면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명합니다.
박달은 다음으로, ‘통일전선정책과 조국광복회’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본인은 공산주의자로서 민족해방을 위해 싸우기는 하지만 최종 목적은 어디까지나 공산사회건설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데, 조국광복회의 명칭이나 10대 강령을 보면 왠지 민족주의 냄새만 난다는 취지였습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혁명이란 공산주의자들 몇 사람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다, 각계각층의 광범한 군중이 동원되어야 승산이 있다, 조선독립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모든 역량을 다 반일민족통일전선에 묶어세워야 한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있어서 민족해방보다 더 큰 대의는 없다, 민족을 떠난 공산주의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또 그런 공산주의운동은 필요도 없다고 해설해주었습니다.
박달은 김일성의 해명에 흡족해하고 해설에 공감하면서 기존의 ‘갑산공작위원회’를 조국광복회의 산하조직으로 하되 그 명칭을 ‘조선민족해방동맹’으로 바꾸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공산주의자’를 자처하는 박달이 자기 조직 명칭에 ‘민족해방’ 네 글자를 박아 넣은 것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민족의 개념 속에는 노동자, 농민 뿐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창조적 노동을 사랑하고 해방된 조국의 미래를 사랑하는 각계각층 군중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바로 민족총동원의 기준이며 조국광복회 입회 기준이다, 자주독립사상에 기초한 민족의 총동원만이 조선의 운명을 칠성판에서 건져낼 수 있다’라는 김일성의 주장에 완전히 설복되었다고 보겠습니다.
김일성이 국내에 조국광복회 조직만이 아니라 공산당 조직도 내오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자 박달의 질문은 이어집니다. 조선에 공산당 조직을 내오는 것을 국제당이 승인하였는가, 각 나라 공산당은 다 국제공산당의 지부로서 그의 지도와 통제를 받게 되어있는데 국제당의 승인 없이 자기 당 조직을 내오는 것을 국제당이 승인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혁명이란 워낙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지 그 누구의 지령이나 승인을 받고 하는 일이 아니다, 맑스나 레닌도 누구의 승인을 받아서 당을 만든 것이 아니다, 국내에 우리 당 조직을 내오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조선공산주의자들의 자주권에 속하는 문제이다, 국내의 당 조직들은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에 소속되고 그 위원회의 지도를 받게 된다고 해설해줍니다.
김일성과 헤어진 박달은 갑산에 돌아와 갑산과 삼수 일대를 국내당조직건설을 위한 원종장으로 꾸리고 그것을 발판으로 하여 점차 타 군, 타 도로 활동선을 뻗쳐나갔습니다. 삼수와 갑산은 워낙 유배살이를 하던 고장으로 알려져 있는 척박한 고원지대로서 뜻있는 사회운동자들을 품어주는 조선 최대의 피신처였기에 국내당조직건설의 원종장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조선인민혁명군에서 파견 나온 정치지도원들도 박달의 선을 타고 노조, 농조를 비롯한 기성의 조직들과 개별적인 공산주의 그룹에 깊이 침투하면서 당조직건설사업과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늘이는 사업을 전개하였습니다.
박달은 국내당조직 성원들과 조국광복회 핵심 성원들로 ‘생산유격대’를 조직할데 대한 과업도 성과적으로 수행합니다. ‘생산유격대’는 평소에는 생산활동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는 총을 들고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준군사조직입니다. 박달은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자위단’을 이용합니다. ‘자위단’은 일제가 ‘향토보위’를 구실로 조직한 민간무력 단체입니다. 박달은 자위단 부단장의 직위를 이용하여 입단 연령에 해당하는 생산유격대 대원들을 자위단에 빠짐없이 입단시키고 지도적인 자리를 따내게 합니다. 박달은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조직된 ‘북선반일유격대’의 ‘정치위원’을 맡게 됩니다.
앞만 보고 달려가며 승승장구하던 박달에게 엄혹한 시련이 닥쳐옵니다. ‘혜산사건’의 여파로 조직이 파괴되고, 파괴된 조직을 복구하던 중에 일경에 체포당해 영어의 몸이 됩니다. 1938년 9월의 일입니다. ‘보천보 전투’로 악에 받친 일제 군경이 1년이 넘게 추적하며 사복경관, 자위단, 소방대까지 동원하고 마지막에는 변절자, 밀정까지 내세워 거둔 ‘성과’입니다.
일제 교형리들의 모진 고문에 척추는 부러지고 다리뼈는 부서졌지만 박달의 입만큼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김일성 사령부의 위치와 조선민족해방동맹원들의 명단을 확보하지 못한 일제는 증거가 부족하여 박달에게 내린 사형선고를 무기징역으로 바꾸었습니다. 박달은 불구의 몸으로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서 7년의 옥고를 치릅니다.
해방이 되어서야 옥문을 나선 박달은 운신을 못하여 서울에 주저앉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사무국장을 서울로 보내 박달을 평양으로 데려오게 합니다. 전날의 조국광복회 산하 조선민족해방동맹 책임자, 조선인민혁명군 당위원회 국내공작위원회 위원, 북선반일유격대 정치위원 박달은 남의 등에 업히어 김일성과 상봉합니다.
김일성은 자신의 집 옆에 박달의 집을 잡아주고 아침저녁으로 집무실을 오가는 길에 문병하였습니다. 전쟁 후에는 주을휴양소에 ‘박달각’을 따로 짓고 그를 치료하였습니다. 박달은 병상에서 아내 현금선의 도움을 받아가며 집필활동을 이어가서 수기 ‘조국은 생명보다 더 귀중하다’와 자서전적 장편소설 ‘서광’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독자들의 호평 속에 집필을 이어가던 박달은 1960년 4월 1일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습니다.
박달은 혁명동지 리제순과 함께 ‘영생의 언덕’인 평양 대성산 혁명열사릉에 반신상의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신앙세계에서 박달은 항일무장투쟁에서 ‘주체사상’의 요구를 구현하여, 기층 당조직부터 건설하고 당 중앙은 나중에 선포하는 ‘주체의 당 건설 노선’을 실천하고, 각계각층의 군중을 모두 묶어 민족해방 전선에 세우는 ‘반일통일전선노선’을 실천하고, 군사를 만사로 여기고 무장투쟁 준비에 힘을 넣는 ‘선군정치노선’을 실천한 ‘영생하는 혁명투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