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었을 때 나는 시골에서 산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시골은 불결하고, 먼지투성이고, 벌레들이 득실거리고, 지린내가 나는 등, 사람 살기에 불편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해 생계가 막막해지면 생각해 볼까, 내가 살 곳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런 생각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한 것은 독일에서 생활하면서이다.

▲ 독일의 농장(Bauernhof)을 배경으로 필자의 부인이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

나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직장생활(목회) 10여년을 했는데, 직장인에게 연간 법적 휴가가 약 3주 내지 4주가 주어진다. 이 기간 동안 우리가족은 주로 텐트를 가지고 독일 이웃국의 해변에서 야영을 하거나 아니면 농가(Bauernhof)에서 민박을 하며 지냈다. 1년 만에 찾아온 3주간의 휴가는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복음’(기쁜 소식) 그 자체였다. 쳇바퀴 도는 것과 같은 일상에서 벗어난 해방감, 도심의 아파트와는 판이한 시골의 맛은 나에게 신선한 것들이었다. 농촌이 제공하는 먹거리들(야채, 계란, 우유, 빵, 치즈 등)은 보기에 투박하지만 아침식탁을 즐겁게 했다. 특히 프랑스 해변에서 먹던 바게트 맛은 정말 잊을 수 없다. 가끔씩 열리는 동네축제(경마대회, 공연, 맥주파티 등)는 호기심을 자극하며 여흥을 돋구었다. 독일의 농가는 대농(大農)을 했는데, 기계로 다져놓은 방대한 경작지는 규모도 크지만 너무 깔끔하게 정돈되어 나를 놀라게 했다. 정감이 가는 농촌풍경, 농촌생활이었다.

▲ 여름휴가때 사용한 텐드,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딩굴고 있다.

더욱 나에게 농촌생활이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독일의 두 가정의 사례이다. 한 가정은 독일의 목사 가정인데, 이들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함부르크 자택에서 약 120km 떨어진 덴마크 국경에 가까이 위치한 해변, 동해(Ostsee)지역의 농가를 구입했다. 시간 나는 대로 그들은 주로 폐자재를 활용하여 목수처럼 일하면서 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겉보기에 보잘 것 없고 초라한 개조농가이다. 이곳에 우리 가정이 초대되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들의 취미는 자전거와 카누였다. 두 부부는 이 지역이 제공하는 산천과 바다, 언덕 등 자연환경을 즐기며 퇴임 후의 생활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참 멋있다는 공감을 가졌다.

▲ 프랑스 브리타니엔 지방의 사블도아 모래사장. 아이들이 광활한 백사장 위에서 연을 날리며 놀고 있다.

다른 한 가정의 사례는 한국인 간호사와 결혼한 독일인 의사 가정이다. 이 가정은 프랑스 서남부 브리타니엔 지방의 해안지역의 조그마한 마을, 사블도아(“은빛 모래”라는 뜻)에 2층의 단독주택을 갖고 있었다. 이 지역은 프랑스의 유명한 관광 및 피서 휴양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쌍 말로, 쌍 미셀 등이 근접한 해변이다. 이 주택은 수영복 차림으로 백사장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독일가정은 여름 휴가철에 우리 가정을 초청하여 함께 지내곤 했다. 이 집은 두 가정이 함께 지내기에 충분한 크기의 집이었고, 해변의 넓고 완만한 경사의 백사장은 어린 아이들이 맘 놓고 뛰놀 수 있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이 집에 있는 요트(Segelboot)와 윈드서핑을 즐길 수 있었다.

나의 눈길을 끄는 것은 이 집에 대한 소유와 운영에 관한 부분이다. 이 집은 아버지 소유였는데, 의사였던 그가 돌아가신 이후 소유주를 모친을 포함해서 자녀 5명이 공동으로 하고, 공동 운영 관리하고 있었다. 운영비용의 분담은 물론 주택사용 기간도 공평하게 배분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여름휴가철 기간 동안의 시간조정이다. 여기에도 규칙이 있었는데 6월말에서 8월말까지의 여름 휴가철 기간에 3가정이 4주간 머물게 되는데, 순번에 따라 돌아가며 휴가철 이용 가정을 정했다. 휴가철 이용에서 특이한 것은 휴가의 마지막 1주간은 반드시 다음 입주자 가정과 함께 보내야 하는 것이다. 첫 입주자 가정이 4주간 휴가 왔다면, 3주간은 자신의 가정만 단독으로 보낼 수 있지만 4주째는 반드시 2번째 입주자 가정과 함께 공동생활을 하여야 한다. 두 번째 샌드위치 입주자는 첫 주간은 전임 입주자 가정과 보내고 4째 주간은 세 번째 입주자와 함께 보내야 하기 때문에 자기 가정만의 휴가 기간은 2주밖에 안 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 여름휴가 중 산책하고 있는 필자

이 독일 가정은 주택 운영과 관리를 위해 1년에 한 두 차례 온 가족이 모임을 갖는다. 그리고 휴가철에는 두 형제 가족들이 함께 먹고 자고 지내면서 사귐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므로 프랑스 해변의 주택은 이들 가정들에게는 가족들 간의 접촉지점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독일 전역으로 흩어져 살고 있는 모친과 형제들이 어떻게 하면 서로 만날 수 있고, 함께 사귀며 지낼 수 있는지를 궁리해낸 지혜이기도 하다. 아마도 부친께서 살아 계셨다면 여름 휴가철이 되면 자식 가운데 3가정을 교대해 가며 이 집에 초청하여 자녀들과 손자들을 보며 함께 지내시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는 이런 꿈을 꾸며 자신의 소득 가운데 일정부분을 특별히 떼어 여기에 투자하신 셈이다.

고흥의 우리 집은 앞서 언급한 독일인 목사의 시골집 보다는 훨씬 양호하다. 그러나 후자에 언급한 독일인 의사의 집에는 비교가 안 되는 초라한 집이다. 그러나 고흥 우리 집의 역할은 두 독일인 가정의 몫을 일정 정도 하는 것 같다. 고흥 집은 해변과 자연을 벗 삼아 나와 내 부인의 휴식 공간이 되며 취미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 되고 있으니 그렇다. 그리고 이 집은 우리 가족 간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 이미 나의 형과 나의 아들과 애인이 함께 이곳을 들렀다 갔다. 조카의 경우 또한 그의 부인과 함께 이곳을 다녀갔다. 처갓집의 식구들도 매 한가지이다. 독일인 의사 가정처럼 방문객에게 매력적인 위치에 그 만한 안락함이 제공되지 못 하고 있다는 것이 약점이 되지만 그러나 ‘만남의 장소’의 역할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으로 자위해 본다. 더 바라고 싶은 것은 이 시골집이 ‘만남의 장소’를 벗어나 며칠씩 먹고 자며 함께 살면서 쉬었다 가는 ‘쉼터’의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그려본다.

2014년 9월 29일
고흥반도 해변의 시골집에서

박명철(전 연세대 교수)  mcpark@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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