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이웃종교 칼럼 고정칼럼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정현진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⑭-2> 출애굽기 12장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 승인 2015.03.24 13:54

이번 <정현진 목사의 출애굽기와 노닐기> 열 네번째 순서는 분량상 두차례에 나눠서 싣습니다. - 편집자 주

* 설교힌트

1) 주님의 손 안에서 뛰어넘으리라 (유월절)

하나님은 이집트 땅에 두루 다니시며 몸소 열한 번째 표적을 시행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파라오에게 이미 열 가지 표적을 보여주었으나, 그에 합당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데 대한 심판이었다. 하나님과 그 말씀에 머무는 자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심은 은총이요, 구원이다. (시 11:7; 22:24; 119:135; 눅 1:26-28; 고전 13:12; 계 51:9 참조).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거나 그분 말씀을 등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심판이요 재앙이다. (시 3:6; 33:20, 23; 시 51:9 참조)

하나님의 선택받은 이스라엘 자손이 열한 번째 표적의 피해를 당하지 않고 그냥 넘어간 것은 순전히 하나님 은총이다. 출애굽기 처음부터 이제까지 그들이 하나님 마음에 쏙 들 만한 어떤 신실하고 선한 행동을 보인 것이 나와 있지 않다는 점에서. 교회는 이를 기념하여 유월절 축제(유대교는 학가다 축제, 천주교회는 파스카 축제)을 한다.

2) 자기만의 기념일

사람마다 가각 자기 나름의 기념일이 있다. 이를테면 생일, 결혼기념일, 칠순, 팔순 등. 그 사회나 나라 및 민족에게도 그런 것이 있다(국경일 등).

일 년에 생일이 두 번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하나는 그가 태어난 날이다. 다른 하나가 생겨난 유래는 이렇다. 그는 장항에서 군산으로 중학교를 다녔다. 강을 건너는 배를 타고. 어느 날 그 배에 사고가 났다. 그 날 사람이 많이 죽었다. 그 배를 타고 가던 그도 죽을 뻔했지만, 결국 살아났다. 이 일을 잊지 못하는 그는 그 날을 자기 생일로 삼았다. 태어난 날인 첫 번째 생일을 그는 가족과 함께 조촐하게 치른다. 다시 살아난 날인 두 번째 생일을 그는 목사님을 초청하여 가정예배로 드린다.

자기 인생의 어떤 계기를 그는 자신만의 기념일로 해마다 기억하며 거룩하게 보내는 것이다. 이 기억과 믿음이 그에게 건전하고 건강하게 사는 원동력이 되었다.

3) 분수령

예수님이 태어나시자 세계 역사가 달라졌다. 이를 기준으로 주전(BCE = before Christ era)와 주후(ADE = after Christ era)로 시대가 달라졌다. 이런 뜻에서 출애굽도 이스라엘에 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분수령이다. 노예로 사느냐 곧 자기가 세상에게 굴복당하며 자신의 인생을 가꾸지 못하느냐, 자유인으로 사느냐 곧 자기가 세상에 대해 자신의 인생을 소중하게 가꾸며 사느냐의 분수령이다. 출애굽 사건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 그리고 각 개인의 인생에 분수령이 되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 해가 해방 원년(元年)인 것이다.

개인 그리고 공동체에게 그 자신이 은혜 받은 때, 구원받은 때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인생에 분수령이 되었던 그 일은, 비록 평생에 단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영혼과 마음과 생활에 두고 두고 활력소가 되고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는 것이다.

4)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세례 요한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였다(요 1:29). 그의 이런 소개는 아마 출애굽기 12장에 받은 영감이었으리라.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양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죄를 짊어지고 피를 흘리신 영원한 제물이 되셨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어린양인 예수님에게 전가시키셨다.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신 하늘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예수님은 내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예수님의 피를 심령에 받아들이면, 우리 인생을 지배하고 이끌어가던 죄와 사망권세가 무너진다. (찬252장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 이것은 그 피에 어떤 수술적인 힘이 들어 있어서가 아니다. 이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온 맘으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온 몸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성령님에서 온유하고 겸손하게, 끈기 있고 강력하게 만들어 주시기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벧전 1:18-19)

   
 
5) 흠과 티가 없는 예물

하나님께 바치는 예물에는 반드시 경건한 정성과 거룩한 성별이 필요하다. 이런 것을 가리켜 흠과 티가 없다고 한다. 자신의 땀과 노력이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깨끗한 방법으로 취득하여 드리는 예물이 흠과 티가 없는 예물이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여기서 문제는 그 사회의 관행을 거슬릴 수 없어서 좋지 않은 방법으로 취득한 물질을 예물로 바치면 아니 되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것을 자기 합리화로 악용하면 곤란하지만, 실제로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와 형편에 속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생각해보면, 흠과 티가 없는 예물이란 결국 바치는 사람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달린 것이라 할 수 있다.

41 예수께서 헌금함을 대하여 앉으사 무리가 어떻게 헌금함에 돈 넣는가를 보실새 여러 부자는 많이 넣는데 42 한 가난한 과부는 와서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는지라 43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헌금함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44 그들은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의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막 12:41-44)

6) 문지방엔 피를 바르지 않았다

문틀은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상인방, 문설주 2개, 그리고 문지방이다. 문지방은 집이나 방을 드나들 때, 발아래 놓이는 부분이다. 우리 조상들은 문을 지날 때, 문지방을 밟지 않았다(밟지 말라고 가르쳤다). 그런데도 오래된 집이나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에 가 보면, 문지방이 많이 닳아 있다. 그만큼 사람의 발이 그곳을 건드렸다는 뜻이다.

유월절 어린 양의 피는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피다. 하나님의 은총이 선민에게 특별하게 작용하는 것을 보여주는 표식이다. 이 표지를 발로 밟을 수는 없다. 이에 하나님은 양의 피를 문에 바르게 하실 때, 문지방에는 그리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를 비유하자면, 하나님의 말씀(약속)과 사랑(은총)을 짓밟지 말라는 뜻이다.

이 말씀대로 행하는 자를 향해 하나님은 "피를 보고 넘어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착한 지, 또는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는지’가 기준이 아닙니다. 오직 피만 보고 지나쳐 간다는 것입니다. 머리로는 이상하게 느껴질지 모르겠으나, 문설주에 바른 그 피가 그 집 안에 있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우리의 구원도 오직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써만 주어집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6)

7) 구원의 피

이집트 온 땅에 맏이가 죽음을 당할 때,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그 소름끼치는 재앙이 임하지 않았다. 이렇게 피하는 수단은 어린 양의 피였다. 이 일을 이스라엘은 자자손손 기념하며, 유월절 잔치를 크게 벌이었다. 이 구원은 그들의 의롭거나 건전한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다만 그 집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느냐 아니냐가 그 기준이었다.

   
▲ 크라나흐 - Christus am Kreuz (1552-1555, Stadt Kirche Weimar)
예수님은 로마 병정들의 채찍에 맞아 피를 흘리셨다.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피를 흘리셨다. 그리고 로마 병정들이 창으로 그의 허리를 찌름으로 피를 흘리셨다. 죄도 허물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고난당시며 세 차례 흘리신 이 피를 가리켜 우리는 보혈의 피라고 부른다.

여러분은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 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그들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보살피게 하셨느니라 (행 20:28)

19 ...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히 10:19-20)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이다. 그런 뜻에서 기독교는 자력구원의 종교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타력구원의 종교이다. 이것이 매우 소극적인 태도로 보일지도 모른다. 특히 자기 수양과 마음수련을 통해 인간이 점점 더 완벽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인본주의자들이 보기에. 이런 뜻에서 각 사람은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하지 말아야할 것을 알면서도 행하였던 것, 해야 할 것을 알면서도 기피하였던 것, 누구에게나 칭찬과 인정을 받을만한 일을 하면서도 순수하고 깨끗하지 못하였던 그 마음 등 인간은 결코 완전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자기 힘으로 완벽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만이 불완전한 우리를 그나마 조금이라도 더 진실하고 선한 경지로 향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

정현진(수도교회 담임목사, 한신대 대학원 외래교수)  psalmen@hanmail.net

<저작권자 © 에큐메니안,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신문사소개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시 종로구 김상옥로 30, 402호  |  제호 : 에큐메니안
대표전화 : 070-4252-0176  |  팩스 : 0303-3442-0176  |  등록번호 : 서울 자 00392  |  등록일 : 2012.10.22
발행인 : 홍인식  |  편집인 : 이정훈  |  청소년보호책임자 : 홍인식  |  E-mail : webmaster@ecumenian.com
Copyright © 2022 에큐메니안. All rights reserved.
Back to Top