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Marten van Valckenborch, ⟪Parable of the wicked husbandmen⟫ (1580-1590) ⓒWikimediaCommons
▲ Marten van Valckenborch, ⟪Parable of the wicked husbandmen⟫ (1580-1590) ⓒWikimediaCommons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나요? 평안은 삶의 환경이 아니라, 성도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 하나님을 신뢰하는지에 따라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한 주간 외부의 상황에 끊임없이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면, 먼저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기보다 나의 믿음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성도는 먼저 평안의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의 마음으로 다시 선택하고, 행하고, 삶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지난주 말씀을 통해 우리의 신앙생활이 ‘겉모습만 신앙인일 뿐, 겉모습만 그럴듯할 뿐, 어쩌면 이 교회에서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나의 결핍된 욕망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감옥에 가두고 그럴듯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에 관해 질문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무엇을 붙잡으려 하는지, 누구 또는 무엇을 주인으로 여기고 있는지, 삶의 방향과 결정을 무엇이 결정하고 있는지.’가 담겨 있는, 우리 존재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렇기에 나의 뜻, 나의 욕망, 나의 지식, 나의 경험대로가 아니라 고통스럽더라도 또는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어도 하나님이 삶의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내는 성도가 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한 주간 어떤 삶을 사셨습니까? 이러한 고민을 해보셨습니까? 이러한 고민 끝에 무언가를 내려놓아 보셨습니까?

많은 이들이 자기 성찰을 하지 않기도 하고, 못하기도 합니다. 사실 다른 이들이 혹은 AI가 대신 성찰해 주기를 바라며 더 이상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자유롭지는 않습니다. 자신만의 성찰이 없다 보니 하나님을 위해, 타인을 위해서라고 하며 무언가를 한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그 근원에는 자기 자신만이 존재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자기 자신만이 존재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기에 내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의 결정이 불편하고 불만이고 틀렸다고 말합니다. 자기 기준과 고집대로 일이 진행되어야 하고, 무엇이든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말 하나님을 위해, 타인을 위해,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그 방식과 기준과 결정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될 수 없고, 내 목적, 방식, 기준이 중심이 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만이 중심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해 이 이야기를 계속 진행해 나가고자 합니다. 오늘의 설교 제목은 “나의 왕국을 세우자!”입니다. 나의 왕국을 세우자! 이것은 매력적인 구호이자, 우리 모두의 마음 깊은 곳에 숨겨진 솔직한 욕망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더 빨리 성공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영향력을 키워 ‘나만의 성’을 견고하게 쌓을 것인가. 세상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속삭입니다. “너의 왕국을 세워라.” 그래서 누구도 너를 무시하지 못하게 하라.

많은 이들이 ‘내 집 마련’이라는 꿈을 위해 평생을 바치고, 내 자식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도 합니다. 내 노후, 내 건강, 내 명예 이 모든 것을 지키고 확장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고,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믿음을 도구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나의 왕국을 세우자!”라는 구호가 오늘 함께 읽은 두 본문을 통해 얼마나 참혹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와 마가복음의 말씀은 바로 이 ‘나의 왕국’을 세우려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이들의 결말을 통해 경고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쫓고 있는 것이 과연 하나님 나라인지, 아니면 무너져 내릴 나만의 모래성, 나의 왕국인지 정직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열왕기하 17장은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기업으로 받았고, 하나님의 율례와 규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행복한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여겼지만, 오늘 본문의 기록처럼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최후를 보여줍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국력이 약해서, 혹은 군사 전략이 실패해서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7절과 8절 말씀입니다. “7 이렇게 된 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어 이집트 왕 바로의 손아귀로부터 구원하여 주신 주 하나님을 거역하여, 죄를 짓고 다른 신들을 섬겼기 때문이며, 8 또 주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의 면전에서 내쫓으신 이방 나라들의 관습과,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잘못한 것을, 그들이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른 주변 나라들을 보았습니다. 강대국 앗시리아를 보고, 주변의 풍요로운 이방 나라들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화려했습니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고, 풍요로운 문화를 누렸습니다. 그들의 신전은 웅장했고, 그들의 왕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에 ‘우리도 그들처럼 되고 싶다!’라는 욕망이 자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도 저들처럼 되자. 하나님의 방식 말고, 세상의 방식대로 우리만의 강한 왕국을 세워보자.”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다른 나라들과 차별되는 독특한 정체성인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버리고 세상 나라들, 특히 강대국의 방식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바알을 섬기면 농사가 잘된다니 바알을 들여오고, 아세라를 섬기면 쾌락을 준다니 아세라를 들여왔습니다.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착취해서 부를 쌓는 이방 나라의 경제 체제까지 들여왔습니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이유는 하나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삶의 방식은 철저히 ‘이웃 나라의 불의한 제도와 풍습’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대신, 세상의 힘을 빌려 ‘나의 왕국’을 세우려 했던 시도. 그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본문 6절입니다. “드디어 호세아 제 구년에 앗시리아 왕은 사마리아를 점령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 강 가에 있는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읍에 이주시켰다.” 그들이 그토록 부러워하고 따라 하려 했던 앗시리아에 의해, 멸망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방식을 쫓아 나의 왕국을 세우려 했으나, 결국 그 세상에 의해 내가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을 포기하고, 세상 나라들처럼 되고자 했던 이들의 역설적인 결말입니다. 이러한 결말은 오늘 우리 삶의 결말이 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성공이던, 승리던, 평안이던 무언가를 누리려 하지만 결국 그 다른 것 때문에 삶이 피폐해집니다.

이 비극적인 역사는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마가복음 12장은 ‘포도원 농부 비유’입니다. 어떤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었습니다. 울타리를 치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었습니다. 모든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뒤 농부들에게 세를 주고 타국으로 떠났습니다. 여기서 농부들의 신분은 명백합니다. 그들은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관리자)’입니다.

포도원은 이들의 것이 아닙니다. 농부들은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고, 때가 되면 그 소출의 일부를 주인에게 돌려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농부들의 마음에 이상한 생각이 들어옵니다. 주인이 눈에 보이지 않자, 착각하기 시작합니다. “이 포도원을 내가 가져야겠다.”

농부들의 마음속에 ‘나의 왕국을 세우자!’라는 욕망이 꿈틀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때가 되어 주인이 세를 받으러 종을 보냅니다. 이 종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 포도원의 주인은 당신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이미 욕망에 눈이 먼 농부들에게 종의 방문은 불안하고, 불쾌한 일이었습니다. 나의 왕국, 나의 소유권을 침해하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그래서 농부들은 종을 잡아서 때리고, 능욕하고, 죽여서 내쫓았습니다.

마침내 주인은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까지 보냅니다. “그들이 내 아들이야 존중하겠지.” 그러나 농부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7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농부들은 서로 말하였다. ‘이 사람은 상속자다. 그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유산은 우리의 차지가 될 것이다.’”

몰라서 죽인 게 아닙니다. 아들인 줄 알았습니다. 상속자인 줄 알았습니다. 알았기 때문에 죽였습니다. 상속자만 없어지면, 이 포도원은 영원히 ‘나의 왕국’이 될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나만의 왕국을 세우려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타인을 해치고, 하나님을 외면하는 삶으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와 우리의 모습 속에도 이와 같은 모습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주여, 주여”하고 부르짖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아니면 소유, 성공, 맘몬의 논리입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인 정의, 평화, 사랑, 나눔보다는 세상이 말하는 성공, 경쟁, 독점, 성장의 논리를 더 신뢰하지 않습니까? 

“이제는 교회도 세상의 좋은 것은 가져와야 하지 않습니까?”라는 핑계로, 세상의 불의한 경영 방식을 교회 안으로, 내 삶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방 사람의 풍속, 규례, 우상’을 따르는 것입니다.

더 두려워해야 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와 종들을 죽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종들은 누구입니까? 우리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이키기 위해 보낸 선지자, 종들은 누구입니까? 

보호받지 못하고 일터에서 죽어가는 노동자들, 차별과 혐오 속에 울부짖는 소수자들, 이주민들, 인간의 끝없는 탐욕으로 신음하며 병들어가는 피조세계 이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에게 보내진 하나님의 선지자요 종들입니다.

이들의 존재, 이들의 고통스러운 외침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의 삶은 잘못되었다. 하나님께로 삶을 돌이키라. ‘당신 삶의 목적, 가치, 기준은 무엇인가?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이 정말 삶의 중심인가?’를 묻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불편합니다. 이들이 존재함으로, 나의 불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나의 믿음 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만의 왕국을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 탄로가 납니다. 나의 평안한 왕국, 나의 안락한 노후, 나의 풍요로운 소비 생활을 위해 달려가야 하는데, 이들이 멈칫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감고, 귀를 막습니다. 이들의 존재를 지워버립니다. 

마가복음의 농부들이 종들을 때리고 죽여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린 것처럼, 우리도 사회적 약자인 이웃과 병든 피조 세계를 우리 삶의 울타리 밖으로 던져버리고 있습니다. 오로지 ‘나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주인은 누구인가?” 예수님 당시,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서 ‘주’라는 호칭은 오직 한 사람, 로마 황제에게만 붙일 수 있는 절대적인 칭호였습니다. 황제가 곧 신이었고, 황제가 빵을 주며, 황제가 평화를 준다 믿었습니다. 이것이 ‘팍스 로마나(로마의 평화)’였습니다.

이런 시대에,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수가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한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예식을 치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고백은 ‘로마 황제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 로마의 황제가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돈과 권력이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 예수님만이 나의 참된 왕이시다!’라는 목숨을 건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반역이었습니다. 체제 전복적인 사상이었습니다.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 로마의 방식, 힘이 곧 정의인 세상의 왕국을 거부하고, 섬김과 희생으로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를 살겠다는 혁명적인 결단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있습니까? 돈 아닙니까? 부동산 아닙니까? 학벌과 지위 아닙니까? 나 자신의 가치, 지식, 경험 아닙니까?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하나님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돈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세상의 평판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진정한 신앙은 “나의 왕국을 세우자!”라는 세상의 구호에 맞서, “아니오! 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겠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손가락질할지라도, 비록 내 소유가 줄어들고 내 삶이 불안해 보일지라도, 불의한 이익을 거절하고 정직한 손해를 선택하는 것. 약자를 밟고 올라서는 대신 약자의 손을 잡고 함께 걷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왕국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성도의 삶입니다.

열왕기하의 북이스라엘은 이방 나라를 흉내 내다 멸망했고, 마가복음의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이고 파멸을 맞았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주인의 자리를 탐내며 ‘자신만의 왕국’을 고집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저와 여러분을 이 시대의 포도원으로 보내십니다. “가서 내 뜻을 전하여라. 이 포도원은 내 것이라고, 서로 사랑하고 정의를 행하라고 전하여라.”

우리가 세상의 방식, ‘나의 왕국’을 내려놓고 기꺼이 주님의 종으로 살아갈 때, 세상이 알 수 없는 놀라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마가복음 12장 10-11절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집을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랍게 보인다.’”

세상은 예수님을 죽여서 포도원 밖으로 던져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온 세상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실패인 십자가가 승리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나의 왕국을 무너뜨리십시오. 실패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 폐허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십시오. 체제에 순응하며 편안하게 사는 길을 거부하고, 하나님, 예수님만을 유일한 왕으로 모시는 거룩한 저항을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세상의 불의한 농부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신실한 종이 되어 삶의 자리로 나아갈 때, 이 땅 가운데 진정한 생명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줄로 믿습니다. 이 거룩하고도 위험한 제자의 길에, 저와 여러분이 함께 서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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