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교계·교회 칼럼 연재
나의 트라우마, 가방사건과 전두환의 호언선언<이해학 칼럼>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 승인 2015.03.23 12:27

몸의 기억 뿐 아니라 정신의 기억도 무섭도록 각인되어 인박히는 것을 본다. 이런 것을 트라우마라고 하는가? 누구나 성장기의 습관이나 상처가 남긴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나의 몇 개 트라우마 중 하나는 가방이다. 내 원래 습관은 버스를 타고 1분이면 잠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내가 버스만 타면 잠에 떨어진다고들 놀린다. 하지만 나는 변했다. 버스에 앉아도 내 무릎에 가방이 없으면 나는 잠을 못 잔다. 내가 왜 그런지를 나도 몰랐다.

1974년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시절, 집단 단식 주모자로 지목받아 격리차원에서 병동으로 쫓겨나 동료들과 분리시켜 놓았다. 병이 없이 강제 입원을 했으니 일종의 징벌방인 셈이다. 내가 있는 방에 ‘도노사마’란 사람이 있었다. 우리 방에는 박정희가 제거한 반혁명분자인 원충현 대령과 함께 구속된 이인수 대령이 무기수에서 감형되어 살고 있었다.
이와 함께 이 방에 출소해도 갈 데가 없어, 출소하면 다시 들어와 18범이 된 사람을, 이인수 대령이 감옥을 지키는 성주(일본말로는 城主, 도노사마)라고 이름을 지어주어서 그렇게 부른다.

   
 
그런데 그 도노사마는 잠을 잘 때면 베개를 머리에 베고 자는 것이 아니라 무릎 사이에다 베개를 끼고 자야 잠이 온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다리 밑에서 양아치로 살 때에 옷을 벗어서 걸어놓고 자면, 아침에 먼저 일어난 사람이 좋은 옷을 입고 나가버린다. 그러기에 늘 옷을 무릎사이에 끼우고 자는 버릇이 들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가방을 무릎에 얹어야 잠이 오는 것도 가방 트라우마 때문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왔다.

내 가방에는 지금 생각하면 별 거 아니지만 당시에는 중요한 것들이 있었다. 선교회 회계장부, 후원자 전화번호, 발표할 성명서 초안 등등 ... 어느 것 하나 정보부원들의 손에 넘어가서는 안 될 것들이었다.
사무실도 없었지만 사무실에서는 어김없이 없어지기에 가방에 안고 다녀야했다. 나는 가방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늘 어깨에 멘 가방끈을 한 손으로 잡고 다니며 주변을 살피는 버릇이 있다. 앞이나 뒤에서 오는 사람이 내 곁에 지날 때는 상대방의 공격에 대비해야 한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에 방어운전을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문을 나서는데 누군가가 내 가방을 낚아챘다. 나는 잽싸게 가방을 부둥켜안고 뒹굴면서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가방줄을 놓고 줄행랑을 쳤다. 내가 끌려가는 바람에 바짓가랑이가 시멘트 바닥에 긁혀 구멍이 났지만 다행히 가방은 안전했다. 우리는 이럴 때는 의례 정보부나 경찰 소행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었다. 국민이 가장 믿고 안심하고 기대야 할 곳이 피해의 근원으로 생각하는 불행한 시대를 산 것이다. 이렇게 나의 트라우마는 인박혀 가는 것이다.

그런데 가방 문제로 터진 진짜 사건은 1987년 4월 13일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선언 때문에 일어났다.

"본인은 얼마 남지 않은 촉박한 임기와, 현재의 국가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중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인은 임기 중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현행 헌법에 따라 내년 2월 25일 본인의 임기 만료와 더불어 후임자에게 정부를 이양할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 이와 함께 본인은 평화적인 정부 이양과, 서울올림픽이라는 양대 국가 대사를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해서, 국론을 분열시키고 국력을 낭비하는 소모적인 개헌 논의를 지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개헌의지가 국민적으로 폭발하였다. 이 의지는 오랫동안 담금질해 온 것이다. 1973년 장준하의 의지는 긴급조치로 막았고, 1979년 김재규의 의지는 12.12 군사변란으로 막았다.
결국 신군부와 민정당 정권은 잠시 안정을 잡는 듯했으나, 서서히 움직이는 1983년의 김근태를 중심한 민청련의 기지개를 필두로, 1985년 문익환 이창복 중심의 민통련의 개헌발동을, 유명한 치안본부 남영동분실에서 김근태 고문 등으로 막아왔다.
나라는 온통 숨 막히는 찜통같이 더욱더 고압으로 올라 가다가, 1986년 부천경찰서 권 양 성고문 사건이 터지면서 더욱 가속화하고 있었다.

   
 
1980년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은 제5공화국 헌법을 제정한 뒤 대통령에 취임했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유치하여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야당 탄압, 반체제 인사에 대한 인권 유린은 거대한 국민 저항을 키우고 있었다.

   
 
1987년 박종철 사건은,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의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을 잡기 위해, 후배인 박종철을 1월 14일 자신의 하숙집에서 체포영장도 없이 치안본부 대공수사관들이 끌고 갔다. 박종운의 소재를 알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아무 잘못도 없는 박종철을 잡아다가, 다음날인 1월 15일에 시체를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강민창 치안본부장은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소도 웃을 시나리오를 만들어 발표하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부검에 참여한 황적준 박사는 부검 결과, 온몸에 피멍이 들고 엄지와 검지 간 출혈 흔적과, 사타구니, 폐 등이 훼손되어 있었으며, 복부가 부풀어 있고, 폐에서 수포음이 들렸다고 발표하였다.

이 사건은 독재정권에 대한 압축된 불만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말았다. 전두환 대통령 호헌선언 이틀 뒤인 4월 15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서대문 선교교육원에서 ‘통일문제연구위원회’(현 화해통일위원회) 세미나를 열었다. 통일문제는 남북이 직접 만나지 못하는 한계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중재하며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지속해 왔다.

1981년 6월 제4차 한-독 교회협의회는 광주민주항쟁으로 인한 한국민주화운동의 장기간 침체기를 맞이한 데 대해, 기독교의 역할을 반성하며 통일에 대한 새로운 책임 각성을 논하였다.
무엇보다도 군부정권의 반(反)통일적 환경에서도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동포 기독자 간 대화모임을, 1981년 비엔나, 1982년 헬싱키 대화모임에 이어 1984년 10월 일본 도잔소에서 열린 <동북 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에 북측대표가 참여하지 못한 원인을 분석하며, 다음 모임 준비를 하면서 통일의 시대를 열어 가자는 것이었다.

문 입구에서부터 아는 형사들이 즐비하게 깔려서 감시하고 있는 삼엄한 분위기였다. 꼭 일제 때 독립운동가들을 감찰하는 모습 같았다. 어떤 정보부원은 나에게 오늘 통일문제만 논의하느냐, 대통령 호헌문제도 다루느냐고 물어오기도 하였다.

참 부화가 치밀어 오는 것을 억지로 참고 기다렸다가 토론 시간이 되어 내가 발언에 나섰다. “통일 문제는 원초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우리는 통일 문제에 매어있는 사이에. 자칫 당장 눈앞에 닥친 민주화 문제가 물 건너 갈 수 있지 않는가? 전두환 대통령 호헌선언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처사 이다. 또다시 민주화의 위기와 퇴보를 예견하고 있는 때, 박종철 고문치사에 항거하는 민중의 소리는 하늘을 찌르고 있다. 우리는 통일이 민주화이고 민주화가 통일로 연계되어있는 시점에서, 오늘 대통령 호헌선언 반대를 시작하고 그 증거로 개헌 서명 운동을 시작하자”는 발언을 하였다.

그러자 오늘은 통일 문제를 논하는 자리이기에 적절치 않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장성룡 목사가 나서서 적극 지지발언을 하면서 개헌 서명을 하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기울었다. 전문도 없이 그 뜻에 동조하는 분들이 종이에 이름을 써서 40여명 개헌 위한 서명을 하였다. 

   
 
염려했던 그대로 나오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바로 근처의 서대문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다. 나는 내가 서명 발언을 주창한 것을 시인하고 40여명에게서 개헌 서명 받았다고 시인하였다. 경찰은 개헌 서명 용지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고 나는 없다고 버텼다.
그러면 누구에게 있는가? 없다면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열어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다. 나는 영장 없이는 못 열어 준다고 밤새 실랑이를 하였다. 나는 이미 서명 용지를 가방에 넣고 나오려 하다가 다른 사람 가방에 넣어 주었기에 당당하였다.

다음 날 경찰관은 내게 지독한 놈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서 개헌 서명용지가 찾았다는 것이다. 밤새 몇 사람이 끌려가 많은 고생을 하였겠다 싶어 가슴이 아팠다. 끝내자고 하면서 조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시킨 대로 찍었는데 손가락 다섯 개를 다 찍었다.
이래도 되느냐고 하였더니 요식행위이니까 별것 아니라는 것이다. 괜찮겠지 믿었다. (나는 바둑을 두어도 마무리를 잘 못한다.) 그런데 나중에 해외에 갈려고 여권을 내려고 했는데, 한신대 다닐 때 성북경찰서에서 한 건과, 서대문서에서 불구속 기소가 되어 있어서, 그것을 푸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었다.  

   
 
오후 어둠이 깔릴 때 풀려나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현동 고개 쪽으로 줄을 서서 가고 있었다. “박종철을 살려내라!”는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그 날이 아현감리교회에서 박종철 고문피해 항의 기도회를 하는 날이다. 그날부터 결정적으로 6월 민주항쟁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꼬옥 껴안고 기도회의 물결 속으로 들어갔다. 아현동에서 서대문까지를 가득매운 흥분은 들판에 번지는 불이었다.

그 뒤 1987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 7주기 추도미사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였다. 민중의 분노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는 우리는 그 해 6월을 ‘괴로웠으나 행복한’ 행진을 하였다.

황 박사는 1년 뒤 부검과정 중,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전기고문과 물고문에 의한 살인 사실을 숨기려 협박과 회유를 하였다는 일기장을 언론에 공개하였고, 강민창 치안본부장이 구속되기도 하였다. 대공 경찰의 대부라는 치안본부 5차장 박처원의 주도 아래, 모두 5명이 가담한 고문치사 사건을 단 2명만이 고문에 가담한 것으로 꾸미고, 총대를 멘 2명에게는 거액의 돈을 주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다.

나는 지금도 내 가방을 무릎에 끼어야 잠이 온다. 도노사마처럼.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hebulge@naver.com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및 편집인 : 이해학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해학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19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