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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하여 1<문대골 칼럼>
문대골 목사 | 승인 2015.04.03 16:46

구도(求道)의 길에 선 순례자(巡禮者)

   
 
중국중앙군(中國中央軍) 준위, 장준하(張俊河)! 그의 가슴엔 장준하와 그의 일단 53명의 중국중앙군사학교 임천분교 한광반(韓光班·한국 광복군 간부 훈련반)의 70일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그 감격의 글 모음집 <등불> 1, 2호 두 권이 깊이 안겨져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장준하 개인의 일기가 아니었다. 그 일본 군국주의의 철권(鐵拳)에도 기어이 버텨내는 조선혼(朝鮮魂)의 노래였다. 아니, 비인간, 비인도, 비도덕을 탄(歎)하는 <맨 사람>, 한 민중의 절규였다.

한광반의 김학규(金學奎) 대장은 장준하, 김준엽, 김영록, 홍석훈, 윤경빈, 선우진 같은 총명하면서도 정의롭고 신실한 사관들을 휘하에 두기 위해 임정이나 광복군사령부의 파쟁과 비행을 노골적으로 비방하며, ‘우리야말로 참 광복전력을 이룰 수 있는 애국자들이요, 용사들’이라면서 임천 한광반에 남아주기를 사정하기도 하고, 상당한 압력을 가하기도 했지만 장준하는 그럴 수가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엄연히 버티고 있는 땅, 삼천만 민족의 의지가 뭉쳐있는 땅, 언젠가는 고난 받는 세계인민의 수족이 되어 모든 민족들로 스스로의 삶, 자주하는 사람을 살아내도록 세계사에 기여할 거기 중경, 그 <약속의 땅>을 향한 행진을 멈출 수는 없다. 장준하는 단호히 대장 김학규의 요청을 거부했다. 그리고 함께 군간부 교육을 수료한 대원들에게도 자신의 의지를 선언했다. 그것은 협상이 아니었다. 장준하에게 중경은 이스라엘에게 있어 <가나안>과 한 치도 다름없는 <약속의 땅>이었으니까.
“나는 중경에 가야한다. 가다가 죽어도 가야한다.”장준하는 이때의 자신을 <순례자>(巡禮者)라 했고, 중경행의 길을 <구도의 길>이라 했다.(돌베개 p.192)

대장 김학규는 장준하와 그의 사람들의 중경행을 막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그의 중경행을 아예 돕기로 작정한다. 임천분교(중국중앙군사학교)의 지원까지 요청해 의류와 식량, 필수품 등을 공급받게 햇다. 임천을 떠나는 날은 임천분교와 한광반이 베푸는 융숭한 환송을 받게까지 되었다. <약속의 땅>을 향하는 장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 길은 일망무애(一望無涯), 형극의 광야였지만 말이다.

장준하에게 주어진 그 계약(契約)의 삶

   
 
1944년 11월 30일, 중국중앙군군관학교 임천분교 연병장에는 중경을 향해 거룩한 보무를 내딛어야 하는 한광반 훈련 수료생들과 그의 일단들이 거룩한 가슴으로 모여 섰다. 중국군관학교의 분교장과 한광반 대장이 번갈아 지휘단에 올라 중경을 향해 떠나는 한국출신 사관들을 격려하는 발언이 있었고, 이어 한국광복군을 대표하는 장준하는 두 지휘관을 향해 격(激)한 거수경례를 드리고 있었다. 그는 두 지휘관을 향해 꼭 같이 1분, 2분을 넘어 3분에 가깝도록 거수경례의 손을 내리지 않는 것이었다. 함께 한 동료들이 의아해 하는데도 그는 거수경례 자세 그대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휘관들에 대한 존경이나 감사의 념보다도 이제 <약속의 땅> 중경(重慶)을 향한다는 감격적인 사실에 그의 의식도, 이성도 함몰해버렸던 것일까? 동료 중 어떤 이가 아주 조심스럽게 “장동지, 거수경례할 때 좀 이상하지 않았어?”하고 물었지만 오히려 장준하는 “왜”하며 되묻는 것이었다. 묻는 동료가 더 이상 “아니”하고 말이 없자 장준하 역시 더 다른 말이 없었다.

중경을 향해 가는 장준하 일단의 여정엔 임천으로부터 일주일 정도의 행진거리에 남양(河南省南陽)이 있고, 거기서 다시 20일이 조금 넘는 곳에 노하구(老河口)라는 15, 16개의 초등학교와 수 개의 중학교를 가진 지방도시가 있다. 이 노하구를 지나면 중경행을 가로막는 절대지난준령(絶對至難峻嶺) 파촉령(巴蜀嶺)이 있다. 그 죽음의 준령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형극의 숲을 뚫어야 하는가 하면, 글자 그대로 지평선을 방불케 하는 풀 한포기 찾아볼 수 없는 광야가 펼쳐진다. 눈보라가 불어치는 섣달길, 대오를 이루고 있는 일단 또한 위기엔 내달릴 수 있는 청년만이 아니었다. 여섯 명의 여인들과 업고 걸어야 하는 세 명의 어린애가 있었다. 일본 점령지역에서 장사를 하던 세 쌍의 부부와 그들에게 딸린 불과 한달 전쯤 그 지역마을의 한 보장(保長; 里長-필자 주)에 의해서 한광반에 인계된 나머지 3명의 여인 중 2명은 공작원, 다른 1명은 한광반원 중 한 사람의 큰딸이었다.

이 같은 총 53명의 일단이 임천을 떠나 남양을 거쳐 노하구(老河口)에 이르기까지 마치 하늘은 심술이라도 부리려는 듯 험로만 연이어 지고 있는데, 그 장준하의 일단이 여기 파촉령을 바로 뒤에 둔 노하구에 도착한 것은 섣달그믐, 임천을 떠난 지 꼭 한 달이 되는 12월 30일이었다. 그 행군기간 동안 장준하는 선발대장과 취사(炊事)부장 직을 맡아 일행의 보행을 통한 이동을 시종일관 시중해야 했다.

이의 전쟁, 옴의 극성

가장 힘든 일이 위생에 관한 것이었다. 바꿔 입을 여복이 갖추어 있지도 않았고, 밤이면 쉴 곳을 찾는다 해도 덮을 것이 없고, 행군하는 도중 얻어 들게 되는 숙소라는 것은 대개는 외양간, 마구간의 한 구석이거나 밀짚을 쌓은 창고의 짚단 위거나 였다. 정말 재수가 좋은 어떤 날은 어느 집의 행랑채에 얻어 드는 때가 있기도 했지만...... 상황이 이러니 신체의 위생이 무사할 리가 없었다.

짚더미 위에 누워 잠을 이루는 경우 몸에 온기가 오는가 하면 그때부터 몸 전체가 예외 없이 이(蝨·Louse)란 놈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견딜 수 없는 것은 옴(itch)의 극성이었다. 임천을 떠난 지 일주일쯤 되었을 때부터 대원 중에 발생하기 시작한 이 옴이 노하구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절반이 넘는 수에 전염이 되었고, 이후 이 옴을 파촉령을 넘을 때까지 신기하게도 김준엽, 장준하를 제외하곤 모든 단원들에게 옮겨 붙었다. 애기들과 여인들은 거의 사경에 이르렀다 할 만큼 악성이 되어 있었다.

장준하의 돌베개는 이런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전해준다.
“습기가 베어오는 밀짚에선 무엇이 옮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녁마다 주어온 깨어진 사기그릇에 콩기름을 붓고 솜을 말아 심지로 꽂고 불을 밝히며 돼지기름과 유황을 사다가 한데 끓여 그 놈을 그 옴자리에 바르느라 야단들이었다. 꼭 공동목욕탕에서나 볼 수 있는 것 같은 장면이 매일 저녁마다 벌어졌다. 유황의 지독한 냄새가 질식시킬 듯 했다. ... 계곡이 진 곳에 햇빛을 마주하고 쭈그리고 앉아 쉴 때엔 이 휴식을 방해하는 이(蝨)의 난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옷을 온통 벗어 잡기도 하지만 역불급이었다. 드디어는 내복을 벗어 뒤집어 활활 털면 후두둑 후두둑 보리알 같은 이가 깨끗한 눈바닥 위에 떨어져 바둥대다가는 빨간 색깔로 변하며 죽어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누빈 동복이라 그 누빈 바느질 틈에 끼인 놈은 털어도 털어도 떨어지지 않았고, 속내의 한 벌 없는 우리는 오랜 햇살로 그 추위를 이겨낼 수도 없어 그냥 몇 번 털고는 다시 입고, 다시 입고 해야 했다.”(돌베개 p.226, 259).

필자가 장준하의 중경행군 도중의 일단에게 있었던 그의 희비를 엮어놓은 드라마 같은 이 사건을 전하는 것은 삶이란, 더군다나 뜻을 지닌 삶이란 그 같은 어처구나 없는 참경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존엄>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다. 삶은 선택을 불허하는 것, 어떤 이들은 생존권(生存權)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 국가권력이, 힘의 소유층이 인민을 억압하고 그 인권을 유린할 때, 사악한 제도 권력이 <맨 사람>을 도구화 하려 할 때 함성으로 인민이 생존권을 주장해야 한다. 생존권이란 말의 사용은 오직 그럴 때뿐이다. 지존자 앞에서의 생존권이란 용납될 수 없는 말이다. 생은 선택을 용허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다. 삶은 절대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뜻을 품은 삶>에서일까?

장준하는 위대한 삶을 살았다. <주신 삶>을 말없이, 고스란히 온몸으로 살아냈다는 데서 하는 말이다. 장준하는 생명이 아슬한 지경에서 불퇴전의 민주주의 신봉자로 살았다. 필자가 장준하의 삶에 <계약의>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다. <주신 삶>, <약속의 삶>, <뜻의 삶>을 살았다는 사실에서 말이다. 나를 내려놓은 사람! 그래서 장준하는 하늘의 삶을 살아낼 수 있었다.

우리가 인간 장준하를 더 알기 위해 임천 한광반에서의 <이·박(李·朴) 사건>을 알 필요가 있다. 같은 임천 한광반의 동료들이었지만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돼 국방경비대가 조직되면서 바로 국방경비대에 편입, 박모는 여순사건에서 기억될만한 공을 세우고 모 군사학교교장까지를 역임해 장성으로 예편한 자이고, 이모 역시 같은 길을 걸어 예비역 장성으로 군생활을 마감한 자이다. 이 박·이와 장준하 사이에 있었던 소위 <이·박 사건>은 생(生)의 추함과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필자 소개>

   
 
문대골

* 전)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

*한국기독교평화연구소 상임고문

*한국기독교장로회 생명교회 원로목사

문대골 목사  webmaster@ecumen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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