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통일 칼럼 연재
장준하(張俊河)와 그의 일단 성지임천(聖地臨泉)에 이르다 2<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3.19 15:51

박정희(朴正熙)와의 그 대척점(對蹠點)으로서의 임천(臨泉)

장준하의 박정희와의 대척의 운명은 1944년 7월 7일 장준하가 그 유명한 일본정예군을 길러내는 쓰까다(塚田)를 탈출할 때부터 결정된 것이었지만 그 운명의 구체성은 장준하가 쓰까다를 탈출, 실로 생사를 넘나드는 역경과 험로를 뚫고 <한국광복군훈련반>(韓國光復軍訓練班)을 찾아들면서부터 드러난다.

임천을 향하는 탈출 도상에서 중국유격대원에게 발각되어 다행히 20여 일 간의 호의 속에 그 유격대에 머물던 중 이미 말한 대로 참 사람 한치륭 장군을 만날 수 있었고, 드디어 7월 28일 최종 목적지인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자리잡고 있는 중경(重慶)을 향해 다시 출발, 40주야의 고투 끝에 중간 기착지인 임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임천에 이르렀다는 것만으로도 장준하는 벅찬 가슴을 진정하기 어려웠다.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탈출 동료 중 김준엽(金俊燁)은 중국국부군의 유격단에 머물던 중 한 중국군 간부로부터 중경이 아닌 임천에도 중국의 <중앙군관학교>(사관학교-필자주)가 있고, 그 군관학교엔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설치되어 있다는 정보를 얻어들어 함께한 탈출동료들에게 이미 일러준 터였다.

대한민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 생각만 해도 전신을 감격의 전율이 겹겹으로 휘감는다. 아, 대한민국! 전신을 바쳐 지켜야할 조국, 전신을 바쳐 이뤄내야 할 자주·독립!
꼭 중경이어야만 하는가? 반드시 정부청사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역사를 배울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주변부여도, 소외지역이어도 ‘우리’를 살 수 있다면 좋다. 적어도 임천은 맘 놓고, 맘 먹고 <삼천리 내 조국>을 노래할 수 있는 곳이었으니...

임천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 설치의 배경

임천에 한국광복군 간부 훈련반이 설치되게 된 것은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사의 상해의거가 그 계기가 되어서였다. 윤봉길 의사의 그 사즉생(死卽生)의 의거는 일군에 징집돼 중국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한국인 청년들의 엄청난 조국애를 불러일으켰고, 여타의 재중국청장년들에게도 ‘생의 변화’를 경험케 했다. 요원의 불길처럼 자주와 자존, 해방과 독립의 의지가 번져 나갔다. 중국주둔 한인일군들의 탈출이 줄을 이었고, 광복군의 지원이 부단히 이어져갔다.

임시정부 지도자들로서는 이렇게 모여드는 젊은 힘들을 자체적으로 정규군으로 훈련해 낸다는 것이 결코 여의치 않아 드디어 임시정부의 광복군 당무자들이 중국정부에 한국광복군의 훈련을 요청하게 되었고, 중국정부는 이를 흔쾌히 수락, 중국군관학교 낙양(洛陽)분교에 한인반(韓人班)을 설치해 이것이 중국군관학교 한인반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어서 1940년 9월에는 중경에서 <대한민국 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중국정부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여러 중요지역에 광복군 모집처를 설치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2년 김학규(金學奎) 장군에 의해 임천 중국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도 한광반을 설치하게 되었다. 국가가 설립 운영하는 군사관 정규교육대의 특설반으로 편입되어 아직도 계급은 군 체계상 중국군 계급이 부여되고 있었지만 어엿하고 확실한 대한민국 국군장교가 될 수 있게 된 것이다.

9월 10일 임천에 도착, 당일 한광반에 편입되어 11월 20일까지 훈련기간 꼭 70일, 교육기간이 4개월이었지만 한광반 당국은 7월 7일 쓰까다 탈출 이후 한광반에 입교하기까지 2개월 여 사선을 넘은 행군을 크게 인정, 준사관의 계급을 수여한 것이다. 중국군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이 공히 인정하는 사관이었다. 졸업장과 계급 수여는 중국군관학교장 장중정(場中正·장개석)이었다.

박정희(朴正熙)와 대척점에 선 장준하(張俊河)

장준하가 천신만고를 뚫고 넘어 기어이 대한민국 광복군 사관이 되어 나올 때, 박정희는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新京: 현재의 長春) 입학(1940), 1942년 3월 동교 예과를 수석으로 마치면서 만주국황제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이때 졸업생 대표로 재학생의 송사에 저 유명한 ‘일본천왕에게 충성맹세’와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는 서원을 한다. 다까끼 마사오, 그가 스스로 선정한 일본명이었다. 박정희는 비운의 국가운명에 밀려 일본인이 되어 간 사람이 아니었다. 신비스러우리만큼 <힘>을 신봉하던 박정희였다.

   
 
힘을 숭상하는 힘의 교도인 박정희는 힘써 일본인이 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후에 그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민선정부(民選政府)를 전복시킨 것도, 경제 제일주의를 주창한 것도 다 힘의 도그마의 산물이었다. 만주사관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만주군에 근무하면서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었다. 은인자중 오직 일본사관으로서 자신을 키우기에 심혈을 쏟았다. 그의 유일한 꿈은 일본육사를 가는 것이었다. 정말 힘을 지닐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일본의 육사에 진학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살도, 뼈도, 피도 일본의 것이어야 한다고... 박정희는 일본말, 일본노래, 일본인 어투를 끊임없이 배우고 익혔다. 그에게는 친구도 없고 놀이도 없었다. 오직 일본인이 되는 것이었다.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사람으로서도 그래서는 안 될 일, 안 될 짓을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그는 드디어 민주사관학교 졸업 6개월 만에 일본사관학교 3년 편입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당시 만주출신이나 한인출신의 경우 일본사관학교의 진학은 정말 놀라운 특전이었다. 일본사관으로서 박정희의 교내생활과 군국주의 사상의 투철성은 타의 추종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신뢰할 정도로 일군사관으로서 빈틈없는 자세, 자격을 갖추어 가고 있다는 사실에 내심 춤을 추고 있었다. 이런 그를 육사 당국이 놓칠리 없었다. 한 전 사관생도 모임에서 당시 육사교장이었던 나구모쥬이치(南雲忠一)는 빽빽이 운집한 생도들에게 전례가 없는 한 학생의 실명을 거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물론 박정희 곧 다까끼 마사오(高木正雄)에 대해서였다.
“다까끼 생도 말이다. 다까끼 생도는 태생은 조선이라 하지만 천황폐하에게 바치는 충성심으로 한다면 그는 보통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생도다.”
1944년 4월 박정희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일본육사를 졸업한다. 졸업성적 전체3등, 조선인으로 육사 이래 일본교육총감의 유일한 수상자가 된다.

   
 
같은 해 1944년, 장준하는 일군에 징집되어 평양주둔 제42부대에서 훈련을 마치고 중국의 강소성(江蘇省) 서주(西州) 일군보충대로 배속되어 있으면서 호시탐탐 그 탈출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곳 만주 일군보충대의 일지휘관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사건이 한인출신병사들의 탈출이었다. 드디어 고위지휘관 회의에서 격한 단안을 내렸다. 여기 일군 보충대에 근무하는 모든 한인출신병들을 전원 쓰까다 부대로 이동시킨다는 것이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쓰까다(塚田)부대란 모든 일군들 특히 한인출신병들을 일본군으로 교화시키기 위해 일본의 정예 교관장교들을 특선하여 창설한 특별부대로 소위 일본의 역사학자까지도 차출하여 교관으로 근무케 하는 부대였다.

장준하를 비롯 160명의 한인병들이 그 쓰까다로 이동된 것이다. 군기는 필설로는 그 설명이 불가능할 만큼 엄한 곳이었다. 1944년 5월 30일, 박정희가 일본천왕을 위해 죽겠다면서 일본육군 소위로 임관된 두 달 후의 일이다. 장준하는 탈출불가의 일군부대로 소문난 쓰까다의 전출에 오히려 쾌재를 불렀다. 엄한 곳, 엄한 사람, 엄한 소리에 오히려 “헛”이 더욱 틈탈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일본도를 차는 꿈을 이루기 위해 살 닳고 뼈 녹는 가혹(苛酷)의 싸움을 싸워간 것 같이 장준하 또한 그랬다. 뜻을 버리느니 차라리 죽음을 받겠다. 그것이 장준하 정신이었다. “옳은 것을 지켜내기 위해 옳지 않은 것과 대적한다.” 그것이 장준하 정신이었다. 장준하가 쓰까다부대 기마중대병으로 근무하면서 그 맡은 기마관리에 가히 애정을 쏟았던 것은 바로 그래서였다. 장준하에게는 그 일본군의 군마가 일본군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것은 그때, 그 역사 자체의 명(命)이었으니까!

분분초초, 장준하는 그 당하는 시간, 당하는 일을 주시는 시간, 주시는 일로 받아 그 일의 수행에 진액을 쏟아간다. 일본인과 조선일이, 네 일과 내 일이 장준하에게는 따로 없었다. 일본의 상관들에게 장준하는 “참 훌륭한 청년”으로 회자(膾炙)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한편 함께 탈출할 동료들을 찾기에 초미의 관심을 기울였고 탈출로, 탈출시, 탈출방법의 모색에 목숨을 걸었다. “목숨을 걸고...”, 이것이 장준하의 박정희와 다른점이었다. 박정희의 5.16을 말하는 이들 중 “박정희는 목숨을 걸고 혁명을 했다.”하는 이들이 더러 있다. 잘못된 말 중에 이보다 더한 경우는 없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자행했다. 칼, 총, 탱크를 동원해서 였다.

장준하의 경우는 자신이 ‘죽자는 것’이었지만 박정희의 경우, 박정희의 총칼은 ‘죽인다’는 것이었다.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을 빌린다면 박정희는 지옥갈 놈, 장준하는 천당갈 사람이었다. 장준하는 세 명의 동료를 규합하여 기어이 그 일본의 정예부대 쓰까다의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기어이 성공(?)했다. 그 무서운 쓰까다 탈출에 말이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윤인중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윤인중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0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