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비뇽 교황청 ⓒWikipedia
▲ 아비뇽 교황청 ⓒWikipedia

■ 내적침묵기도 | Centering Prayer

■ 읽기 | Lectio | 읽기는 듣기입니다

☑ 구약 | 사 65:17-25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응송 | 사 12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 서신 | 살후 3:6-13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 10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  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11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12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13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 복음 | 눅 21:5-19

5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6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7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그러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8 이르시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라 하며 때가 가까이 왔다 하겠으나 그들을 따르지 말라 9 난리와 소요의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라 이 일이 먼저 있어야 하되 끝은 곧 되지 아니하리라 10 ○ 또 이르시되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11 곳곳에 큰 지진과 기근과 전염병이 있겠고 또 무서운 일과 하늘로부터 큰 징조들이 있으리라 12 이 모든 일 전에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13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14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15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16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17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18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 묵상 | meditatio

① 사 65:17, 18을 묵상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은 궁극적으로 성도에게 무엇을 가져다줍니까?
② 눅 21:19을 묵상하십시오.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며 인내할 때 성도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③ 살후 3:12, 13을 묵상하십시오. 종말을 살아가는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 기도 | Oratio | 5-10분

■ 묵상 나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는 시선

기독교는 예수님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바울에 의해 탄생한 종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유다인이자 로마 시민이었던 사울이 예수를 추종하는 자들을 체포하기 위해 살기등등하여 다메섹으로 가던 여정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사건은(행 9:1-9) 이후 로마군대의 영내에서(행 22:1-15), 그리고 아그립바 왕 앞에서 행한(행 26:12-18) 두 번의 변명을 통해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바울이 회심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사도가 된 사실은 하나님의 계시(啓示 revelation)에 기대어 신(新) 중심적 사고(思考)를 하던 헤브라이즘(Hebraism)이 인간의 합리적 이성과 지혜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헬레니즘(Hellenism)과 만난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로마식 교육을 받고 자란 바울은 자신의 탁월한 논리로 아무런 시스템도 갖추지 않은 채 예수를 따르던 무리에 직제를 만들고 규율을 제정해 체계화 하게 됩니다. 그 결과는 묘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체계화 되는 전기를 마련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 안에 권력 서열이 생기는 단초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한 번 종교권력을 움켜쥔 자는 여덟 가지 악덕 가운데 하나인 탐욕과 결별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건축가 승효상이 수도원 순례 끝에 집필한 ‘묵상’이라는 책에 ‘아비뇽 교황청’을 방문한 후의 소회를 정리한 글이 있습니다. 아비뇽 교황청이 탄생한 역사적 배경에는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레오 3세가 내린 성상 파괴령을 로마 교황과 그레고리오 2세가 거부하면서, 로마 가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으로 결별합니다. 교황과 황제의 충돌, 교권과 왕권의 충돌, 이 두 권력의 충돌은 표면적으로는 이단논쟁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두 세력의 권력욕이 작동했습니다.

교권과 왕권이 아슬아슬하게 대립하던 1303년,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명을 받은 군대가 로마에서 떨어진 별장에 있던 교황을 습격해 폐위시키고, 1309년 아비뇽에 교황청을 마련해 자신들이 세운 프랑스인 추기경 클레멘스 5세를 거주하게 합니다. 그런 중에 이탈리아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를 침략하는 바람에 교황은 로마로 돌아가지 못한 채 계속 아비뇽에 체제하게 되었고, 이런 상태는 일곱 명의 교황이 바뀌는 1377년까지 지속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건이 진행되면서 아비뇽은 엄청난 도시 발전을 이룹니다. 68년 동안이나 교황청의 도시였으니 그곳은 어느덧 유럽의 정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그에 걸맞게 도시와 건축물이 융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 아비뇽 교황청은 높이 50미터에 연면적만 4,500평인 거대한 성채였습니다. 교황이 떠난 후 폐허가 된 그곳은 19세기에 감옥으로 사용되고, 훗날에는 군 시설로도 쓰이는 과정을 겪습니다. 아비뇽 교황청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설명 끝에 승효상은 이렇게 자신의 소회를 적어놓았습니다.

나는 이곳에서 종교적 신심이나 영성이 발현된 곳을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그저 권력과 암투의 밀실로만 보여 실망을 거듭한 것이다. 옥상에는 총포를 쏠 수 있는 장치들이 있었으니, 이 건축은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종교의 시설이라 하기에는 민망하기 이를 데 없는 집이었다.(1)

하나님을 빙자해 사람이 권력을 누리고, 성(聖)과 속(俗)이 뒤엉켜버린 현장에서 느끼는 당연한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역사의 뒷담화로 남아버린 교회의 흔적은 인간이 쌓아가는 아성(牙城)이 얼마나 속절없고 허무한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반면에 오늘 성서일과는 우리에게 인간이 쌓은 허무하고 불완전한 아성과 비교되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완전한 세상을 보여줍니다. 먼저 구약성경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장엄한 어조로 그 세상을 소개합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 65:17

이 말씀은 1차적으로 바벨론 포로 귀환 이후 새로이 회복될 공동체에 관한 이상(理想)인데,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는 새로운 사회와 질서가 얼마나 완벽한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바벨론에서 당했던 괴로운 기억들을 더 이상 마음에 두지 않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말씀은 더 이상 고통과 슬픔이 없는 메시아 통치시대로 우리를 이끌고 갑니다. 계 21:1에 이와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구약과 신약이 같은 개념의 단어로 말하는 이유는 구약도 신약도 묵시문학을 중요시하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은 유대인들의 고유한 세계이해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지금의 세상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통해 온다는 사상이 묵시문학인데, 사실 이런 사상은 까닭 없이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상이 싹트게 된 것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역사 속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정은 이사야 시대에도 있었고, 요한계시록이 쓰이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그 사정이라는 게 뭘까요? 현실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현실이 고통스러울수록 사람들은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이 성취될 장소로 염두에 두고 있었던 곳은 예루살렘입니다.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 사 65:18, 19

우리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바라보시는 예루살렘의 모습은, 하나님이 처음에 창조하시고 좋아하셨던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만연한 세상입니다. 몇 날 살지 못한 어린이와, 수명(壽命)을 채우지 못한 노인이 죽어나갑니다(사 65:20). 자기 손으로 지은 집에 자기가 살지 못하고, 제 손으로 가꾼 포도를 자기가 먹지 못합니다(사 65:21). 굶주림과 약탈이 다반사이고(사 65:22), 노동이 헛수고로 돌아갑니다(사 65:23). 바벨론에 끌려가 고통겪을 때 그들은 지긋지긋한 포로생활에서 벗어만 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고국이라고 돌아와서 보니 엉겅퀴로 뒤덮인 땅을 기경해야 했고, 무너진 성을 세우기 위해 땀 흘려야 했고, 적대적인 시선과 도발에 맞서야 했습니다. 희망과 현실이 너무 달랐습니다. 이렇게 죽는 자도 산 자도 모두 힘겨울 때, 흑암과 공허와 혼돈 가운데 빛을 비추셨던 창조주 하나님을 잊으면 삶은 비극이 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 없이 몸부림을 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없이 만들어 가는 역사는 인간의 기만 위에 세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실제 인간의 기만 위에 세워진 예루살렘, 그것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히브리공동체가 맞닥뜨린 조국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새 창조를 약속하시는 겁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사 65:17) 그리고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아갈 삶을 이렇게 예언합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 사 65:20-23

사실 이런 예언은 그들이 처음 들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은 이미 제2 이사야가 꾸준히 예언해 온 내용입니다(사 45:7, 12, 18, 48:6). 특히 분사형을 사용해 하나님의 새 창조는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해 왔는데, 제2 이사야가 태초의 창조와 새로운 창조를 연결하고 있다면, 오늘 말씀에서 제3 이사야는 새로운 창조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사야 65장에서 하나님의 새 창조가 완결될 것임을 선언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이 말씀을 읽는 독자들은 이사야가 전하는 새로운 사회의 희망이 그다지 마음에 울림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다르고, 하나님의 지식과 나의 지식이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바로 그런 이유로 우리는 계 21:1에서 터져나온 사도 요한의 선언을 중요하게 보게 되는 겁니다. BC 5세기에 하나님께서 제3 이사야의 메시지를 통해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겠다“라고 하셨는데, 그로부터 600년이 지난 AD 90년, 사도 요한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다”고 선언합니다. 바로 이 시선이 2025년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시선입니다. 장 자크 루소의 ‘에밀’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는 지식은 가득하지만 지각이 없다. 지각이 없으므로 분별도 있을리 없다. 아이는 노예이거나 폭군처럼 자라난다. 그 상태의 무능과 오만, 악덕을 바라보면서 사람들은 인간의 비참함을 토로한다.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2)

왜 이런 진단이 내려지게 될 걸까요? 이전 세대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아이들이 분별 없이 자라고, 혹은 노예처럼, 혹은 폭군처럼 자란다는 진단을 보며 마음이 아팠습니다. 혹시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지식은 가르치면서도 지각은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거슬러 우리 사회가 만들어낸 세속의 질서 안에서 강자로 살아남기를 강요하며 혹은 노예로, 혹은 상대적인 폭군으로 길러내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서 “요즘 아이들은…” 이라며 혀를 차는 것은 아닐까요? 그러면 요즘 어른의 상태는 어떤가요? 비르질 게오르규 신부가 ‘25시에서 영원으로’에서 이런 진단을 합니다. 

손에 나침반을 든 나의 동시대인들은 내가 오른쪽이나 서쪽으로, 혹은 왼쪽이나 동쪽으로, 혹은 앞이나 뒤로 향하지 않음을 지극히 과학적으로 확인했다. 그래서 그들은 과학적으로 내가 방향을 잡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내가 닥치는 대로 걸어간다고 말이다. 마치 바람처럼.

나침반은 한 번도 내가 가야 할 곳을 정확하게 지시해 주지 않았다. … 왜 그들은 하늘이 아니라 그저 동서남북만 가리키는 나침반 같은 도구들을 사용한단 말인가? 그들의 도구는 하늘을 가리키지 않기 때문에, 그로부터 그들은 하늘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다. 그들에겐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바로 그 하늘이야말로 내가 향하고 있는 방향이다.(3)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나침판은 여러분의 시선을 동서남북 만이 아닌, 하늘을 향해 정확하게 이끌어 줍니까? 하늘을 보여주지 않고 동서남북만 가리키는 나침판은 비록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우리를 안내해준다 해도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늘을 보게 하는 나침판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책입니다. 우리는 성경책이 가르쳐주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전형적인 묵시문학 방식으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사 65:25

지금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이상입니다. 이 이상이 지금껏 나침판이라는 도구로만 세상을 보아온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깨고 들어와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에 우리 시선도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제가 받아보는 뉴스레터 ‘어니스트플라워’의 에디터인 쏘피님이 ‘시선은 사랑의 또 다른 언어’라며, 자신의 공간인 ‘사일런트바’에 아내와 함께 방문한 중년남성이 꽃을 고르는 아내를 바라보던 시선을 소개했습니다. 그 시선이 곧 사랑이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가 누리고자 한 것은 꽃이 아닌 '아내의 행복'임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4)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사랑하면, 우리의 시선은 그곳을 향하게 됩니다. 약자와 강자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세상, 우리가 그곳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곳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과연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 것일까요? 약자와 강자가 평등하고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런 이상이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그는 아직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제3 이사야의 이상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와 소가 함께 공존하며,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는 성산 예루살렘은 안타깝게도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불평등하고, 세상 권력자와 종교 권력자가 여전히 약한 자를 억누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의 선포는 무의미한 것이며, 이상은 이상일 뿐이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속의 문화를 도구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요?

중요한 것은 이상이 당장 내 눈앞에서 이루어지느냐의 여부보다 나의 이상이 하나님의 뜻과 맞닿아 있느냐 하는 것, 그리고 그 이상이 낙심하지 않고 내 가슴이 불타고 있느냐 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내가 먼저 새롭게 창조 된 사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주신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그 이상의 동역자로서 삶을 다하는 것입니다. 어둡고 부패한 세상도 창조주 하나님의 시선과 손길이 닿으면 전혀 새로운 사회가 창조될 수 있습니다.

그 사회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사회이며, 가장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회입니다. 땀 흘려 노력한 만큼 거둘 수 있고, 그 열매를 즐길 수 있는 사회입니다. 정직이 사회의 덕목이 되고, 성실이 결실로 거두어지는 사회입니다. 하나님은 정직과 성실로 살아가는 사람의 파트너이시고, 하나님은 그런 믿음의 사람을 통해 당신의 의를 이루십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렇게 살지 못했다 해도, 말씀과 성령에 의해 새롭게 창조된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쉽지 않는 길로 초대된 사람들입니다. 형제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내 욕망을 절제할 때 새 하늘과 새 땅은 분명히 무르익어갑니다. 오늘 복음서는 이사야의 예언이 있은 후 5백여 년 지난 어느 날,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나눈 대화의 한 토막을 소개합니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을 가리켜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 눅 21:5, 6

기원전 20년경에 헤롯 대왕이 건축한 헤롯 성전은 헤롯 자신이 봉헌한 금으로 세공한 커다란 포도나무와 이집트의 톨레미(Ptolemy) 대왕이 보낸 거대한 입상, 그리고 아그립바 2세가 봉헌한 금 사슬 등등 갖가지 보물로 장식된 건축물로서 어느덧 유대인들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현관 기둥들과 회랑들은 모두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었고, 지붕과 문들은 황금색으로 치장되어 있어서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복음서에서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돌과 헌물로 꾸민 것을 말했다”는 것은, 그 화려함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포로귀환 직후 예루살렘의 현실과,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본 신약시대의 예루살렘의 현실은 극단적으로 서로 달랐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본 예루살렘의 현실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날 수를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어린이가 있고,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고독가운데 죽어가고, 자기가 건축한 집에서 자기가 살지 못하고, 자기가 심은 농작물을 자기가 먹지 못하는 그런 세상을 이사야는 보았습니다.

반면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본 예루살렘 성전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금으로 세공한 화려한 포도나무와 갖가지 보물로 장식된 건축물들, 흰 대리석으로 만든 성전 기둥들과 회랑들, 황금색으로 치장된 지붕과 문들이 웅장함과 화려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보았던 비참한 현실은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이상을 보게 만들어 주었고, 예수님과 어떤 사람들이 보았던 화려한 성전은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는’ 종말의 엄숙성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너희 보는 이것들이 날이 이르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 눅 21:6

그러면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약속, 그리고 그 이상을 부여잡고 평생을 믿음으로 산 우리의 삶만 남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슴에 품은 자로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새 창조의 도구로 산 삶이 남습니다. ‘지금’, ‘여기’가 중요한 이유는 저 세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대한 집착 때문에 저 세상을 망치면 안 됩니다. 오늘 복음서의 결론으로 주님은 이렇게 당부합니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눅 21:19). 그리고 서신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간절하게 당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 살후 3:13

지난 주부터 본격적으로 신축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짓는 성전이 단지 ‘꾸민 건축물’이거나 어느만큼 세월이 흐른 뒤 ‘돌 하나로 돌 위에 남지 않는 건축’이 되지 않게 하려면 건축의 목적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교회를 설계한 승효상 건축가는 ‘영성이 실종된 현대사회의 공간’이라는 어느 참여 건축가의 설명을 소개하며, ‘바른 건축가는 건축으로 삶을 바꾸는 자’라고, ‘바른 건축가의 삶은 예수의 삶과 다름이 없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묵상 31, 101쪽).

우리가 짓는 교회가 ‘영성이 실종된 현대사회의 공간’이 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건축을 통해 내면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세워지고, 시간과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사도 요한이 가졌던 바로 그 시선과 고백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그 믿음의 시선과 고백 위에 굳건하게 서서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고, 참된 믿음으로 완성해갈 하늘의 성소를 꿈꾸며 주와 함께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내로 생명을 건질 것입니다.

 

■ 관상 | Contemplatio

관상은 ‘하나님을 보는 기도’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입니다.

■ 실천 | Exercitatio

① 사라지고 무너질 것들에 시선을 두고 있지 않은가?
②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가?

미주

(1) 승효상, 「묵상」 (돌베개), 308-313쪽.
(2) 장 자크 루소/이환 옮김, 「에밀」 (돋을새김), 29쪽.
(3) 비르질 게오르규/그레고리우스 옮김, 「25시에서 영원으로」 (정교회출판사), 20-21쪽.
(4) 어니스트플라워 ‘에디터 소피의 편지’ 221번째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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