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지난 11일 오전 10시 다닐로브스키 호텔 강당에서 러시아정교회 관계자들이 주최하는 정의와 평화를 위한 세미나에서 발표한 서보혁 교수(서울대학교 평화통일연구원)의 발제문입니다. |
서보혁(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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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보혁 박사(서울대학교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화해통일위원회 위원)ⓒ에큐메니안 | ||
현재 동아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는 안보협력협의체는 정부간 협의체로 상하이협력기구 (Shanghai Cooperation Organisation: SCO), 6자회담, 그리고 아세안지역포럼(ASEAN Regional Forum: ARF)을 꼽을 수 있고, 아태안보협력이사회(Council for Security Cooperation in the Asia Pacific: CSCAP)와 같은 1.5 트랙도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 안보협력체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안보협력체들은 대부분 구속력이 낮고 합의 수준도 제한적이다. 오히려 동북아 국가들은 안보든 무역이든 양자관계를 선호하고 있다.
동아시아는 헬싱키 프로세스와 같이 오랜 시간 공동 안보 및 이익을 발전시켜나가며 공동규범을 축적해온 경험이 적다. 여기에는 식민통치의 경험에서 오는 피해의식과 냉전의 영향이 존재한다. 다만, 동북아 국가들이 다자간 안보대화에 참여함으로써 대화와 협력의 습관을 쌓아갈 가능성은 열려 있고, 최근에는 그럴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특히, 6자회담과 ARF는 앞으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자회담은 비록 지금은 중단되어 있지만 북핵을 넘어 역내 안보협력의 길을 열어놓고 있다는 점에서, ARF는 광범위한 의제를 바탕으로 점진적인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CSCE의 초기 경험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이보다 동남아국가연합(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 ASEAN)은 2015년 12월 31일 경제협력체를 넘어 지역공동체를 출범시킬 예정이다. 동북아도 역내 안보협력을 본격 전개하기 위해서는 역내 국가간 공감대와 함께 미중관계가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부상과 미국의 아시아 ‘재균형(rebalancing)’ 전략으로 동아시아의 안보 환경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구상은 조지 W. 부시 2기 행정부에 들어와 바뀌기 시작했다. 당시 부시 행정부의 동아시아전략은 반테러, 북핵 문제를 계기로 주변국들을 하나로 묶어내 미국 패권을 지속하려는 전략이었다. 당시 미중 협조체제는 무난히 가동되어 갔다. 그러나 반테러전이 종료되고 북한의 능숙한 역내 질서 교란, 그리고 미-중간 무역 불균형이 커져가면서 미국과 중국의 상호 불신도 높아졌다. 물론 북핵문제와 미국의 경제 활성화를 위해 양국이 협조할 필요성은 여전히 남아있지만, 그것이 지속될 지는 불확실하다.
부상하는 중국과 쇠퇴하는 미국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 불신은 비록 단기적으로는 충돌가능성이 낮지만 역내 불안을 가중시킬 가능성이 크다. 미국이 일본, 한국, 필리핀, 싱가포르에서 호주, 뉴질랜드로, 그리고 태국, 인도로 중국 포위망을 확대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미국의 동맹국들이 분쟁을 겪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중일 갈등에 그런 성격이 가미되어 있다. 그리고 동북아가 세계 최대의 군비경쟁 지역이라는 점에서도 동북아 안보 환경은 긍정적이지 않다.
동시에 동북아는 경제적 역동성이 가장 높은 지역으로서 인적, 물적 교류의 증대와 그 지속을 위해 협력의 필요성이 높다. 중국의 지속적 경제성장이 주도하고 있는 역내 경제적 상호의존 심화가 그 동력이다. 여기에 각종 인간안보 사안들도 역내 협력의 필요성을 높여주고 있다. 황사, 조류독감, 원자력 안전, 해상 안전, 난민 등이 동북아에 발생할 수 있는 일들로서, 이들은 인간안보의 대상이다. 동북아시아는 행동규범 차원에서도 중첩적인 상황에 직면해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은 민족독립, 경제발전 등 근대화 과제를 완결하지 못한 채 인권의 세계화, 생태 위기 등 새로운 탈근대의 환경에 직면해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역내 국가간 해결되지 못한 역사, 영토 등 전근대적 문제들이 공존하고 있다.
미-중간 패권 경쟁은 한반도의 안정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반도는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 분단체제, 냉전의 유산 등 전략적으로 민감한 곳이다. 미국과 중국의 상호견제, 특히 미국의 중국 봉쇄정책이 한반도와 그 인근에서 구체화되고 있다는 점이 심각한 현상이다. 한국의 경우 휴전선 일대 주한미군이 서해 평택으로 재배치되고 해외 군사작전에 가담하는 등 ‘전략적 유연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 한국은 강정 해군기지건설, 전투기 갱신, 공중급유기 도입, 미국의 미사일방어망(Missile Defense system: MD)참여, 그리고 미국·일본과의 해상합동훈련 등은 중국을 겨냥한 군사협력에 해당한다. 북한 유사시를 겨냥한 지속적인 한미 합동군사훈련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4월 북한의 3차 핵실험을 전후로 한 미국의 핵무력 시위와 이후 괌에 핵폭격기를 배치하기로 결정한 것은 북한문제를 넘어 중국의 팽창을 겨냥한 사전 포석으로 볼 수 있다.
동북아 안보 질서의 불확실성과 경제적 상호의존은 서로 다른 방향이다. 그러나 그 둘은 역내 다자안보협력체 형성의 필요성으로 수렴된다. 한반도 역시 미중 패권경쟁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평화통일을 준비하고 역내 안정에 기여하려면 동맹 위주의 양자관계에서 다자안보협력으로의 전환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동북아 안보협력체 구상을 위해 헬싱키 프로세스로부터 어떤 시사점을 도출해내려고 할 때, 과거 유럽과 오늘날 동북아의 유사점과 차이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오늘날 동북아는 냉전기의 세력균형이 아니라 세력전이(power transition)가 나타나는 불안정 지대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내 안정을 도모하는 정책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주권을 존중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고수하고, 역내 인간안보 증진 노력을 통해 협력의 관행을 축적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의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연루되지 않고 균형적인 협력관계를 증진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맥락에서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에 의존하는 현재와 같은 모순적 쌍무관계는 수정할 필요가 있다.
둘째, 이익 분포 역시 냉전기 유럽보다 오늘날 동북아시아가 더 복합해 보인다. 헬싱키 협정(Helsinki Final Act)에 포함된 내용은 크게 국가주권 담론 하에 보편규범 존중, 혹은 핵문제를제외한 포괄적 안보협력이다. 그렇지만 오늘날 동북아에는 ⅰ)국가주권 담론이 보편규범보다 영향력이 크고, ⅱ)헬싱키 협정 채택시 이미 정리된 영토 및 역사문제가 갈등 요인이 되고 있고, ⅲ)북핵문제가 안보관심사로 도사리고 있다. 그런 동북아 현실은 근대 국제관계의 주요 요소들의 확립과 지역 공동정체성 없이는 역내 안보협력이 어려움을 말해준다. 그런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동북아 국가들은 역내 갈등 예방과 상호 불신 해소에 역점을 두는 낮은 수준의 다자협력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접근 방법을 헬싱키 프로세스로부터 배워보자. 우선, 북한과 중국의 인권 양상이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에서 북한인권문제만 부각되는 것은, 인권문제조차도 강대국 권력정치의 대상임을 말해준다. 헬싱키 협정때 작용했던 세력균형이 동북아에서 붕괴된 상황에서 북한의 인권문제는 1:99의 구도에서 진행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은 국제사회의 인권개선 압력을 체제위협으로 간주하고 있다.
국가주권이 우세하고 역내 불신이 상존하는 동북아에서 특정 국가의 인권문제 제기가 역내 안보협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CSCE 프레임과 달리 동북아 다자안보협력 의제로 인권문제를 잠정 보류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물론 그런 현실주의적 접근을 시도할 때조차도 보편규범을 역내에 구현한다는 방향성을 유지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할 것이다. 헬싱키 프로세스에서도 두 진영간 인권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인적 접촉과 인권을 분리해 접근하였고, 문화, 예술, 종교 등 각 분야에서의 교류를 추진하면서 포괄 협력을 도모해나간 경험을 빌려 올 수있다. 또 1.5트랙을 활용한 공동연수 및 기술협력 프로그램도 실용적인 접근이 될 수 있다. 북한에 정치적 민감성을 완화시켜 주고 인권대화에 나설 수 있는 조건 조성 방법은 유럽연합의 대북정책 사례에서 배울 수 있다.
셋째, 역내 다자협력을 본격화하려면 역내 질서의 현상유지에 대한 상호 인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서독의 브란트 내각이 동방정책 천명 이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폴란드에 오더-나이쎄(Order-Neisser) 강을 국경선으로 인정한 것이 CSCE의 출범을 촉진하였다. 남북의경우도 1991년 말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시 영토경계선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특히, 서해 북방한계선(Northern Limit Line: NLL)을 염두에 두고 양측은 이렇게 합의하였다.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1953년 7월 27일자 군사정권에 관한 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하여 온 구역으로 한다.” 절묘한 타협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이문제가 정치적 논쟁의 소재로 이용되고 있는데, 이는 남북간 신뢰와 역내 안정을 해치는 처사이다.
넷째, 역내 질서의 현상유지가 다자안보협력의 필요조건이라면, 역내 국가간 우호협력관계의 확립은 그 충분조건의 하나이다. 동북아에서는 한일, 중일간 역사적 화해, 북한과 미국, 일본의 관계정상화가 당면 과제이다. 서독의 동방정책이 동독과의 관계 정상화, 동독의 대서방 관계개선, 그리고 CSCE 출범 촉진 등 연쇄적 파급효과를 가져왔다. 냉전 해체기 동북아에서도 한국의 ‘북방정책’은 한소·한중 수교, 남북대화, 북일대화, 북미접촉을 불러일으켰고, 1991년 남북이 유엔에 공동 가입하였다. 그러나 결국 남북간 교차승인은 완성되지 못하였다. 거시적으로 이런 구도가 수립되지 않는 한 동북아에서 다자안보협력체 구상은 현실화되기 어려울 것이다.
다섯째, 헬싱키 프로세스에서 군비통제 논의는 점진적이지만 비교적 원활하게 진행되었다. 당시 민감했던 중부유럽 재래식무기 균형감축(Mutual and Balanced Force Reductions:MBFR) 협상과 전략무기제한협상(Strategic Arms Limitation Talks: SALT)이 별도의 논의틀에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CSCE에서는 군사적 신뢰구축을 중심으로 한 군비통제 논의가 진척되었다. 그런데 동북아에서는 군비경쟁과 함께 한반도 비핵화 문제가 역내 군비통제를 힘들게 하고 있다. 3개 핵 강대국이 역내에 있고 그 중 미국은 북한과 적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서 한반도 비핵화 문제와 씨름해야 한다. 소위 ‘북핵문제’는 ⅰ)분단 이후 한반도 냉전 질서, ⅱ)냉전 해체 이후 북한의 높아진 안보위협, ⅲ)북한의 신국가발전 전략 등 복합적 배경을 갖고 있는 문제이다. 대화를 양보로 간주하거나, 북한의 행동을 먼저 요구하는 것, 그리고 무시로 일관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관련 당사국들은 한편으로 핵 위기를 관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동북아 비핵지대화, 한반도 평화체제의 틀 속에서 포괄 협상에 나서야 한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헬싱키 프로세스에 얻을 최대의 교훈은 남북관계 발전과 동북아 안보협력을 병행 추진하는 것이다. “서독 동방정책의 전도사” 에곤 바(Egon Bahr)는 동방정책이 동독에 대한 정책일 뿐 아니라 대소련, 대동구권 정책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그리고 비정부기구가 적극 관여해 헬싱키 프로세스가 국가간 안보문제만이 아니라 인권, 인도주의, 교류 등 인적 문제(Human Dimension)도 의제에 포함시키고 그 이행에 적극 참여한 점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남북관계 발전과 지역 안보협력의 병행 추진의 틀에서 볼 때, 북한 압박용 혹은 중국 포위용 국제 연대에 한국이 참여하는 일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이는 북한, 중국의 의심과 반발을 사 한국의 “한반도 평화통일과 동북아 평화협력의 선순환” 구상을 어렵게 할 것이다. 사실, 남북 대립 상황에서 지역안보협력에 기여한다는 것은 넌센스이다. 서독의 대동독정책과 유럽안보협력 틀 사이의 깊은 상관관계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베를린에서 출발해 모스크바를 거쳐 한반도를 향해가는 평화열차는 유럽의 화해협력 기운도 함께 싣고 가고 있습니다. 냉전 대결 시기에 냉전 이후를 예비한 공동안보, 포괄안보 노력은 유럽통합과 독일통일을 함께 가져왔습니다. 우리는 그 경험에서 동아시아 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경청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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